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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망나비 Jun 18. 2020

찬 밥이 찬 밥이 아니다.

'선선아, 일어나봐.'


한밤중이었다. 엄마가 자는 나를 다급히 깨웠다. 내 옆에서 자고 있던 남동생도 흔들어 깨웠다. 


'....엄마..'


동생과 나는 나란히 볼멘 소리를 하며 눈을 비볐다.


'뱀이 들어온 것 같애. 눈 똑 바로 뜨고 있어.'


뱀이라는 소리에 나와 동생은 화들짝 놀라 구석에 몸을 숨겼다. 

그 사이 엄마는 바깥 문을 활짝 열어 제치고는 빗자루를 집어 들어 우리가 누웠던 마루 밑을 휘휘 저었다. 나와 동생은 둘이 꼭 붙어서 엄마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얼마 후 쉬익 소리가 나면서 길다란 밧줄같은 것이 스스륵 마루밑에서 흘러 나왔다. 엄마가 흠칫하고 옆으로 비켜 선 사이 뱀은 문밖으로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제서야 엄마는 마룻장에 털썩 주저 앉았다. 우리는 엄마- 를 부르며 달려가 품에 안겼다. 

나 국민학교 5학년, 내 동생 1학년 때의 일이다. 그리고 엄마 나이 고작 서른 한 살 때였다. 



우리는 집이 없었다. 지붕과 벽이 있는 진짜 집 대신 아빠가 슬레이트로 얼기설기 엮은 움막 같은 곳에 살고 있었다. 그 움막은 드 넓은 농경지 한 가운데 덩그라니 있었다. 아빠는 움막 안에 방구들 대신 마룻장을 깔아 주었고, 마룻장 옆에는 부엌 세간을 두는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그릇 몇 가지, 냄비들, 그리고 곤로가 있었다. 거기에서 엄마는 밥도 짓고 국도 만들었다. 우리는 마룻장에 앉아 엄마가 저녁 준비 하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부엌 세간 근처에 출입문 대용으로 널빤지가 달려 있고 그걸 열면 바로 마당의 흙바닥이 보였다. 엉성한 문 틈으로 귀뚜라미, 매미, 모기, 파리 할 것 없이 각종 벌레들이 드나 들었고 때로는 쥐, 개구리, 뱀 같은 것들도 방문을 했다. 그 날 밤 엄마는 잠결에 쉬이익 하는 소리를 들었고 벌떡 몸을 일으켜 우리를 깨운 것이었다. 


아빠는 주중에는 집에 없었다. 그는 신학생이었고 주로 김전도사로 불렸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며 틈틈이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이 움막이 있는 허허벌판은 김전도사의 첫 목회지였다. 그나마 사람 사는 마을은 걸어서 20분은 가야 했다. 그는 일명 개척교회 전도사였고 우리는 그에 딸린 식구들이었다. 아빠는 학교를 다니지 않는 날에는 엄마랑 둘이서 시멘트를 개고 움막 옆의 빈터에 벽돌을 올렸다. 예배당이었다. 


나와 동생은 40분 정도를 걸어 학교에 다녔다. 그 날도 학교를 다녀 온 우리는 예배당 공사터에서 흙장난을 하고 놀던 중이었다. 아빠는 금요일 저녁이나 되어야 돌아오니 아직 며칠은 더 기다려야 했다. 엄마는 부엌에 있었고 곧 저녁을 먹으라고 우리를 부를 터였다. 


'선선아, 똘똘아!'


엄마가 우리를 불렀다. 우리는 흙손을 털고 움막 안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마룻장에 앉아 있었다. 엄마가 차린 양은 소반에 쌀밥 한 공기, 콩나물 국, 김치 한 접시가 올려져 있었다. 


'너희 먼저 먹어.'


그러고 보니 상위에는 숟가락 젓가락 두 벌에 밥은 한 공기 뿐이었다. 


'엄마는?'


내가 물었다. 동생도 멀거니 엄마 얼굴을 보았다. 


'엄마는 배 안고파.'


나와 동생은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 엄마가 배가 고프지 않을 리가 없었다. 


'밥이 없어, 엄마?'


내가 물었다. 

엄마가 억지 웃음을 지었다. 


'... 밥이 이것 뿐이야. '


'왜 밥 더 안했어?'


'..쌀이 떨어졌어.'


나와 동생은 말이 없었다. 엄마, 아빠에게 돈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소풍이나 운동회 같은 특별한 날에도 우리 남매는 용돈을 받을 수가 없었다. 무엇이든 생기면 아빠는 쌀보다는 벽돌을 사는 것 같았다. 그 때문에 쌀은 이웃 동네에서 벼농사 짓는 권사님이 한 번 씩 주고 간다는 것을 우리 남매는 잘 알고 있었다.


'권사님이 쌀 안줬어?'


'잊어 버리셨나 봐. ...엄마 진짜 배 안고파. 너희 먹어.'


'그럼 나도 안 먹을래. 배 안고파.'


내가 먼저 말했다. 


'나도 안 고파.'


1학년 어린 동생이 나를 따라했다. 

우리는 엄마와 얼마간 실강이를 했다. 우리 남매가 끝내 안먹겠다고 고집을 부리자 엄마는 상을 물렸다. 그 찬 밥 한공기는 그렇게 하루 밤을 넘겼다. 


다음 날 아침에도 우리는 밥을 먹지 않고 학교에를 갔다. 엄마가 먹지 않는 한 우리도 먹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린 탓이었다. 무슨 조화였는지 배가 고프지 않았다. 밥을 먹지 않았을 뿐 일상은 그대로였다. 학교에서 돌아와 숙제하는 동생을 도와 주고 내 숙제도 했다. 평소 같았으면 한 두 번 다투었을 텐데 그 날 우리 남매는 서로에게 친절했다. 엄마는 아직 지붕이 없는 예배당 공사터에서 아빠의 부재동안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간간이 모퉁이에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도 했다.  


아직 해가 넘어가기 전이었다. 바깥에서 인기척이 났다. 나와 동생이 달려나가자 경운기 한 대가 와 있고 한 아저씨가 쌀푸대를 내리고 있었다. 우리가 아는 그 권사님도 함께였다. 


'쌀 떨어질 때가 되었는데 제가 늦었세요.'


권사님의 손을 붙잡고 엄마는 고맙습니다, 를 연발했다. 우리도 나란히 서서 고맙습니다, 합창을 했다. 


엄마는 서둘러 저녁을 준비했다. 밥 짓는 고소한 냄새가 움막안에 그윽하게 퍼졌다. 우리는 부엌에서 달그락달그락 저녁 준비하는 엄마를 재잘거리며 구경했다. 

반찬은 그대로 였다. 김치와 콩나물국. 그리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쌀밥이 소반 위에서 반짝 거렸다. 밥공기가 세 개다. 우리 셋은 밥상에 모여 앉아 기꺼운 저녁 식사를 했다. 노란 전구 불빛 아래로 날파리들이 모여 들었다. 그 날은 그들 마저도 행복해 보였다. 


하루 밤과 하루 낮을 넘긴 그 찬 밥은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누룽지를 만들었든 국에 말았든 결국 우리 뱃속으로 들어갔겠지. 


찬 밥 신세란 말이 있다. 차갑게 식어 버려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다는 의미일테다. 그러나 그 하루의 밤낮 동안 동그마한 찬 밥 한 공기는 우리 가족에게 모든 것이었다. 그게 없었다면 어린 엄마는 정말 슬펐을 지도 모른다. 어린 동생과 나도 정말 배고팠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그 자리에 있어서 우리는 그 날을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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