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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토리텔러 레이첼 Mar 06. 2023

사랑하는 마음보다 더 좋은 건 없다

엄마의 노래

옥분 씨가 노래를 불렀다.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한 적이 없는 옥분 씨가 노래를 불렀다. 엄마의 노랫소리가 왜 그리 낯설까. 막냇동생이 언젠가 웃으면서 엄마가 춤추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고작 한번 갔던 엄마의 단체 관광여행 중 일행과 함께 통로에서 춤을 추더란다. 막내는 그런 엄마를 보고 놀랐다고 했다. 그만큼 우리에게 엄마는 당연히 그냥 엄마여야만 했다. 엄마가 좋아하던 것은 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을 지금이라도 할 수는 없는 것일까? 자식으로서 엄마가 아무것도 자신을 위해 한 일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울 밑에 귀뚜라미 우는 달밤에 길을 잃은 기러기 날아갑니다. 가도 가도 끝없는 넓은 하늘을 엄마엄마 찾으며 날아갑니다. 오동잎 우수수 지는 달밤에 아들 찾는 기러기 울며 갑니다. 엄마엄마 울고 간 잠든 하늘로 기럭기럭 부르며 찾아갑니다"


녹음된 엄마 목소리는 아주 멀리에서 울고 있는 아이. 엄마도 엄마가 보고 싶구나. 옥분 씨가 효녀였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 데도 없다. 그때 그 시절 각자가 가진 상처를 들여다보느라 곁에 있는 사람을 챙기기는 힘들었을 터다. 살가운 표현은 고사하고 서로 생채기를 남기지나 않았으면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척박했던 시절을 견디고 패잔병처럼 상처받으면서도 일어나 지금까지 살아낸 옥분 씨다. 엄마에게는 살아낸 인생 자체가 훈장이다. 7남매를 탈 없이 길렀다. 나도 엄마처럼 나이가 들어가니 느끼는 것인데 뭐가 중요한지 알 것 같다. 사는 게 별게 없더라. 내 주변에 단 한 사람이라도 내가 있는 그대로를 100퍼센트 인정해 주기만 한다면 그 한 사람 때문에 살 수 있다. 내겐 옥분 씨가 그런 분이다. 이 분이 나의 엄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한 가지도 해드린 게 없다. 사실은 엄마를 위한다는 명목 같아도 지금 이렇게 엄마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은 나 자신의 불효에 대한 속죄의 의미일 것이다.




엄마는 내가 예전보다 편안해하는 것을 통화할 때 느끼는 모양이다. 나를 가장 가슴 아파했는데 말이다.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잘 사는 척해 보여도 엄마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엄마와 가까운 한국에 살고 있을 때 우리 부부는 화성과 금성 출신의 남자와 여자였다. 하여간 그 이야기는 뒤로 물러두고 옥분 씨는 강원도 두메산골의 작은 동네 출신이었다. 세상없이 호인인 아버지와 그다지 살갑지는 않았던 외할머니의 셋째 딸이었다. 동네를 둘러싼 뒷산을 소유했지만 할아버지네는 10남매나 되는 자식들로 궁색했다. 17살 때인가 엄마는 그런 현실을 해결사처럼 둘러업고는 홀로 서울로 나섰다. 어린 소녀는 시골 가족들에게 월급봉투를 주기 위해 주말이면 열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산고개를 넘으면서도 꿋꿋하게 그 역할을 했다. 오라고 하지 않아도 누가 부른 것처럼 그 험한 장자울 고개를 넘어갔단다. 운동화가 없던 시절, 엄마의 발은 딱딱하게 굳은 신발 때문에 빨갛다 못해 퉁퉁 부어오르기도 했다. 그럼에도 다음날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집을 새벽에 나설 때 보면 아무도 배웅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럼에도 섭섭한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은 못 했다. 그저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나쁘다고 생각했다. 월급은 그 당시에 시골 살림살이에 큰 도움이 될 정도였다. 잘 모아두었더라면 집도 샀을 것이라고 했다. 가족들이 잘 먹고 잘 살면 충분했다. 꿋꿋하고 무던한 성격 탓에 공투세 한번 한 적이 없을 것이다. 대가를 바란 적도 없겠지만 그렇다고 모른 척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수고했다고 고생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옳은 것 아닐까?


