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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망나비 Oct 04. 2020

[소설]반항하는 인간 4

친구는 너무 사적인 단어

'(중략)... 타인을 알 수 있다는 신념에 대해서 회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타인이라는 것은 책과 같아서 읽는 사람에 따라 다 해석이 다르지요. 대상에 자신을 투영하기 마련이니까요. 자신을 투영한 대상은 사랑하거나 미워하거나 둘 중 하나밖에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타인을 객관적으로 안다고 말하는 것은 기만입니다. 눈을 가리운 상태로 보는 대상을 어떻게 감히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건 책을 읽는 것보다 못한 짓이에요. 아무리 싫은 책이라도 지옥에 떨어진 것 같은 상처를 서로에게 남기지는 않잖아요. 사랑했다 미워하고 만났다 헤어지는 일들이 왜 반복적으로 일어나는지에 대해서 당신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나요? 왜 사람들은 그 일로 자신을 베고 타인을 베는 걸까요? 그들이 얘기하는 사랑이라는 게 자기 위로와 자학의 반복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있는 걸까요? 조금만 고개를 돌려 보면 알게 될 텐데 말이에요. 상대를 사랑한다고 믿지만 사실은 자신의 욕망을 사랑하는 것뿐이라는 것이요. 인간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타인을 탐구하는 행위를 반복적으로 하는 것은 자신의 몸을 불에 던지는 나방과 같이 과하게 소모적으로 보입니다. 차라리 자기 자신에 대해서 더 알고자 노력하는 것이 남은 생동안 할 일이 아니겠어요? 저는 친구를 만들지 않습니다. 친구나 연인이라는 호칭 자체가 주는 불편함을 버틸 재간이 없네요.....(후략).'


여자의 이름은 남기연이라고 했다. 명준은 메일을 읽고 또 읽어 보았다. 그 여자가 보내온 메일은 목이 마르다고 했더니 우물 팔 삽을 치우는 것처럼 엉뚱하게 들렸다. 한 편, 여자의 말대로 타인을 안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쓸모없는 일인가 동의가 되기도 했다. 우연히 찾았던 레스토랑에서의 기연은 명준이 사람을 잘못 보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판이하게 달랐다. 손님을 서비스하는 기연은 시종일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거짓이라고 하기에는 피곤한 기색이 없이 생생한 미소였다. 방금 구워낸 크루아상이 미소를 띤다면 여자의 미소와 비슷할 거라고 명준은 생각했다. 동전 뒤집기보다 더 확고한 변화였다. 지금 명준은 도대체 기연이 무엇 때문에 이런 수고로운 메일을 보낸 것인지가 궁금했다. 거절을 위해 이만한 장문의 메일을 보낸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말이다. 명준이 할 수 있는 일은 답장을 하는 것뿐이었다.


'인간을 논리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요? 비논리와 모순을 빼고서는 인간에 대해서 얘기할 수 없습니다. 아픈 것을 알지만 그걸 즐기기도 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서의 본질은 누구에게나 몰두할 대상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한 아픔이나 슬픔보다는 사랑한다는 행위 자체가 중요합니다. 체홉의 <귀여운 여인>은 사랑하는 상대를 통해서만 삶의 의미를 찾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대상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몰두하는, 사랑하는 행위를 통해서만 살 수 있는 사람의 얘기는 꽤 설득력 있게 들립니다.

문제는 오히려 다른 데에 있습니다. 도대체가 그 몰두할 대상을 찾을 수 없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여러 모로 대단한 관심사를 가진 것처럼 자신을 포장하지만 사실은 영혼을 빼앗길 대상을 찾지 못해 우울합니다. 이렇게 살다 죽게 된다는 사실을 당신은 잘 알고 있거든요. 죽는다는 사실을 잊기 위해서라도 몰두는 필요합니다. 하지만 영혼을 갈아 넣은 일이 잘못될까 봐, 그래서 현대사회에서 삶의 기회를 박탈당할까 봐 두렵습니다. 그러니 조심이 습관이 되고 교활이 지침이 됩니다. 사랑도 미움도 손해보지 않을 정도에 선을 긋고 합니다.

저는 조금의 호기심이라도 생긴다면 손을 뻗어 잡아야 한다는 의견에 힘을 싣고 싶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책을 읽으며 자신을 반영하듯 타인에게 자신을 반영한다고 했죠? 그러느라 우리는 자신을 또 알아갑니다. 타인과 내가 얼마나 다른지 안 후에야 비로소 자신에  대해 깨달아지는 부분들이 있거든요. 그건 그 나름대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입니다. 친구란 그런 의미로 아주 제격인 단어이고요.'


바로 답장이 올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가 기연의 답장 메일을 받은 것은 나흘이 지나서였다. 여자의 두 번째 메일은 첫 번째 메일보다 더 알 수 없는 얘기들로 채워져 있었다.


'친구가 되고 싶다고 하셨죠? 친구라는 말은 너무 사적인 단어이니 쓰지 말기로 해요. 아무리 제 주변을 둘러보아도 친구라도 할 만한 사람은 없어요. 그런데 난데없이 당신이 나의 친구가 될 수는 없지 않겠어요? 다만 한 가지 제안을 할 수는 있습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다는 그 호기심을 거두어만 준다면 당신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호기심은 호기심인 상태로 있을 때 가장 가치가 있어요. 호기심이 충족되고 나면 남는 것이 무엇이죠? 끝을 궁금해하며 읽은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나요? 거기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요. 피로감이라도 남아 있다면 다행일 거예요. 차라리 아무것도 읽지 않은 상태가, 아직 첫 장을 넘기지 않은 상태가 내게는 흥미로워요. 누군가를 오랫동안 만날 동기를 주죠. 책이라면 아직 읽지 않았으니 재활용으로 넘어가지 않고 제 책장에 남겠죠. 서로에 대해서 이것저것 알아봐야 피곤한 일들만 늘어날 뿐이에요. 상대를 안다고 생각해서 하는 실수들은 또 어떻고요. 당신이 거만해 지기 쉬운 성격이라면 더욱더 호기심은 넣어 두어야 합니다. 단면만을 보고 마치 다 아는 것처럼 떠들어대는 사람들 천지예요. 구역질 나는 일이죠. 당신이 그런 종류의 사람이 아니길 바랍니다. 아래의 제안들을 어떻게 생각해요?


1. 개인사에 대한 질문은 서로 하지 않는다.

2. 과거와 미래에 대한 이야기도 물론.

3. 서로를 독점하지 않는다.

4. 한 사람이라도 싫증이 나면 만남을 멈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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