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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망나비 Nov 19. 2020

<노인과 바다> 이전과 이후


헤밍웨이의 삶은 어느 소설이나 영화보다 훨씬 극적이다. 그가 일생동안 네 명의 부인을 두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세 번의 이혼과 네 번의 결혼 사이에는 헤밍웨이의 불륜과 양다리 행태가 있었다. 그 와중에 그는 연인들로부터 Papa로 불리기를 원했는데 이것은 그가 '최강'마초적 성격을 지향했음을 보여주는 극히 작은 예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헤밍웨이의 여성편력은 그의 십 대 시절의 트라우마에 기인하는 것이라는 설이 있다. 1917년 1차 세계대전에 18살의 나이로 참전하게 된 헤밍웨이는 이탈리아에서 양다리에 큰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거기에서 아그네스라는 간호사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녀와 결혼을 약속하고 미국으로 돌아온 몇 달 후 한 통의 편지를 받게 되는데 사랑하는 아그네스가 이탈리안 장교와 결혼한다는 소식이었다.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은 헤밍웨이에게 이 사건은 트라우마로 남았고 이후 일생동안 연인에게 버림받지 않기 위해 먼저 연인을 떠나는 행동을 반복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20세기 초는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 그리고 독립을 원하는 국가들의 내전으로 전 세계가 용광로와 같았다. 헤밍웨이가 살았던 시대는 정확히 이 시기와 일치한다. 그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음은 물론이고, 스페인 내전과 2차 세계대전에서는 종군기자로 활약해서 용감한 군인에게 수여하는 브론즈 스타라는 상을 받기까지 한다. 전 세계가 전쟁의 광기에 휩쓸려 있던 이때 그는 유럽, 특히 파리에 거주했고, 종종 아프리카나 쿠바를 여행하기를 즐겼다. 그리고 틈틈이 새로운 연애를 통해 이혼과 결혼을 반복했다. 어느 무당이 그의 사주를 봤다면 틀림없이 역마살이 끼었다고 했을 법하다. 그의 삶이 외줄을 타는 것처럼 아슬아슬했던 것은 단지 시대 탓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 남들은 한 번 당하기도 힘든 자동차 사고, 비행기 사고를 몇 차례씩 겪고 크고 작은 부상들을 항상 몸에 지니고 살게 된다. 그뿐이 아니었다. 전쟁에 매료당했듯 스포츠에도 매료당했던 그는 낚시, 투우, 권투, 사냥 등 남성성을 드러내는 스포츠에 특히 열광했고, Pilar라는 배도 한 척 가지고 있었다. 그가 애주가였다는 것 역시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어쩌면 20세기 전반을 아드레날린이 폭발하는 축제의 시기로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다사다난했던 젊은 날에 비하면 그의 말년은 가엾기 짝이 없다. 1961년, 헤밍웨이는 네 번째이자 마지막 부인이었던 메리와 살던 아이다호의 집 지하실에서 자살을 하고 만다. 메리는 그의 죽음을 사고사라고 발표했다가 5년 후에 자살이었음을 밝힌다. 헤밍웨이는 종종 FBI가 자신을 쫓는다는 망상에 시달렸고(그의 사후 실제로 FBI가 뒤를 캤던 정황이 드러난다), 온갖 부상 후유증을 잊기 위해(그는 젊은 날 팔, 다리, 갈비뼈 등이 각각 두 번 이상은 부러졌었고, 심각한 뇌진탕을 일으킨 적도 있었다) 의사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술을 마셨다. 다분히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그는 어쩌면 그의 마지막을 훤히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 일찍이 헤밍웨이의 아버지가 권총 자살로 세상을 떴을 때, 그는 '나도 같은 길을 가게 될 거야'라고 말했었던 것이다. 비극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의 친남매였던 어슬라와 레스터 역시 자살을 했고 헤밍웨이의 손녀였던 마고조차도 1996년 자살을 하는 바람에 헤밍웨이 가문은 4대에 걸쳐 다섯 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기록을 덧붙이게 된다.


