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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토리텔러 레이첼 Sep 05. 2024

나는 나를 만나러 간다

얼굴

사방이 조용하다. 그런데 그건 내 느낌일 뿐이고 귀 기울이면 들리는 소리가 있다. 고양이는 그림자처럼 발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 소리처럼 가벼운 소리만 듣고 살면 좋겠지만 어디 일상이 그런가. 얼마 전 소음처럼 들렸던 소리로 인해 당연하던 게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되었다.


내가 사는 밴쿠버는 태양이 강렬하다. 긴 우기의 겨울철이 지나고 태양이 따가운 빛을 쏘아대는 찬란한 봄 여름을 누리려면 밖으로 나돌게 된다. 차 창문에 어두운 색깔로 코팅한 사람도 없다. 운전 시간이 많다 보니 차 안으로 쏟아지는 자외선에 살갗이 검게 그을리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런 게 당연했다. 그러다가 한국에 가면 '농사짓다 왔냐?'는 우스갯소리를 듣는다고 한다.


지난 7월 중순부터 8월 중순까지 한국을 방문했다. 거의 30년간 못 만났던 친척과 친구를 만난 내 삶의 골든 타임이었다. 석양처럼 찬란한 시간이었다. 막연하던 그리움의 퍼즐이 친구의 것과 하나씩 맞아떨어질 때  수십 년의 시간이 무색하게 우리는 함께였다. 그들의 삶, 어느 한 페이지에 있던 수줍고 순수했던 나를 만나고 돌아왔다.  놀랍게도 나는 나에게만 있지 않았다. '아아, 나를 정말로 사랑하고 있던 사람은 바로 나'였다.


나를 뒤돌아보게 한 잔소리었다. 그건 세월 따라 변한 나의 외모에 대한 말이었다. '그 시절의 네 모습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는 말은 당연한 듯 당연하지 않게 내 귀에 콕 박혔다. 물론 '세월 비껴가는 사람 아무도 없다.'라고 위로도 받았지만 속상함이 핏빛처럼 마음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번져갔다. 그건 '내가 나를 돌보지 않았다는 자책'이 컸던 탓이다. 마음은 아직도 생미나리처럼 파릿파릿한데 도대체 나의 모습이 어떻길래. 몸과 마음의 균형이 잘 맞지 않은 채로 나는 나를 방치하고 있는 것일까?


미뤘을 뿐이지 나도 더 나답고 싶었었다. 그러니 남이 지나가듯  말이 거들어주며 각성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관심이 생겨서 그런지 '건강 관리, 외모 관리'라는 말이 내 귀에 자주 들린다. '지혜는 마음으로 들어오고 지식은 영혼을 기쁘게 해 준다'는 성경의 잠언 2장 말씀처럼 지혜를 품은 지식을 갖고 싶었다. 지혜도 지식도 건강해야 가능하다.




내 아이들은 내게 "엄마는 예뻐"라는 말을 자주 했는데 나는 그 말을 정말 좋아했다. 남편은 늘 곁에 있지만 표현을 안 해 노력요를 못 느꼈다. 건강하려면 움직여야 한다. 편안함방패 삼아 몸을 방치한 것도 미안하다


무심코 한국 방문 중에 들은 '그때의 네 모습이 많이 변했다'는 말은 아직도 내가 아름다운 여자로 살고 싶다는 것을 일깨운 계기였다. '얼굴'은 '영혼이 드러나는 구멍' 또는 '마음이 표현되는 부분'이라고 한다. 내 몸의 전면부에서 가장 먼저 나를 표현하고 타인을 바라보는 나의 대표 페이지가 나의 얼굴이니까.


나는 나를 관찰하고 아끼는 방법으로 휴대폰 카메라를 선택해 보았다. 자주 보니 더 친해지는 나와 나, 내가 나와 친해지면서 어떤 대상을 향해 왜 나를 바라보지 않느냐며 푸념하던 시간이 점점 아득해진다. '그까짓것 뭐, 내가 나에게 있는데'하면서도 타인을 바라볼 수밖에 없던 나, 내가 나를 사랑하니 결핍도 채워지나 보다. 종종 숨김없이, 낱낱이 보여주는 카메라의 당돌한 시각에 쩔쩔맨다. 그런 날에는 '분과 초'의 시간 기록이 처참하게 남긴 잔주름, 굵은 주름, 기미가 덮인 얼굴에 계란 팩뿐만 아니라 알로에, 레몬 팩을 번갈아가며 선물한다. 건강하고 아름답게 늙어가고 싶다. 외모는 건강의 척도다.


여름 태양의 찬란한 매질과 겨울비의 축축한 입김에 지친 얼굴이지만 여전히 나를 가장 좋아하는 것은 바로 나다. 나태주 시인의 말처럼 오래, 자세히 나를 본다. 아이들이 어릴 적에 들려주던 동화책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나는 너를 본다. 너는 또 나를 본다.' 내가 모르는 나로 남은 채 살고 싶지 않다. 타인에게만 향하던 시선을 조금씩 회수해서 나에게 투자한다. 사랑은 '리비도의 투자'라고 누군가가 말하지 않았던가.




챗 GPT에 물었다. 만약 하루에 거울을 7번 본다고 가정하면 지금까지 몇 번이나 거울을 보았을까? 그랬더니 약 150,000번 거울을 본 셈이라는 대답을 했다. 대부분 외출하려고 화장에 공을 들인 시간이 아닐까? 거울을 그저 맹목적으로 바라보는 그림자처럼 여긴 것은 아닐까? 여자들은 하루에 적어도 아홉 번 이상 화장에 대해 생각한다고 영국의 한 잡지사에서 조사했다고 한다. 같은 얼굴인데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 자주 거울로 들여다보니 묘한 동지 의식이 느껴져서인지 내가 점점 더 좋아진다. 가까운 친구를 하나 만난 것처럼. 요즘은 얼굴을 매만지는 시간 자체가 좋다. 이제 나는 눈썹, 콧잔등, 입술까지 그릴 수 있으려나. 오늘이라는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한 여자로 가을이 다가오니 스카프와 바바리 의상도 꺼내 놓을 생각이다. 내가 여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무엇을 망설이나, 아름답고 고운 모습에 제일 기운이 나는 것은 나라는 것을 알면서.


또 한편으로 부질없는 열정을 낮추는데 나이만 한 게 없다. 노인이라는 피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몸의 세월을 무시한 마음의 열정이 화산의 분화구처럼 피어오를 때 거울이 비춰주는 자신을 바라보면 체념하게 된다. 그렇게 한소끔 뜸을 들이면 마음 쪽에서 조금씩 피어오르는 연기의 냄새를 맡으면 마음속 어느 한쪽이 무너진다. 부질없는 열정이 소멸하는 냄새다. 젊은것만이 능사는 아니기에 때에 맞는 바람직한 체념이야말로 지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눈동자처럼 나의 시간과 공간 전체를 담고 있는 곳은 없다. 따뜻하고 인자한 눈동자가 품어온 세월의 노력 없이 저절로 생기지는 않을 테다. 가끔 검지와 검지로 얼굴 사진을 확장하다가 낯선 여자를 보기도 한다. 내가 살아온 살갑지 않은 모습을 그대로 담은. 하지만 그 솔직함 때문에 셀카를 찍는다. 내가 보지 못하는 부분을 보여주는 나의 거울, 셀폰 카메라, 나를 위해 자주 웃어주어야겠다. 나만 아는 나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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