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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망나비 Sep 28. 2020

[소설] 반항하는 인간 3

사자가 목을 물어 뜯을 때

 처음에는 남자가 수작을 걸려는 거라고 생각했다. 수작치고는 어수룩했다. 노부부가 메뉴를 보고 있는 사이 남자는 자신이 기억나지 않냐고 물었고 그럴리가 없는데 라면서 기연을 세워놓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남자가 그러는 걸 노부부는 별일이라는 듯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기어이 그는 부부를 먼저 보내고 남아서 와인을 주문했다. 더러 수작을 부리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보이는 패턴에 비하면 이 남자는 초급입문 정도의 수준이었다. 매끄럽지 못하다고나 할까. 언뜻 봐도 기연보다는 연배로 보였는데 갈색 뿔테 안경과 하얀색 트레이너 때문인지 학생처럼 보이기도 했다. 남자의 부모는 일찍이 봐 온 터였다. 노부부가 간혹 손자, 손녀를 데리고 들르거나 김여사가 혼자 와서 조용히 식사를 하곤 했었다. 점잖은 부부라고 생각했는데 저런 얼치기 아들이 있는 줄은 몰랐다. 부족한 것 없이 자란 탓인지 얼굴이 해사하고 키도 훤칠한 게 고생한 흔적이 없다.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아요? 그런 멘트를 가지고도 여자를 꿰어낼 수 있었던가 보았다. 세상 사는 게 쉽지? 기연은 남자가 아니꼬웠다.


남자는 영업시간이 끝날 때까지 같은 자리에 앉아서 와인을 마셨다. 남아 있는 손님이라고는 그 남자 뿐이었다. 직원이 다가가 영업종료를 알리자 기연을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기연이 테이블 앞에 서자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일하시는 곳인데 사적인 질문을 하면 곤란하실 것 같아서 끝날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제가 이 동네는 잘 알지를 못해서 마땅히 기다릴 곳도 없었고요. 맹세코 위험한 사람은 아닙니다. 5분만 시간을 뺏어도 될까요?.”

남자가 동의를 구하며 기연을 치어다 보았다. 대답이 없자 남자는 말을 이었다.

“아까 제 부모님 보셨죠? 그 분들 심부름으로 지난 주에 OO동에 있는 AA카페에 갔었어요. 제가 앉은 곳에서 한 시 방향에 당신이 앉아 있었고요. 마침 저도 심부름을 망쳐서 혼자 남게 되었는데 당신과 눈이 마주쳤어요. 정확한 계산은 아니지만 적어도 십초 정도는 서로 마주보았을 겁니다. 제가 이걸 상세하게 기억하는 건 아마 그 쪽 표정때문이었을 겁니다. 손에 칼이 쥐어져 있었다면 누군가를 찌를 수 있을 것 같은 표정이었어요. 아시죠? 분노가 싹 사라지고 차가운 이성만 남은 상태 말입니다. 완전한 살인은 그 때 일어날 수 있을 겁니다. 분노나 환희는 정작 중요한 일을 망치고 말죠. 앞에 앉았던 남자분이 탁자 밑에 난자되어 있었다고 해도 놀라지 않았을 거에요. 그 정도로 강렬했어요. 여하간 제가 말을 걸려고 하는 순간에 그 쪽이 벌떡 일어나서 나가버리더군요."

남자가 말을 멈추었다. 남자의 눈은 풀숲에서 청개구리를 발견한 아이처럼 반짝였다. 아직 5분은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 원하시는 건 뭔가요?"

마침 홀안의 음악이 뚝 끊겼다. 정적이 흘렀다.

"그 쪽하고 친구가 되어 볼까 하고요. 물론 그러고 싶으시다면."

"그러기 싫다면요?"

"어쩔 수 없죠. 하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거에요. 조금의 호기심이라도 있다면 코를 들이밀고 궁금증을 해소하는게 정신건강에 좋아요. 애석하게도 요샌 이 호기심이라는게 잘 발동하지도 않아요. 매사가 지루하고 심드렁해지기 쉽거든요. 그게 얼마나 위험한지 아세요? 광란은 권태의 이면이라더군요. 제가 한 말이 아니고 카뮈가. 그러니 어쩌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대상을 만나는 건 행운과도 같아요. 권태를 이길 방법을 찾는 건 미치지 않기 위한 방책으로 반드시 필요하거든요. 그게 책일수도 있고 사람일수도 있고 일일 수도 있고요."

"죄송합니다."

