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가 품에 파고들어 아직도 보송보송한 이마를 내 턱에 비벼댄다. 다 큰 것 같은데 이렇게 가끔씩이라도 엄마 품에 안겼다 가야 한동안은 거뜬한가 보다. 늦둥이 막내가 이럴 때마다 나는 내 건강을 위해 억지로라도 운동화를 신고 나선다. 빠른 걸음으로 부지런히 숲에 들러 쏘다니다 보면 나 역시도 사랑하는 엄마를 만나고 온 듯 생기가 돌고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다.
갱년기 증상인지 여기저기 아픈데 건강 진단 결과는 매번 똑같다. 아주 탈이 나기 전까지는 아마도 이런 상황이 계속될 것이다. 심증은 있는데 물증은 없는 것 같은 뭔가 미심쩍은 시기를 보내고 있는 중이다. 의사들이 뭐라 선고를 하기 전에는 아프지 않다는 말인가? 무엇을 기다리는가? 몸에 있는 어떤 것들의 정체에 대해서 더 이상 걱정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므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 시간이 있을 때마다 숲으로 가서 나무들이 내뿜은 신선한 공기를 몸안으로 불러들인다. 점점 내 주위에도 치명적으로 아픈 분들이 늘어나고 있다. 또 지금 건강하다 해도 누구도 그야말로 장담할 수 없는 것이 건강인 것 같다.
자기 자신과 제일 친한 것 같아도 결코 속을 보여주지 않은 것이 알다가도 모를 우리들의 몸이다. 이렇게 보면 인류의 능력이 하늘을 지르듯 대단해 보여도 참 어리숙하다. 자기 몸 하나 지키기가 이렇게 어려우니 말이다. 얼마 전 위역류증 증상 때문에 스페셜리스트에게 리퍼가 되었었는데 전화로 한 10여분 통화를 하고는 별로 심하지 않다면서 음식을 조심하라고 하고는 끝이다. 요즘은 심장소리도 들어보지 않고 "아" 하고 입도 벌려보지 않고 진단이 내려진다. 그러므로 수수께끼 같은 30조나 되는 내 몸의 세포를 의학 지식이 없는 내가 스스로 지켜낼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걷는 것이다.
그러나 겨울은 걷기에 안 좋은 계절이다. 밴쿠버는 벌써 서너 달째 우기였으므로 운동하는 날은 일주일에 며칠밖에 안되었다. 또 비록 우산 없이 다녀도 될 정도로 센 비는 아닐지라도 비 맞는 것은 싫어서 특별한 일이 없으면 나가지 않는다. 그야말로 집콕으로 쓰레기 버릴 때에만 잠시 밖의 공기를 쐔다. 그리고 생필품을 사러 나가더라도 코로나로 최소한으로 움직 인후 다시 차로 돌아온다. 그러다 보니 일부러 걷기를 하지 않으면 아마 하루에 걷는 걸음은 천보도 안될 것 같다.
드디어 며칠 내리던 비가 조금 주춤해졌다. 그러나 함께 산책하던 분이 오늘은 어렵다고 한다. 아무래도 안개가 자욱한 숲으로 혼자 가긴 힘들다. 그래서 막내가 학교에서 수업을 하는 동안 (9시부터 11시 15분까지) 그냥 학교 옆 운동장에서 혼자 걷기로 했다. 오전에는 학교에서 겨우 두 시간 수업 후 다시 집으로 이동해서 12시 15분부터는 줌으로 하는 오후 수업을 한다. 그렇게 스케줄이 꼼짝달싹도 못하게 한다.
이곳은 내가 전에 살던 동네인지라 언제 와도 친숙하다. 몇 년 전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지만 아이가 학교를 옮기고 싶지 않아 해서 내가 가장 오래 살았던 이 동네를 주 5일 동안 매일 오게 된다. 이곳은 동양인 이민자들이 유난히 많이 사는데 오늘도 역시 중국인이 대다수이고 인도인 그리고 한국인인 나 이렇게 약 15명 정도가 운동을 하고 있다. 모두 급할 것이 없다는 듯 걸음걸이도 느리고 휘청휘청해 보인다. 남의 동네에까지 와서 이왕 하는 것 제대로 해야 할 것 같아서 빠르게 걷고 싶다. 내 앞의 사람들은 4명가량인데 일렬로 걷고 있어 이들을 한 사람씩 패스하려면 애를 좀 써야 한다. 운동장에도 룰이 있어 모두 한쪽 방향으로만 돈다. 한번 도는데 약 8분가량이니 한 시간이면 약 8바퀴 정도 돌 것 같다. 운동장을 빙빙 혼자서 도는 것은 별로 내키는 일은 아닌 듯 다른 사람들의 표정도 마치 행군하는 것처럼 별로이다. 그래서인지 곁을 지나는데 신발 끌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래도 걷기가 끝나니 풍경이 좋은 곳에 가서 좀 있다가 올 수 있는 여유 시간이 있었다. 이곳은 록키에서부터 내려오는 Fraser River 가 동네의 옆을 통과하는 풍경이 수려한 곳이다. 맞은편에는 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그래서 그런지 비가 그치고 나면 산 위의 하늘은 하얀 뭉게구름으로 가득하다. 하얀 뭉게구름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폭발적으로 피어오르는 풍경은 이곳이 제일일 것이다.
