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스토리텔러 레이첼
Mar 08. 2023
전화를 늦게 받던 엄마가 오늘은 사뭇 다르다. 마치 봄처녀 벚꽃 나무 아래서 셀카 찍는 것처럼 기분이 좋아 보인다. "그래 우리 딸 사랑해, 사랑해" 하는데 목소리에 봄바람이 묻어 살랑살랑한다.
공중에 뜬 것 같은 발랄할 목소리로 전화를 받으면 당연히 나도 목소리 톤이 높아진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묻기도 전에 수돗물 틀듯이 콸콸 쏟아져 나오는 스토리인즉슨, 엄마 셋째 딸, 내 바로 밑 쌍둥이 동생의 외동딸, 손녀 '희주'가 전화를 오랜만에 했단다. 그리고는 "사랑한다, 사랑해'라고 할머니가 먼저 자식들에게 말로 베풀고 살라" 했단다. 언뜻 들어서는 "뭐? 어른에게!" 할 소리인데 엄마는 웬걸 '희주'말이 하도 일리가 있어 따르기로 했단다. 친하니까 할 수 있는 소리라며 옛말에도 '80 노인도 3살짜리에게 배울 점이 있다'며...
엄마가 우울한 시절의 그림자에 지쳐 푸념을 늘어놓을 때마다 "어쩌나" 했었다. '감정의 앙금'이 엄마의 평정을 깨뜨리고 마구 휘저었다.
그런데 이제 20살이 갓 넘은 손녀딸은 엄마께 무슨 재주를 부린 것인지 궁금했다. 더구나 희주는 평소 한 성질 한다고 했던 손녀딸인데 2시간이나 대화를 했다. 희주는 할머니께 "건강하지 못한데 건강하라면 어쩌겠냐고, 아프지 말라고 한다고 안 아프겠냐고, 할머니는 헛고생, 자식들은 힘들다고, 그 대신 부담을 주지 않은 말, 사랑한다는 말은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이라고, 자신도 그렇게 하겠다고...
희주 엄마는 전세를 빼달라는 세입자의 돈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딸인 희주가 집을 팔면 어떻겠냐고 했다가 '도움도 못되면서 왜 참견하냐'라고 핀잔을 먹었다고 한다. 희주는 상처를 받고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과 통하는 할머니에게 전화했다. 소외되고 상처받았던 그 두 사람은 서로가 할 말이 많았다. 희주는 할머니에게 평소 안 하던 "할머니처럼 지혜로운, 제대로 나이가 든 어른은 없다"라고 말했다. 엄마는 그런 말을 아마 손녀에게 처음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 말로 엄마는 당신의 인생에 의미를 발견했나 보다.
오늘은 내가 본 엄마 중에 가장 기쁜 엄마다. 선하고 강했던 엄마라도 누군가의 반응이 없이는 자신을 신뢰할 수 없었던 것일까? 책임감 강한 엄마는 손녀딸에게 존중받았다. 존중받지 못하면 살아있어도 자신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친밀감 절벽이었던 나는 최근에야 엄마와 대화를 많이 나누고 있다. 새삼스럽게 '엄마가 이런 분이었구나'라며 느낄 때가 있다. 내가 가졌던 고통을 나누었더라면 엄마에게 많은 위로를 받았을 텐데 그저 힘들게 한다는 이유로 입을 닫고 살았다. 이야기를 안 하고 연락을 안 한다고 엄마께 불안함이 없었을까? 아니다. 차라리 이야기를 했더라면 엄마는 오히려 안심이 되었을 것이다. 내가 잃어버린 상실은 그런 시간들이다. 마땅히 나누었어야 할 시간을 놓치고 산 것, 바빠서 놓쳤고 기껏 서로 배려한다면서 놓쳤던 시간들이다.
엄마는 불안과 염려를 '잔소리'라는 틀에 넣어 빚었던 것을 나름 깨달은 것 같다. 엄마의 63년 어린 손녀딸이 엄마의 말을 정확하게 짚고 알려드린 것이다. 아주 새로운 톤으로 새로운 방향에서 들어온 충고에 엄마는 놀랍게 반응했다. 엄마는 그저 당신이 말하는 방식을 이유로 존중받지 못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함께 나눌 정도로 친밀한 사이일수록 서로를 존중하는 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이라도 엄마가 먼저 자신이 하고픈 말보다도 자식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겠다고 작정한 것은 큰 변화다. 서먹서먹하던 며느리와의 사이에도 변화가 올까 싶다. 회복의 시간을 미루면 안 될 것 같다. 엄마는 아주 나이가 많으시며 링거를 맞아야 기력을 찾기도 하시니까 말이다.