기연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마감시간이 넘어서 돌아가셔야겠습니다.”

기연은 감정이 섞이지 않도록 노력하며 고개를 숙였다. 몸을 돌려 멀어질 때 남자가 그녀의 등뒤에다 대고 말했다.

"혹시 마음이 바뀔 수 있으니 명함을 놓고 가겠습니다."




지난 주 기연은 B를 만났다. B를 보지 않은 지 삼 년이 다 되어 가던 중에 갑작스럽게 그가 연락을 해 왔다. 사법고시에 합격했다면서 밥이나 먹자는 내용이었다. 마침 보고 싶던 사진전도 하고 있어서 서울 간 김에 그녀는 B를 만났다. B는 식사 후 들른 카페에서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다시 기연을 만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지금의 자신은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고 했다. 그러보니 시험에 합격한 탓인지 B는 예전과 달리 자신감과 여유를 보여주려고 애쓰고 있었다. 결혼을 하면 어떻겠냐고 B가 물었다. 지금 마시는 커피맛이 어떠냐고 물어보는 듯한 투였다. 자신이 달라졌다고 믿고 있었지만 기연의 눈에는 그가 여전해 보였다. 삼 년전에도 결혼 얘기를 꺼냈다가 헤어졌었다.

"그 때는 내가 공부 중이었고 미래가 불투명했으니까 밀어 부칠 수 가 없었지만 지금은 달라. 이제는 계획을 세울 수가 있게 됐어."

기연은 김이 빠졌다. 혹시나 신선한 제안을 받지 않을까 기대했던 자신을 속으로 나무랐다.

"나는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 결혼은 하지 않아."

기연은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부러 건조하게 말했다.

"이제 내 미래는 탄탄대로야. 내가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려왔는지 알아? 당당하게 네 앞에 서는 순간..."

멜로 드라마 같은 대사를 더 듣고 있을 수가 없어서 기연은  다시 입을 열었다.

"판검사가 될 사람과 결혼할 여자들이라면 줄이라도 세울 정도로 많아. 그러니 다른 데서 찾아. 나는 아무와도 결혼하지 않아. 3년 전에 너를 만나던 중에도 내가 다른 남자 만났던 걸 너는 알고 있었어. 어떤 때는 다른 사람의 침대에서 일어나 너의 침대로 가기도 했어. 그건 내가 너를 무시해서야 아니야. 누군가의 소유물로 여겨지는 게 나는 숨이 막혀. 어느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았다는 증명이 항상 필요해. 연애를 하면 다들 서로에게만 종속된 다고 여기잖아. 마치 그게 결혼의 사전 단계라도 되는 양. 결혼이란 건 물론 그 관계의 정점으로들 생각하고. 나는 그렇게 살 생각이 전혀 없어."

"잠깐, 나를 만나면서 다른 놈을 만났다고? 누구?"

"서로 합의 했었잖아. 너도 Y를 만나 놓고서 나는 너만 만났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그녀는 실소를 숨길 생각이 없었다..

"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도대체 몇 명을 얼마나 만났던 건데?"

B가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으로 외쳤다. 기연은 자세를 고쳐 앉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사자라면 목을 물어뜯기 전에 이런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피해자라도 된 것 같은 그 표정은 뭐야? 결혼하고도 네가 원하는 자유를 나라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찾아온 거 아냐? 실제로 나랑 결혼하고 싶은 건지 내가 알게 뭐야. 고시 합격했으니 집 사오겠다, 차 사오겠다는 선자리들이 차고 넘칠 텐데 그 여자들이 다른 여자 만나는 건 금지래? 아니면 그 집안 노인네들 비위 건드렸다간 국물도 없을 것 같애? 그래서 결혼과 오입질을 콜라보로 엮을 수 있는 날 만나자고 한거야? 고시 합격했다고 하면 넙쭉 엎드려 네네 하며 결혼만 해 주세요 할 줄 알았어? 지금 네가 왜 여기에 앉아있는지 곰곰히 생각해봐. 그럼 알게 될거야. 너에게 나를 비난할 자격따위는 어디에도 없어. 너야말로 가장 이기적인 새끼라고.”

"그만해!"

기연은 얼굴을 가린채로 훌쩍거리는 B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렇게 생겨먹어서 판검사는 어떻게 할까 싶었다.





그 자리에서 남자가 기연을 보고 있었다고 했다. 여전히 기연은 그를 보았던 기억이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남자가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서명준이라... 기연은 명함에 씌여진 그의 이름을 되뇌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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