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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망나비 Sep 26. 2020

[소설] 반항하는 인간 1

기연의 이야기

기연은 대학 다닐 때부터 키가 작은 남자에게 끌렸다. 키가 작은 남자들은 콤플렉스 때문인지 그악스러웠다. 작은 키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남들보다 무언가 더 한다는 점이 재미있었다. 한 편으로는 키가 작다는 이유로 그들은 스스로를 비아냥거렸는데, 그것 또한 기연에게는 매력적으로 보였다. 콤플렉스라는 단어를 모른다는 듯 행동하는 100% 의 태양 같은 남자와 있을 때 그녀는 계급의 차이를 느꼈다. 그들은 구김살이 없이 말간 자신감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기연을 주눅 들게 했다. 어쩌다 그런 남자를 만나면 기연은 술은 피하고 물만 들이켜다 돌아오곤 했다. 계급차에서 오는 열등감이라고 스스로를 이해시켰다. 반면 키 작은 남자들은 대체로 모나고 진지한 듯했고 그건 기연과 같은 종의 사람이라는 의미였다. 그러므로 기연이 피터를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어딜 가든 키 작은 남자는 기연의 눈에 띄었다.


기연은 잘 웃지 않았다. 사소한 농담에도 까르르 웃어 대며 교태 어린 제스처를 만드는 여직원들을 보고 있을 때 그녀는 굳은 표정을 감추려고 고개를 숙이고 딴청을 했다. 적당히 장단을 맞춰 보고도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농지거리나 교태를 참을 수 없는 게 아니라 과장을 참을 수 없었다. 자신의 행 불행을 과장하려는 사람들의 노력을 보는 것이 그녀에게는 고역이었다. 기연은 누구의 인생이든 절대자가 정한 보편적인 룰안에서 운행된다고 믿었다. 다들 너무 외로운 나머지 호들갑을 떠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해가 되기도 했지만 역시 오지랖이든 호들갑이든 그녀가 잘 하는 것은 못되었다.


같은 의미에서 그녀는 잘 울지 않았다. 우는 것 또한 과장이라고 생각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가 예기치 않게 눈물이 나오려는 순간을 피하려고 노력했다. 그럴 때의 눈물은 하품이 전염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오열하는 대상을 보고 있으면 눈물샘이 반응하는 것은 생리적 현상이다. 그녀는 생리적 현상에 지지 않기 위해 이를 악 물었다. 무엇보다 신파라고 생각되는 것은 책이든 영화든 드라마든 아예 보려고 하지 않았다. 생판 남인 사람의 결혼식에 가서 눈물을 찍어대는 그녀의 엄마와 이모들에 대해서도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남의 결혼식장에서 눈물을 보이는 여자들이 생각보다 많고 심지어 자신도 그럴 수 있다는 걸 알고는 숫제 결혼 예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한 편 장례식장은 편안했다. 채우지 않고 비우는 공간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게다가 결혼과 달리 죽음 이야말로 모두에게 공평한 이벤트가 아닌가. 삶을 뒤에 두고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순서의 문제일 뿐이라는 것은 엄정한 현실로 이해가 되었다.

 

이런 그녀가 요식업계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농담같이 들리기도 한다. 다행히 그녀는 페르소나를 구분하여 사용하는 것에서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철저히 일 벌레가 되고, 현장에서는 완벽한 고객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뒤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이라고 수군거려도 회사는 돈을 만들어주는 직원에 대해서는 상당히 너그러웠다. 그녀에게는 직장에서 일 잘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기연이 일하는 곳은 미국에 본사가 있는 이탈리안 식당의 프랜차이즈 사업 본부였다. 기연이 지원하는 지점마다 매출이 올랐다. 시간이 흐르자 자연스럽게 승진을 했고, 허세로 성과를 대신하는 동기들을 앞질렀다. 그녀는 입사 8년 차이던 해에 대명 시에 지점을 오픈하고 지점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대도시를 떠나 전원 생활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조그마한 도시였다.


피터는 기연이 세미나 때문에 서울에 갔을 때 만났다. 피터가 발표를 하는 동안 그녀는 목에 명찰을 걸고 앉아서 들었다. 그의 작은 키와 유창한 영어 때문에 관심을 가지고 보았다. 발표가 끝나고 질문을 해 보니 한국말은 서툴었다. 피터는 영어로 말할 때는 날카로워 보였고 한국말을 할 때는 천치처럼 보였다. 어릴 때 캘리포니아로 이민을 가서 그렇다고 했다. 기연과 피터는 세미나 후의 식사자리에서 술잔을 기울이다가 전화번호를 주고받았다. 몇 달 후 기연의 초대로 피터가 대명 시에 출장을 왔다. 기연은 피터가 도착하자마자 그가 머물 숙소를 소개했고 그 날로 그의 침대에서 잠자리를 같이 했다. 그들은 만나서 섹스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업무가 끝나면 술잔을 나눈 후 침대에 몸을 던졌다. 한 시간쯤 그와 함께 뒹굴다가 그녀는 곧장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갔다. 피터는 그런 기연을 서툰 발음으로 ‘무써운 요자’라고 불렀다. 일주일 후 그가 서울로 돌아간 이후 기연과 피터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연락을 끊었다. 그 일은 일 년쯤 지나자 기연에게는 까마득한 옛일처럼 생각되었다.


지금까지 기연이 만난 남자들은 피터와 그랬던 것처럼 깨끗하게 헤어질 수만은 없었다. 만나고 헤어지는 와중에 갖게 되는 오해와 망상이 가장 골치였다. 이야기를 섞는 것은 몸을 섞는 것보다 위험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나름의 철칙을 만들었다. 자신이 철저하게 그것을 지켰고 남자에게도 명확하게 설명하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1. 자신의 개인사를 공개하지 말 것.

2. 상대의 개인사를 요구하지 말 것.

3. 옛날이야기를 하지 말 것.

4. 이를 세 번 어길 시 아웃.


때로 옛날 얘기하는 게 어때서?라고 묻는 이들이 있었다. 추억을 공유하는 것은 서로를 무장해제시켜서 좋지 않다고 그녀는 설명해 주었다. 누구든 그것이 왜 나쁜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으면 서서히 연락을 끊었다.  


그 이후로는 남자를 만나는 일로 일상을 방해받지 않았다. 그녀는 그것을 연애라고 부를 마음이 없었다. 섹스는 스포츠와 같은 것이었다. 조깅을 하면서 팔다리 근육의 움직임에 귀를 기울이듯 섹스도 마찬가지였다. 감정의 과잉을 지우고 몸의 요구에만 집중할 때 정신적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듯했다. 정신이 혼미해질 만큼 절정에 치달았다 바닥에 쿵 떨어지고 나면 온천욕을 한 것처럼 몸과 마음이 나른했다. 불필요한 에너지를 다 소모하고 난 텅 빈 느낌을 그녀는 좋아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좋은 점은 치기어린 실수를 줄이려는 노력들에서 효용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었다. 기연은 남자를 만나고 헤어지는 문제로 골치를 앓는 일이 적어졌다. 시작과 끝은 칼로 자른 생감자의 단면처럼 깨끗했다. 흔히 얘기하는 밀당의 과정은 생략되었고 헤어질 때에도 지지부진한 안녕은 배제되었다. 개운치 않은 일이 생길 거라는 의혹은 점점 옅어졌다. 혹시 그럴만한 일이 생겨도 그녀는 그 정도는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녀 나이 서른 다섯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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