사회 활동에서 오랫동안 멀어지게 된 노인들은 자신의 삶에 어떤 의미를 주는가에 따라 다른 생을 보내게 된다. 자연스레 떨어지는 체력, 상황, 처지만을 생각하면 예전처럼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기 쉽다. 엄마도 역시 그때 그 시절의 사람들처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까운 사람들과 가까워지는지에 대해서는 몰랐다. 그러므로 친밀감을 나누는 법을 조금씩 배워가면서 남은 생을 보내실 것이다. 나도 그런 엄마가 남은 여생을 잘 사실 수 있도록 계획하는 것들이 있다. 하여간 엄마는 오늘 '인생 잘 사셨다'라고 생각하신 듯하다. 무엇보다 희주가 '자신을 넘어선 것이 보인다'라며 기뻐했다. 오늘은 엄마에게 새로운 봄이다.
이 세상에 스트레스 없는 사람이 없듯 과거의 상처 없이 사는 사람도 없다. 글감도 고통과 상처가 있을 때 더 파고들게 된다. 스토리 안에 또 스토리가 있고 그 스토리 안에 또 스토리, 그래서 쓸수록 새로운 시선을 가지게 된다. 알고 보면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사회적 관념들은 검증되었다기보다는 어쩌다 그렇게 된 가짜 진리들이었는데 그저 따랐던 것은 아닐까? 자꾸 멀리 있는 지식을 찾아다니는 것보다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면 자신 안에 답이 있다. 자기 사유를 통해 새롭게 발견되는 자신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새롭다. 그래서 삶의 전환점은 나이가 무르익은 50대에도 가능한 것이다.
로고세라피의 창시자 '빅터 프랭클 박사'는 '영혼을 치유하는 의사'라는 책에서 진단 (Diagnosis-인식 혹은 깨달음)이란 괴로움이 갖는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라고 했다. 증상의 원인을 초래한 이유를 진단하는 시간, 즉 사유할 수 있는 시간은 시선의 변화를 가져온다. 프루스트도 그 변화가 자신을 풍요롭게 해 준다고 했다. 또한 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우리는 일상을 제대로 보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시간을 잃어버리고 있다고 했다. 내가 사는 지금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나의 시간을 잃어버리고 있다"라고 했다.
또한 랄프 왈도 에머슨은 "세상을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의 또 다른 골칫거리는 바로 일관성이다. 그 일관성은 바로 과거의 자신이 행한 말이나 행동에 대한 숭상이다. 우리가 과거를 소중히 여기는 까닭은 타인의 눈에는 그것 외에 우리의 행적을 판단할 다른 데이터가 없고 또 우리는 그들을 실망시키기 싫기 때문이다. 평소에 자신이 일관되게 철석같이 믿고 있는 '자기만의 논리'를 버리고 달아나라"라고 했다. 랄프 왈도 에머슨이 던진 질문 "도토리가 완성된 열매이기에 떡갈나무보다 더 나은가?"라는 곰곰이 생각해 볼 만하다.
63살이나 어른 손녀딸에게 배웠다는 87세인 엄마는 "너도 이서방 일하러 나갈 때 사랑한다고 매일 말해라"라고 구체적으로 주문했다. 엄마가 우리 부부에게도 해빙의 시기가 오기를 얼마나 오랜 시간 기도했는지 나는 안다. 엄마의 기도에 꽃을 피우는 시기가 오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내 심장을 깨우던 말씀, "너도 이제 존경받을 때가 되지 않았니?" 그 말은 사랑하는 딸을 위한 말이면서 동시에 당신을 위한 말이었다.
얼마 전 눈이 왔었다. 눈을 밀어내고 언 땅에서 뾰족하게 머리를 내민 작고 하얀 꽃을 보았다. 그 꽃은 해마다 겨울을 보내며 "왜 왜 왜"라고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했을 것이다. 그리고 질문했기에 꽃을 피우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