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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끼의 지혜 Oct 23. 2022

학원 쉽니다.

   

  찌는 듯한 더위가 지나가고 아침저녁으로 살랑살랑 시원한 바람이 불더니 이제는 낮에도 가디건을 걸쳐야 했다. 가을이 온 것이다.

   가을의 바람은 봄에 부는 바람과 확연히 다르다. 봄에 부는 바람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몰고 올 호기심 가득한 바람이라면, 가을에 부는 바람은 한낮 더위를 이겨내고 뛰어놀던 아이들이 하나 둘 밥 먹으러 들어갈 즈음 해질녙 노을과 같은 바람이랄까?

  옆구리에 책을 한 권씩 끼고 돌아다녀야 얼굴이 빳빳이 세워지는 계절이다.

  나무들이 온통 울긋불긋 자신을 뽐내던 어느 날, 오후였다. 여느 때와 다를 게 없는 일상 속에 아이들이 오기 전 청소며 빨래며 하느라 분주했다.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후에야 비로소 의자에 앉을 수 있었다. 커피를 한잔 타서 잠깐의 여유를 즐기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와.. 날씨 한번 좋네.'

집에 있기에는 너무 아까운 날씨이다. 누구를 불러내 어디 좋은 커피숍이라도 갈까 하다 이내 포기한다. 본디 아줌마들이란 한번 앉아서 수다를 떨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어날 줄 모른다. 아이들 스케줄을 곰곰이 생각해 본다.

  '영어학원, 수학학원.... 농구'

틀렸다. 농구가 끼워 있었다. 차로 20분이나 가야 하고 차량도 안돼서 기다렸다 데리고 와야 한다. 보강도 아이 스케줄 상 잡기 힘들다. 나는 울상이 되었다.

  '이런 날 운전기사라니 아이들 학원이라도 빼고 바람이라도 쐬러 갈까 했더니.' 나는 매일 같이 옆구리에 끼고 다니던 책을 펼쳤다. 10페이지 정도 읽고 도통 진도가 나가지 않는 책을 꾸역꾸역 읽기 시작했다. 좋은 말들이다. 머릿속에 집어넣기 위해 애를 쓴다. 그러다 저절로 머리가 위아래로 흔들거린다. 이내 철퍼덕 고꾸라져 스르르 잠이 들었다.


  결혼 전 어느 가을날이다. 아파트 주차장 주변으로는 빨갛게 익은 고추와 깨가 널어져 있다. 누구 하나 뭐라는 사람도 없다. 가지고 가는 사람도 없다. 가을 하늘 아래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고추와 깨가 바짝 마르기만을 기다린다. 주인이 있는지 없는지 몇 날 며칠을 그 자리 그대로 걷어질 날 만을 기다렸다.  나무마다 탐스러운 열매도 주렁주렁이다. 노르스름한 감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고 먹지 않아도 따고 싶다.

  여기 살고 있는 아파트는 오래되고 비싸지도 않다. 평수도 넓지 않다. 경제적으로 쪼들리며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으스대거나 뻐기는 사람도 드물고 그저 나 살기 바쁜 그런 아파트이다. 아들, 며느리가 돈 벌려 나가 낮에는 손주들을 돌보는 할애비, 할미들도 많다. 놀이터에 삼삼오오 모여서 손주들이 노는 것을 본다. 아파트는 오래될수록 수목들이 울창해진다. 단풍이 깃든 아파트는 보면 볼수록 예쁘다. 점점 무르익어 가는 어느 가을날 오후에 부모님이 산책을 나가셨다. 나가실 때는 작은 소쿠리도 하나 챙기셨다. 산책을 끝내고 오신 부모님의 작은 소쿠리 안에는 벌써 감이며, 대추가 가득하다.

  "이게 다 뭐예요? 이런 거 이렇게 막 따도 괜찮은 거예요?"

나는 내심 걱정이 되어 여쭤보았다.

  "괜찮지 그럼, 할마시들 다 따서 가는데."

  "동네 사람들 다 와서 따가드라."

  "하나 먹어봐라."

아버지가 주신 감 하나를 먹어 보았다. 떫은맛이 있지만 달다.

  "이걸 어떻게 다 따셨어요? 높은데도 많이 달렸던데."

  "허허허. 높은 데는 나무를 살살 흔들면 땅에 널쩌."

  "어떤 아줌마들은 긴 나무도 가지고 다니시면서 다 따시기는 하시더라구요."

두 분은 다녀오셔서 감이며 대추며 베란다에 주욱 늘어 트려 놓으셨다.


  결혼 전 가을은 참 짧았다. 옆구리가 허전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서울 잠실로 출퇴근을 했고 롯데월드 앞을 아침, 저녁으로 지나다녔다. 그 앞을 다니면서 롯데월드는 한번도 가지 않았다. 언제든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출퇴근하는 1년 동안 나는 한번도 가지 않았다. 오히려 옆에 없고, 눈에 안 보이니 더 찾게 되는 것이 사람 심리이다. 그래서 그런가 회사를 그만두고 일부러 시간을 내서 롯데월드에 갔다.

서울 살면 여기저기 편하게 많이 다닐 것 같은데 정작 서울 사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언제든 갈 수 있다는 생각에서 일까?

  "너는 지방에 살면서 서울에 자주 온다. 나는 서울에 살아도 한 번도 안 가 본 곳을 어떻게 그렇게 잘 다니니?"

하는 말들을 많이 들었다.

  가까이 있으면 소중하다는 것을 망각하기 일쑤이다. 계절이 바뀌어 올 때면 떠나는 계절이 그립고 그립다.  이 더운 여름이 나에게 또 언제 오려나.. 이 고즈넉한 가을이 안 가고 계속 내 옆에 있었으면.. 호호 불며 이 추운 겨울을 붙잡고 싶었던 날은 없었는지..


  고개가 끄덕끄덕 대다가 순간 밑으로 훅 떨어지면서 잠에서 깨어났다. 머리가 띵하면서 멍하다. 다시 커피를 한잔 타서 정신을 차려 보려 애쓴다.

  '이런 날 학원은 무슨 학원이야?'

  '놀러 가야지'

학원 원장님께 일단 전화부터 돌린다.

  '오늘 아이들 쉽니다.'

문자를 보내 놓고 아이들이 학교에서 오기를 기다린다. 기다리는 내내 설레인다. 이 가을.. 참 청명하다. 원래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하지 않던가. 가을이 다 가기 전 이 가을을 온전히 만끽하고 싶다.





*10월호 월간슬초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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