크리스마스 즈음이었다. 시어머니께서 남편에게 전화를 하셨다.
"아들아, 김치 다 먹었지? 오늘 잠깐 올 수 있니?"
시어머니는 우리 집 냉장고를 훤히 다 들여다보시는 것 같다. 김치가 똑 떨어진 줄 어찌 아셨을까.
"네, 엄마. 오늘 갈게요."
"며느리는 오지 말고 너만 잠깐 오너라."
"네."
시어머니는 남편에게 항상 '너만 잠깐 왔다 가라'라고 말씀하시곤 한다. 맞벌이하는 며느리를 배려해주시는 말씀이다.
"나 잠깐 다녀올게. 집에서 쉬고 있어."
남편이 겉옷을 입고 김치통을 챙겼다.
"아냐. 나도 갈래!"
"엄마가 안 와도 된다고 했어."
"아냐. 나도 나도 갈래!"
오지 말라고 하면 더 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청개구리 심보인 걸까. 나는 후다닥 외출 준비를 했다. 준비 시간은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나에게는 시댁 전용 교복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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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에 시아버지께서 좋아하시는 찐빵을 좀 샀다. 아무리 급해도 빈손으로 갈 순 없기 때문이다.
"어머님! 아버님! 저희 왔어요!"
"으잉? 며느리도 왔어?"
"허허. 너희들 왔구나!"
시부모님은 나의 깜짝 등장에 반가운 표정을 숨기지 못하셨다. 역시 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내가 보고 싶으셨나 보다.
나는 거실 식탁에 모락모락 김이 나는 찐빵을 올려놨다. 하지만 시어머니께서는 주방을 바삐 왔다 갔다 하셨다.
"어머님, 앉아서 같이 좀 드셔 보세요."
"응, 너희들 먼저 먹고 있어라."
시어머니는 김치통에 무김치, 배추김치, 물김치, 오이김치, 파김치와 같은 온갖 김치를 잔뜩 넣어주셨다.
"오이김치도 있네요! 맛있겠다."
나는 오이김치를 보며 군침을 흘렸다. 그러자 시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며느리 준다고 아침부터 내내 만든 거야. 오이김치 좋아한다며."
"헛! 정말요?"
나는 두 눈을 깜빡이며 시어머니를 바라봤다. 감사하면서도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시어머니께서는 빙긋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아냐. 이런 건 쉬워. 금방 해."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한동안 반찬 걱정은 없겠어요."
"반찬 걱정? 요즘 먹을 반찬이 없었나 보네. 가만있어봐. 내가 더 챙겨줄게."
"아, 아니 그게 아니고..."
시어머니께서는 주방을 한 바퀴 휘 둘러보시며 갖가지 음식 재료들을 챙겨주셨다. 이러다가 주방이 거덜 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나는 남편에게 눈빛으로 SOS를 쳤다.
'오빠, 이거 봐! 너무 많이 주셔!'
천하태평하게 거실에 앉아 찐빵을 음냠냠 먹고 있던 남편은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엄마, 너무 많아요."
"아냐. 이 정도는 줘야지."
남편은 시어머니와 몇 번 실랑이를 했다. 그리고 김치 3통, 고구마 한 봉지, 쌀 10kg, 곶감 한 줄, 모과청 한 통으로 간신히 타협했다.
시어머니는 모든 짐을 챙겨주시고 나서야 거실에 편히 앉으실 수 있었다. 나는 얼른 찐빵 한 조각을 드렸다.
"어머님, 찐빵 한 조각 드셔보세요."
"응, 그래. 맛있네."
우리들은 오손도손 자리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오랜만에 만나니 할 얘기가 참 많았다. 따뜻하게 내려오는 햇살이 식탁을 가득 품었다. 밖에 찬바람이 쌩쌩 부는데도 거실은 온기가 가득했다. 나는 베란다 정원을 가리키며 말했다.
"겨울인데도 꽃이 활짝 폈네요."
우리 집 정원 식물들은 말라비틀어져 죽어가는데, 이상하게 시댁의 정원 식물들은 사시사철 푸릇푸릇하다.
"그거야 여기가 정남향이라 그런 거겠지."
남편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진짜 잘 자라네요."
내가 미스터리하다는 표정을 짓자 시어머니는 베란다로 나가 꽃이 핀 식물들을 찬찬히 소개해주셨다.
"동백꽃이나 수선화는 겨울에 꽃이 피지. 이 건 지난주부터 이렇게 봉우리를 틔웠고, 저 거는 만발했어."
나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남편은 하품을 하며 말했다.
"배부르고 따뜻하고 햇살까지 내리쬐니 졸리네."
남편은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그만 갈래요."
"좀 더 있다가지..."
시부모님은 못내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셨다.
"그래, 오빠 좀 만 더 있다가."
나는 남편의 바짓자락을 잡아당겼다.
"아냐. 너무 졸려서 안 되겠어."
남편은 겉옷을 챙겨 입었다. 진짜 집에 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도 얼른 짐을 챙겼다.
"엄마, 아빠. 다음에 또 올게요!"
남편은 김치통과 쌀을 번쩍 들고 현관밖을 나섰다. 나는 고구마, 모과청, 곶감과 같은 자잘한 짐을 들고 따라 나갔다.
"이리 줘라. 내가 들고 갈게."
시어머니는 내 손에 든 짐을 뺏어 드셨다.
"아녜요. 어머니 이런 건 하나도 안 무거워요."
내가 다시 짐을 뺏으려 하자 시어머니는 짐을 든 손을 뒤로 숨기셨다.
"가자. 내가 배웅해 줄게."
시어머니는 차 앞까지 오셔서 짐을 실어주셨다. 아무리 괜찮다고 말씀드려도 막무가내셨다. 시어머니는 우리가 차에 올라타는 그 순간까지 뒤에서 묵묵히 지켜보셨다. 나는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어머니! 저희 다음 주에 새해 인사드리러 또 올게요."
그러자 시어머니께서는 손을 내저으며 말씀하셨다.
"다음 주? 다음 주에 왜와? 오지 마."
"그래도 새해잖아요."
"아니야. 우리는 생각하지 말고 그저 둘이서만 행복하면 돼. 알았지? 행복하거라!"
남편은 차에 시동을 걸었다. 주차장을 나서자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드는 시어머니의 모습은 멀어져 갔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남편은 피곤했는지 침대에 풍덩 뛰어들었다. 나는 남편을 향해 말했다.
"시댁은 따뜻했는데 우리 집에 오니까 확 춥네."
"그러게. 아까는 배부르고 따뜻하고 너무 졸렸어.... 하암.... "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혹시 시부모님 마음이 따뜻해서 집도 따뜻한 거 아냐?"
"뭐야, 그런게 어딨어."
"어딨긴. 진짜 그런거 아냐?"
"..."
"오빠? 자?"
"..."
남편은 그대로 누워 스르르 잠이 들었다.
"진짜 잠들었네."
나는 남편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가져온 김치통을 냉장고에 차곡차곡 넣었다.
가슴 한 구석에 시어머니를 향한 감사의 마음도 꽉 차는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어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