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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망나비 Jun 09. 2020

퇴사를 마음 먹은 날

기억은 사라지고 기록은 남는다.

2018. 1. 28. 일요일


좀 더 건조해져야 된다는 생각을 한다. 예전의 글들을 읽어보니 감정이 진득거리는 느낌이 걸린다. 그게 분노이든, 질투이든, 사랑이든, 무엇이 되었든 간에 적당에서 넘치면 내가 쓴 글인데도 몰입이 힘들다. 글이 마른 낙엽처럼 바작거렸음 좋겠는데 축축해. 


치타에게는 두 가지, 업무적 리포트와 개인적 리포트를 같이 보내야 한다. 요즘 밤낮으로 치타 생각이다. 상사병도 이보다는 증상이 덜할 것 같다. 신나지는 않지만 필요한 과정이다. 깊이 생각해 보지 않고, 묘수를 마련해 두지 않은 채로 일을 저지르고 싶지는 않다. 


이 기업을 떠나고 싶지 않다. 만 7년을 일했다. 즐겁게 일했고 많이 배웠고, 의미가 있었다. 적당한 내 자리도 마련되었다. 마음 맞는 몇, 친구라고 할 만한 관계도 생겼다. 일 바깥으로는 그런 관계 다 끊겼다. 투자도 했다. 아직은 아무것도 나오고 있지 않지만. 


그런데 대표인 치타와 갈등이 깊어졌다. 갈등은 치타 편에서는 내 탓이고 내 편에서는 치타 탓이다. 그러나 그것은 대외적으로 그렇게 보일 수 있다는 뜻이고, 사실은 내가 문제이다. 


기업을 떠나고 싶지 않지만 나는 치타가 싫다. 여기에서 그가 도덕적으로 옳고 그른지는 중요한 사안이 아니다. 원래 사업과 정치라는 것은 도덕과 계율을 뛰어 넘는 경지를 최고로 여기니까. 다들 그 1%의 리그에 들어가기 위해서 인생을 담보 잡히니까, 치타가 그걸 하고 있다는 이유로 탓할 생각은 없다. 물리적으로 자연스러운 수순에 돌입한 것이다. 그 물리 앞에서 그건 틀려요 이건 맞아요 를 얘기하는 것은 두 살 바기의 옹알이처럼 들릴 테니까. 그 와중에 희생되는 가치와 개념을 토로하는 것은 얼마나 촌스러운 태도인가. 


그러나 나는 사춘기 시절부터 여태 그것과 싸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일상에 스며든 부조리의 권위. 그것은 한 때는 아버지였다가 학교 제도였다가 선생님이었다가 대학 선배나 직장 상사 등으로 바뀌었다.


 그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문제는 언제나 그들이 나보다 더 강했고 현명 했다는 점이다. 그에 순응하기만 하면 평화와 보상이 보장되었다. 문제를 만들지만 않으면 제도와 권위는 유리한 것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마흔이 넘도록 나는 그것을 못한다. 그렇게 하려고 할 때 슬프다. 그 순간에 무엇을 위해서 이 슬픔을 견디는가? 라고 묻게 된다. 돈 때문에, 지켜야 할 가족 때문에, 혹은 꿈 때문에? 다들 어떤 대답을 가지고 있을까? 무엇을 위해서 이 무거운 부조리를 견뎌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나, 개인은 답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형평성을 해치는 권위를 견디는 무게와 견줄 더 절박한 이유가 내게는 없다. 기어이 나의 존엄이 가장 절박한 문제라고 하면 다들 웃을라나.


나는 지난 7년 동안 내가 속한 직장의 문화가 다른 곳과는 다르다는 강한 신념과 자부심이 있었다. 가치 경영, 의 메시지가 나를 여기까지 이끌었다고 믿고 있다. 저속하기 짝이 없는 다른 경영자들과 달리, 내 회사의 대표는 품위 있는 사람이라서 좋았다. 


지금에 와서 그가 품위가 없다고, 상장 말고는 관심이 없다고, 상명하복을 원한다고, 노동자의 존엄에는 관심이 없다고, 그가 변했다고 화를 내는 것은 참으로 순진한 발상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수순이다. 거대하고 도도한 흐름 안에 우리 대표 휩쓸려 갔고, 물결은 더 거세어졌을 뿐이다. 아마 거기 어떻게든 꼭 붙어서 살아 내면 나도 자본주의의 꿀맛을 함께 누릴 수도 있겠지. 치타 말대로 구멍가게 감성을 벗고 진정한 자본가의 감각을 연마하며. 아, 그러고도 싶다. 투자도 한 마당에. 


아서라. 너는 그 울분을 견뎌내지 못한다. 너의 내장과 살을 내어주어야 할 것이다. 

왜, 라고 물어라. 질문하지 못하면 괴물에게 먹히고 만다. 

그가 자본가의 입장에 서서 노동자에 대해 발언했던 그 순간, 그와 나의 계급이 선명했다고 느꼈던 그 순간 어쩔 수 없이 네, 라고 동의할 수 밖에 없었던 비참함을 떠올려봐. 


결과적으로 나는 이 기업 안에서, 부조리한 권위와 부딪쳤다. 아버지, 학교, 선생님을 잇는 나보다 강하고 현명한 부조리와 만났다. 공교롭게 그것이 이 회사 주인이었던 것 뿐이다. 그게 치타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어떤 식으로든 신나게 싸워 주었겠지. 허나, 대표와 싸우는 것은 모두를 흔드는 일인데다 나도 치명상을 입는다. 앞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없다. 그가 좀 더 합리적이고 품위 있기를 바랬던 나의 소망은 점점 소멸되어 가고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유시민의 질문이다. 그는 쉰 넘어 인생 경로 바꾸었다. 나 마흔 중반에 접어 들고 있다. 나머지 인생, 어떻게 살 것인가. 마침, 그 시기가 왔다. 사춘기 적 감성은 벗고 차가운 이성으로 생각해라. 시간이 필요하면 시간을 써라. 급히 생각할 것 없다. 천천히 곱씹어가며 네가 원하는 인생을 향해 나아가라. 




오랫동안 몸 담은 회사를 떠나기로 마음 먹었던 날의 기록. 정확히 10개월 후에 퇴사했다. 나름대로 비장했구나. 얼마나 잘 한 선택이었던가. 그 시간의 나를 응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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