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이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네 글은 마치 베일에 싸인 것 같아. 난 그런 네 글이 좋더라" 듣기 좋으라고 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때는 그 말이 좋았다. 지면만 채우지 정작 하고픈 말을 못 하는 무능력을 포장해 주는 말처럼 들리지 않았다. 나는 쓰고 싶은 말보다는 써야 좋을 것 같은 말을 쓰는 편이다. 내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앞에 있는 상대방을 위해서였다. 그런 나였기에 갑자기 바뀔 리는 만무하다.
상처에서 진물이 날 때에는 그 진물을 짜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흉터가 생기고 가렵다. 제대로 응급처치하지 못한 상처에 반창고를 더덕더덕 붙여서 안 아픈 것처럼 위장하다 보니 스스로에게도 속게 되었다. 그래서 다 나은 줄, 잊은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상실감은 흉터로 고스란히 몸과 마음에 자국을 남겼다. 다행인 것은 흉터를 나의 한 부분으로 여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들여다보며 호호 불어줄 용기도 생겼다.
내게 글은 용기다. 말은 빠르게 화살처럼 지나가지만 흔적을 남긴다. 글은 그에 더해 다른 사람과 함께 공유하며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지면을 제공한다. 글쓴이의 정서적, 인지적 수준을 고스란히 드러내기에 글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수십 번씩 지우면서 글을 쓰는데 지운 글들이 사실은 정직하다. 행복하고 편안한 순간에 대해 서도, 막상 좋은 글감이 되는 주변 사람들에 대해 쓰는 것도 무리다. 아니 써도 내놓는 것이 어렵다. 나는 내가 당당하지 못한 것이 불편하다. 이것에 대해 지인이 좋은 해결책을 내놓았다. "그냥 쓰는 거야. 그리고 내놓지 않으면 되지. 용기가 생겼을 때 내놓으면 되지"
상처를 드러내는 글쓰기는 공감받고 사랑받고 싶은 인정욕구일 것이다. 온통 내가 어떻게 보일지에 대해 신경 쓰면서 자판을 두드리다 보면 나는 나로서가 아니라 타인의 눈에 보이는 존재가 다일까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한 장 한 장 더 쓸 때마다 묘하게 용기가 생긴다. 타인의 눈이 아니라 나 자신의 눈동자를 바라보게 된다. 그러므로 글쓰기는 자신을 지고지순하게 사랑하는 러브 스토리다.
글쓰기는 생각과 마음과 몸을 연결하는 친밀한 행위이기에 나를 나 되게 한다. 새롭게 발견되는 기억, 경험은 글로 찾아내는 산물이다. 멀리 가지 않아도 나 자신과 친하면 외롭거나 심심하지 않다. 자기 자신을 대면하지 못하면 물에 뜬 기름방울처럼 일상도 부유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글쓰기가 주는 희망은 이것이다. '내가 모르던 나의 가능성, 새로움'을 발견하는 것이다.그러므로 글은 호기심과 동격이다.
"인간은 성공한 사람을 보면 부러워하지만 상처 입은 사람을 보면 사랑한다"라고 한다. 나는 성공한 사람보다 사랑받는 사람이 되고 싶다.여전히 인정욕구가 뜨겁다.
며칠 전 안고 있던 고양이를 어르다가 노래가 튀어나왔다. "둥 당당 둥당, 둥 당당 둥당" 그것은 어릴 때 아빠가 불러주던 노랫가락이었다. 갑자기 뜬금없이 무심코 튀어나온 노랫가락에 놀랐다. 이미 30년 전에 돌아가신 아빠를 반추하려 한다. 오랜 세월 아빠를 어떻게 애도해야 할지 몰랐다. 아빠에 대해 글을 쓰면서 고삐가 풀린 그리움을 이제는 묶지 않고 풀어보려고 한다.
임종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 가슴 찢어지는 애통함을 어떻게 그렇게 떨쳐 버릴 수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상실을 버텨낸 방법은 절대로 돌아보지 않는 것이었는데 그러면서 내게 있었던 '까르르'한 명랑함을 포함해 많은 것을 잃었다. 기억하기 싫은 일들뿐만이 아니라 간간이 끼어있는 좋은 추억까지도 놓아 버렸다. 그 결과 나는 마치 아빠가 없었던 사람인 것처럼 살았다, 한동안.
"애도는 누군가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것이지만 우울증은 그 사람과 함께 죽는 것' 이라고 정신분석가 '대리언 리더'는 말했다. 낮에는 눈부신 햇살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지만 동틀 때면 가로등 밑의 온기라도 쬐려 하는 집 잃은 홈리스처럼 처연했다. 애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면 우울증이 된다. 아무래도 나도 모르게 가면 우울증을 앓았던 모양이다.
찰스 브론슨 같았던 아빠는 술에 취했을 때 울었다. 그럴 때면 금쪽같은 7명의 자식과 헌신적인 아내가 있는데 왜 우는지 몰라 안전 부절했다. 세상의 기쁨을 구해다가 아빠에게 바치고 싶었다. 아빠는 실패와 좌절을 잔에 부어 철철 흘려가며 마셨다. 주눅이 잔뜩 든 나의 자아는 일상이 비틀거리던 그 시절의 산물이다.
이제 참 좋은 순간을 하나씩 기억해본다. 얼마 전부터 양로원에서 오락시간을 이끄는 봉사를 하게 되었다. 70-90대 노인들이 좋아할 만한 팝송을 준비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에델 바이스'라는 노래가 떠올랐다. 제비 새끼처럼 입을 벌리며 "에델바이스"를 부를 때 우리를 바라보던 아빠의 얼굴은 한밤에 피는 달맞이꽃처럼 밝은 노란색이었다.
'슬픔이 내게 말을 거네'라는 책에서는 상실감 경험의 예를 다음과 같이 나열하고 있다. '애완동물의 죽음, 이사, 입학, 가족의 죽음, 결혼, 졸업, 건강상의 큰 변화, 퇴직, 장성한 아이들을 출가시키는 것' 등이다. 신뢰나 안정감의 상실로 인해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이 상실감이라고 한다. 믿음을 잃어버림으로써 슬픔에 대처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블로그와 브런치에 글쓰기 하기 시작한 게 몇 년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글쓰기로 나에 대한 믿음을 회복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슬픔의 여러 겹을 벗기면 기쁨이라는 말이 있다. 슬픔을 여러 겹을 벗겨내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슬픔의 여러 겹을 벗길 수 있는 길이 글쓰기 말고 또 있을까? 그래서 글쓰기를 용기 있는 당신을 위한 특별하고 유일한 사랑법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