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희는 유복하진 않아도 꽤 잘 사는 집 딸이었다. 아래로 남동생 하나 있고 고생도 모르고 자란 대학생이었다. 부모님 모두 여행 가시고 안 계신 어느 날, 문간방에 세 들어 살던 총각 하나가 창문을 타고 넘어와 선희를 덮친 것이다. 그리고 미영이를 가졌다. 6개월이 다 되도록 아기를 가진지 몰랐다. 배가 나오고 속이 더부룩해도 그러려니 할 정도로 수더분한 성격이었다. 시일이 너무 지나 미영이를 어쩌지 못하고 문간방 총각을 따라나서서는 미영이를 낳았다.
문간방 총각은 처음엔 그래도 살아 보겠다고 이것저것 열심히는 했다. 선희 친청에서도 친정 아빠 몰래 친정 엄마가 한 번씩 뭉칫돈을 놓고 갔다. 그것으로 여러 번 고비를 넘기며 미영이를 키웠다. 그래도 따박따박 벌어다 주는 남편 월급만큼은 못한 지 세간 살림은 피지 못했다.
선희는 길 가다 한 번씩 돌아보게 되는 미색은 아니었지만 다부진 체구에 똑 부러지는 인상이 한번 본 사람도 기억나게 만드는 흔하지 않은 분위기를 내뿜었다.
미영이가 그런 엄마를 닮아서인지 학교에서 반장은 따 논 당상이었고 어디 가서 야코죽는 법은 절대 없었다. 미영이는 초등학교 4학년이다. 자그마한 체구에 마른 몸과 엄마가 가끔 잘라주시는 똑 단발로 귀염성 있는 아이였다. 말 한마디 한마디 어찌나 야무지고 똑 부러지게 잘하는지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도 당최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선희는 그런 똑 부러지는 딸을 보면서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았다.
영팔이는 하는 일이 잘 안 풀리자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 한 달에 두어 번씩 술을 입에 대며 선희를 괴롭혔다. 술주정도 했다. 술만 안 먹으면 세상천지 그렇게 자상한 사람이 없었다. 미영이를 무르팍에 앉혀 놓고 이런저런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고, 평상시 선희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가졌다.
직장생활을 해보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면접을 보고 있었지만 자격증 하나 학벌 하나 번번치 못한 영팔이는 매사에 떨어졌다. 일용직 노동자로 근근이 벌어다 주며 없으면 없나 보다 넘치는 욕심 하나 없는 사람이다. 답답할 만큼 고지식해 세상 돌아가는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몰라 몰상식했다. 그러니 대학물까지 먹어 본 선희와 맞을 리 만무했다.
영팔이는 열등감에서인지 선희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술만 먹으면 사람이 헤까닥 하고 변했다. 그런 아빠 때문에 미영이는 아빠의 술 먹는 주기가 돌아올 때쯤이면 심장이 어느 순간부터 날뛰기 시작했다.
심장이 벌렁벌렁할 때마다 미영이는 심장을 부어 잡고 속삭였다. 그것이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다. 심장이 다시 조용해지는 만병통치약은 엄마였다. 엄마 품속에 속 파고 들어가 안기면 언제 그랬냐는 듯 심장이 금세 말랑말랑해지고 말 잘 듣는 순한 아기가 되었다. 이 비밀은 아직 엄마도 모른다. 심장과 미영이의 아주 고급스러운 비밀이었다. 오늘도 슈퍼 앞에서 엄마를 만난 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안 그랬으면 이놈의 심장이 또 어찌 되었을지 미영이도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