물안개가 땅에서부터 날아오르는 날은 옷을 몇 겹을 입었어도 으슬으슬하다. 한국의 겨울처럼 매서운 추위는 아닐지라도 이곳의 겨울 날씨는 내복을 입어도 어깨와 목 뒤까지 서늘하고 축축한 한기가 느껴진다. 그래서 밖에 나갈 때에는 목 폴라를 입고 털모자를 눌러쓰고 또 한 겹 더 가벼운 잠바라도 입어야 감기에 안 걸린다. 그래도 가끔 나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떤다.
이렇게 우기가 일 년 중 6개월가량 지속되다 보면 나도 모르게 계절성 우울증을 앓게 된다. 코로나 블루까지 겹쳐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지난겨울엔 우울에 절어 살았던 것 같다. 비타민 D도 먹고 바나나를 틈틈이 먹어도 별로 나아지지가 않는데 신기하게도 햇살이 쨍하고 나는 날에는 기분이 업된다. 그러고 보니 새해에 들어 결심한 것들, 책을 많이 읽고 글을 많이 쓰겠다는 것을 지키지를 못했다. 요즘은 책도 손에 안 잡히고 글을 쓰는 지금도 몇 번을 망설이다가 손에 콧기름을 바르고 나서야 좌판을 두드릴 용기가 생겼다.
그렇지 않아도 침울한 기분에 감기는 단골손님처럼 찾아든다. 만나는 사람이라고는 가족밖에 없고 어딜 가든 철저하게 손을 세정제로 닦는데 어디서 어떻게 감기에 노출되는지 늘 골골댄다. 그러니 코로나에 걸리면 나는 바로 코로나의 숙주가 될 텐데 하는 생각이 들면 정신이 버쩍 난다. 최근 코로나 환자가 하루 400명대로 줄었다고 하지만 BC주 270만의 인구로 치면 하루 확진자 수가 아직도 상당히 많은 편이다. 그래도 내 눈앞에 닥치지 않았으니 뉴스를 보지 않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하루는 평범하게 잘 흘러간다. 그러나 이 소중한 하루하루를 어떻게 가족과 잘 보내고 할지 그 어느 때보다도 현명하게 생각해야 한다. 지금 여기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말이다.
중년 이후 가장 중요한 삶의 우선순위는 뭐니 뭐니 해도 건강이다. 운동화로 이렇게 시간을 다져 나가다 보면 우리 막내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그때까지 내 몸을 잘 지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막중한 책임감, 이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먹고 싶은 것은 억제하고 스트레스가 당연한 일상에서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데 몸과 마음이 따로 논다. 마음은 괜찮은 것 같은데 몸이 더 빨리 반응을 하는 것이다. 아니 마음이 몸을 달래지 못하는 그런 나이가 된 것 같다. 그래서 내 몸의 유효기간을 늘리는 것이 점점 더 쉽지 않다고 느껴진다. 깊은 물속은 알아도 한치 몸속을 알기는 힘들다.
맑은 날 찍은 사진이다.
이제야 나무와 숲을 같이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이 좀 생기는 것 같아 마음이 예전보다 훨씬 더 편안하다. 그러나 생생하고 에너지 넘치는 마음을 담아둘 수 있기엔 그릇이 작은 몸이 문제이다. 앞으로 운동으로 잘 다져놓지 않으면 몸이 이런저런 질병들을 얼마나 견뎌낼 수 있을지 모른다. 내 몸, 즉 내 영혼을 담을 그릇이 사라진다면 그때 내 영혼은 어디로 가게 될까? 몸에는 유효기간이라는 것이 분명하게 있다. 그러나 영혼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몸이 약해지면 정신도 약해지기야 하겠지만 몸의 소멸을 지켜본 후에도 내 영혼은 영원할 것이다. 그러니 몸이 죽어 없어질 때 살아 있는 나의 영혼은 어디로 가게 될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몸처럼 소중한 내 영혼이다. 오랫동안 내 영혼이 편안하게 머무를 수 있도록 내가 내 몸의 주인으로서 최선을 다해야 하겠지만 그러나 아무리 건강하다고 장담을 해도 나의 수명은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한걸음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기도하는 심정이 된다.
까만 까마귀 여러 마리가 초록 잔디 위에 누군가가 버려두고 간 빵조각을 차지하려 요란하게 짖어 대면서 싸운다. '이런 것이 바로 생존 욕구로구나' 싶다. 별로 좋지 않은 컨디션으로 운동을 시작할 때 축축하고 서늘했던 등줄기가 운동장을 몇 바퀴 돌다 보니 데워진 것 같다. 땀이 난다. 이럴 때 더 조심해야 한다. 덥다고 겉옷을 폴작 벗어놓으면 바로 감기가 든다. 그럴 때에는 벗어서 어깨에 둘러 주든가 해야 한다.
저만치 하얀 머플러를 두르고 선글라스를 낀 머리가 하얀 할머니가 건강한 모습으로 누군가와 통화를 한다. 꽤나 연세도 있어 보이는데 멋지고 건강한 것 같다. 요즘엔 다른 무엇보다도 그저 건강하게 살고 싶은 것이 소망인데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욕심이라는 것도 나이가 들어서야 깨닫게 되는 것 같다.
몸이 따뜻해지고 나니 그제야 땅에서 올라오는 초록 잔디 향기가 느껴지는 것 같다. 그런데 아직도 18분이나 남아있다. 그동안에 몇 바퀴만 더 돌자. 두 바퀴라도..... 조금만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