1951년,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를 8주 만에 완성한 이후, 1952년에는  퓰리처 상을, 1954년에는 노벨상을 연달아 받게 된다. 그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10년 전에 완성했으니 말년의 역작이라고 할 만하다. 본인 스스로도 그 이상 더 좋은 작품은 쓸 수 없을 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노인과 바다>의 플롯은 모두가 알다시피 꽤 단순하다.

 쿠바의 해안 마을. 어부가 되기 위해 태어났다고 믿고 평생 고기잡이를 해 온 산티아고 노인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간다. 원래 일손을 돕던 한 소년은 그 날 따라 동행하지 못한다. 근래 들어 노인에게는 운이 따라주지 않아서 84일 동안이나 물고기라고는 구경을 할 수가 없었던 탓이다. 노인은 이번에 큰 고기를 잡아서 불운을 끝내고 싶다. 하루해가 저물 즈음 노인의 바람대로 청새치가 낚싯줄에 걸린다. 그런데 너무 크다. 건져 올릴 수가 없을 정도로 크다. 물고기가 물 밖으로 튀어 오를 때 얼핏 보니 노인의 배보다도 몸통이 길다. 노인은 희열을 느끼지만 물고기를 죽여 해안까지 가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안다. 다행히 물고기는 점잖다. 노인의 물고기는 발광하지 않은 채 배를 끌고 사흘을 간다. 조금만 당겨도 낚싯줄은 끊어질 테고 조금만 늦춰도 물고기가 달아날 수 있다. 노인은 낚싯줄을 붙든 채로 사흘 밤낮을 허기와 수면 등을 간신히 해결해가며 사투를 벌인다. 노인은 청새치 역시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노인과 청새치 사이에 아름다운 결투가 벌어지고 있는 거라고 그는 믿는다. 결국 마지막 노인의 일격으로 청새치는 배를 드러내고 죽는다. 청새치를 배에 묶어 돌아오는 길에 노인은 본인이 해안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음을 깨닫는다. 가야 할 길이 멀다. 이번에는 죽은 청새치의 피 냄새를 맡고 상어들이 몰려든다. 사투는 끝난 게 아니다. 노인은 죽을힘을 다해 상어를 몰아내지만, 청새치의 살점은 점점 떨어져 나간다. 노인은 이제 청새치 쪽을 바라보지 않는다. 자신의 죽음을 담보로 잡아 온 청새치를 제대로 해안으로 데려가지 못하는 상황이 자신에게도 청새치에게도 미안하다. 노인은 결국 앙상한 뼈와 머리만 남은 청새치를 끌고 항구에 도착한다. 배는 그대로 둔 채 그는 오두막으로 돌아와 죽은 듯 잠을 잔다. 다음 날 동네 어부들이 노인의 배에 몰려들어 뼈만 남은 청새치의 머리부터 꼬리까지의 길이를 잰다. 무려 5.5 미터(18 피트)다. 사람들은 이렇게 큰 물고기는 처음 보았다면서 떠들어대지만 팔 수 있는 건 한 점도 남아있지 않다. 노인은 계속 잠을 자고 이번 항해에 따라가지 못했던 소년이 눈물을 흘리며 그의 곁을 지킨다.


헤밍웨이가 이 소설을 발표할 당시 상황을 떠올려 보면 그가 어떤 마음으로 글을 써 내려갔을지 짐작이 가는 바가 있다. 그는 쉬흔이 넘은 나이가 되었고 로맨스는 저물어 갔으며 온 몸이 아팠다. 젊은 날의 휘황했던 빛이 스러져가고 있었다. 황혼의 삶이 거대하지만 결국은 뼈만 남게 될 청새치처럼 느껴졌던 것일까?