엄마는 위로받지 못했다. 엄마의 부모들로부터도 그리고 엄마의 단 하나뿐인 남편에게서도 그렇다. 그런 엄마의 삶을 유전이라도 하듯이 엄마의 딸들도 지고지순한 사랑을 받지 못한다면서 엄마는 원통해했다. 다른 집 못난 딸들도 다 잘 사는데 너희들은 왜 그러냐면서 당신의 7남매를 안타까워했다. 엄마 눈에 보기엔 우리가 남의 자식인 사위들보다 며느리와 알콩달콩 하지 못한 것이 다 그들 탓인 것이다. 하여간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보여주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얼마나 어렵던지 얼마나 힘들던지 해 보지 않고서는 모른다는 것을 옥분 씨가 더 잘 알 것이다.




아빠를 먼저 세상에서 보내고 50대인 엄마는 차라리 홀가분하다고 했다. 혼자라서 자유롭다고 했다. 그럴 만도 했다. 어떻게 한숨에 엄마가 겪었던 시절을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자유롭다는 것이 외롭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지금도 엄마는 밤새 티브를 켜놓고 잠을 주무신다. 사람 목소리가 그리웠던 옥분 씨께 사랑한다는 말을 앞으로 얼마나 더 자주 할 수 있을까? 전화 그게 뭐가 그리 힘들다고 그런다. 내 엄마께 전화하는 게 내키지 않았던 적이 많다. 바빠서도 그렇지만 한번 시작하면 아빠에 대한 원망이 한도 끝도 없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육두문자까지 나오는데 내겐 그래도 아빠인지라 쉽지 않다. 이미 돌아가신 지 오래된 아빠는 유일하게 이럴 때 다시 나의 기억 속으로 돌아오곤 했다. 가까이 살면서 수시로 엄마의 푸념을 들었던 동생들은 "바쁘다"라며 엄마가 전화를 하면 엄마의 타령을 원천봉쇄한다고 한다. 동생들은 오죽하면 그럴까 싶으면서도 엄마는 또 오죽하면 그러시겠나 싶다.


엄마를 자주 챙기는 여섯째 동생의 차 안에서 엄마가 드디어 들려주신 노래 덕분에 엄마를 더 알아차렸다. 엄마 앞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었을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집안에 돌던 긴장감 때문이었을까 우리는 서로를 알아갈 여유가 없었다. 엄마와 내 형제자매들과 신나고 재미있는 놀이를 한 기억이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는 없었다. 엄마가 상처를 딛고 앙금을 털어낼 시간을 드린 적이 없다는 사실이 외국으로 나와 사는 내게는 뭔가를 하라고 사인을 보낸다. 엄마도 여자였는데 여자인 내가 이다지도 모를 수 있었던가에 대해 후회가 된다.


옥분 씨가 마음의 앙금을 털어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또 있을까? 앨범 들여다보듯 이야기를 나누며 엄마의 어린 시절, 처녀시절, 결혼 후 우리를 떠나지 않고 지켜주었던 용감했던 모습까지 보시도록 할 것이다. 당신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웠고 예쁘고 사랑받아야 마땅한 존재였는지 말이다. 엄마가 그렇게 사셨던 것은 엄마가 책임을 다하려 한 것일 뿐 엄마 탓은 아니라는 것을, 그 시절을 견뎌온 당신 덕에 지금의 우리가 있다는 것을 알려드려야 한다. 엄마 마음 안에 가득 찬 아빠를 향한 원망은 어쩌면 그때 당신 자신을 스스로 사랑하지 못했던 자신을 향한 것일지도 모른다. 부모에게서도 남편에게서도 살갑고 다정한 말 한마디 받지 못한 엄마는 이제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이 아니라 엄마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 당신이 그리워하는 것은 바로 그때 그 당시의 자신이다. 한 겨울 언 발로 부모에게 월급봉투를 가져다주기 위해 산고개를 넘던 어린 소녀. 자신이 낳은 7남매를 끝까지 지킨 용감한 여성인 옥분 씨, 그런 옥분 씨는 이제 자기 자신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절대 미루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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