사실 헤밍웨이의 삶을 모르는 상태로 읽으면 이 책은 페로몬이 넘실대는 늙은 어부의 허풍 정도로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을 표현하는 데 이만한 비유는 없다. 노인은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고 죽을지 살 지 알 수 없는 싸움 중이다. 본인이 왜 그러고 있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자꾸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야 한다. 어부로 태어난 운명, 달리 생각할 방도가 없는 이 노인은 지지 말아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는다. 상대가 물고기이건, 불운이건, 죽음의 위협이건 지고 싶지 않다. 당연히 노인의 독백에는 헤밍웨이의 모습도 겹친다. 그의 독백은 잠언처럼 들린다.


"Every day is a new day. It is better to be lucky. But I would rather be exact. Then when luck comes you are ready."

(매일이 새로운 날이야. 운이 따라주면 좋겠지. 하지만 빈틈없이 준비하는 게 더 중요해.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운도 오는 거야.)


"I'll kill him though, " he said. "In all his greatness and his glory."

(거대하고 아름다운 물고기이지만 죽여야 해.)


"The fish is my friend too, " he said aloud. "I have never seen or heard of such a fish. But I must kill him. I am glad we do not have to try to kill the stars."

(이 놈에 대해서 한 번도 본 적 없고 들은 적 없지만 이제 내 친구가 되었는데 죽여야만 하다니. 우리가 별들을 죽이지 않아도 되는 건 참 다행한 일이 아닌가.)


He did not like to look at the fish anymore since he had been mutilated. When the fish had been hit it was as though he himself were hit.

(그는 더 이상 물고기를 바라보는 게 즐겁지 않았다. 훼손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물고기가 공격당할 때 노인 자신이 공격을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It was too good to last, he thought. I wish it had been a dream now and that I had never hooked the fish and was alone in bed on the newpapers.

(지속되기에는 너무 좋은 일이었어. 그는 생각했다. 이게 꿈이었으면 그래서 이 놈을 한 번도 낚은 적이 없이 그냥 침대에서 혼자 신문이나 보고 있었으면 좋았을걸.)


노인의 대사에 헤밍웨이 인생의 찬란한 시기와 쇠잔한 시기가 겹쳐 보인다. 이미 애잔한 마음이 드는데 헤밍웨이의 문장은 아름답기도 하다. 혹시 이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손톱만큼이라도 일었다면 원서로 읽기를 권한다. 그의 문장은 전혀 어렵지 않다. 고등학교 영어 과목 시간에 자지만 않았다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수준의 영어이다.


헤밍웨이의 문체는 하루키나 스티븐 킹의 에세이에서 여러 번 언급되고는 했다. 그 문체의 단순함 때문이다. 글을 조금이라도 써 본 사람이라면 명료하고 단순한 문장으로 긴 내러티브를 완성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다. 헤밍웨이는 일찍이 선언했었다.

"Use short sentences. Use short first paragraphs. Use vigorous English. Be positive, not negative."

헤밍웨이 이후 두 부류의 작가들이 생기는데 첫째는 그의 문체를 따르려는 부류, 둘째는 그의 문체를 피하려는 부류이다.


헤밍웨이는 자신의 노벨상을(금으로 된 메달) 쿠바인들에게 바쳤다. 당시의 바티스타 정부에게 메달을 빼앗길 것이 두려워 쿠바 조그마한 마을의 가톨릭 성당에 기증했다고 한다. 그의 쿠바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노인과 바다>는 세 번이나 영화로 만들어졌다. 내가 기억하는 건 앤서니 퀸이 노인으로 출연했던 1990년 작이다. 읽는 내내 앤서니 퀸의 지나치게 강인한 모습이 떠올라서 머릿속에서 그의 모습을 몰아내야 했다. 영화뿐만 아니라 작품 자체가 다양한 소재로 인용되어 왔다. 그럼에도 읽어보기를 권한다. 늙어빠진 노인과 물고기가 주인공인 데다 고전이라는 수식어에 노벨상 수상작이라니 지루할게 뻔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지루함을 느끼기 전에 책이 끝난다. 100 페이지 조금 넘는 양이다. 그 정도만 읽고도 헤밍웨이의 인생뿐 아니라 당신 자신의 인생까지도 만날 수 있는 책이라면 가성비 갑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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