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시어머님과 몸뻬바지
갚을 수 없는 사랑과 은혜
세상에서 가장 편한 옷이 몸빼바지다. 입고 벗을 때도 몸을 구겨 넣을 필요가 없고 어디에든 털썩 편하게 앉을 수 있다. 과식을 하건 배가 고프건 상관없다. 허리 고무줄이 늘어났다 줄었다 하는 맞춤 패션으로 이보다 더 편한 옷은 없다. 야단스러운 무늬 때문에 속은 안 들여다 보이지만 얇아서 바람도 잘 통한다.
시장에 가면 만원에 몇 장이라도 몸빼 바지를 살 수 있던 20년 전, 요란한 문양에 보기만 하곤 했다. 하지만 시골에 가면 어김없이 시어머님이 내놓으시면 몇 장의 몸빼바지 중에서 그래도 가장 예쁜 무늬를 골라 입어야 했다. 그 형형 색색의 아롱 다롱한 패션은 평생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표현할 수 없었던 심정이 아우성치며 시각적으로 드러난 것이 아닐까 한다. 어머님의 인생 세월의 한이 그렇게라도 드러난 것이 아닐까 싶다. 몸빼를 팔기 시작한 사람은 그 마음을 다 알고 있었을까? 세상이 눈치채지 못하게 꽃피고 싶었던 여자의 마음이 화려하고 선명하게 드러난 패션으로 내겐 다가온다. 한과 응어리의 표현으로 말이다.
결혼 후 시댁으로 주말마다 내려가곤 했다. 농번기에는 배 과수원에서 배 봉지를 씌우거나 고추를 따는 일을 했다. 시어머님은 여장부 스타일이라 다리가 불편하신 시 아버님보다 훨씬 더 하시는 일이 많았다. 농사일에 젖소 기르고 틈틈이 집안일, 음식 만들기까지 하루를 행주 짜듯 꼭 꼭 짜면서 빈틈없이 일로 채우셨다. 잠시 앉아 한담을 나누는 시간조차 아까워하셨는데 도란 앉아 있을 때에도 마늘을 깐다거나 하여간 무엇을 하곤 하셨다. 마치 쉬는 시간이라도 있으면 안 된다는 듯이 당신께서 하신 일들을 하나씩 말씀해 주셨다. 초인적인 스케줄이었다. 마을회관에서 동네분들과 장기를 두시던 아버님의 전화 한 통이 오면 어머니는 부리 나케 막걸리와 전을 붙여서 쏜살같이 달려가곤 하셨다.
시골에 가면 손자들이 쓰던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분들이 많았다. 관절이 닳거나 허리가 너무 굽어서 걸을 때에도 지탱할 것이 필요하신 분들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들로 밭으로 나가 어김없이 일을 하는 아낙 어른들이었다.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낼 때 나는 알 수 있었다. 시골의 논과 밭은 단 하루라도 나가 풀을 뽑아 주지 않으면 티가 난다. 방치된 논과 밭은 게으른 주인의 소유라는 것을 보란 듯이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므로 농사일, 안살림까지 다 챙겨야 하는 어머니의 일은 평생 끊임이 없었다. 출가한 자녀들의 김치까지 만들어 주말이면 품에 가득 안겨 주시곤 했다. 봄이면 향긋한 각종 나물을 캐러 들을 누비고 다니셨고, 여름이면 서해안 바닷가로 가서 맛살과 같은 해산물을 가져다가 불 피워 구워 먹을 수 있도록 했다. 그 시간이 가장 가족들이 화기애애한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맛살을 불에 구우면 부글부글 익어 가고 우리들의 이야기도 뜨끈 해지곤 했다.
가을이면 배가 탐스럽게 열렸는데 젖소 분뇨로 거름을 써서인지 유난히 크고 달았다. 떨어진 배를 가지고 배즙도 내려 주시고 겨울 내내 배 깎아 먹는 재미로 살았다. 겨울에도 떡을 빚고 만두를 빚어 자녀들이 모이는 주말이면 식탁은 뭐하나 궁한 것이 없게 풍성했다. 넓은 시골집 마당에서 프로판 가스를 피워서 설렁탕도 자주 끓여 주셨는데 그 뼈 국물은 우윳빛깔보다 더 진했다. 그 진한 사랑이 우러난 것 같았다.
시어머님은 현재 요양원에 계신다. 몇 년 전 목욕탕에서 넘어질 때 골반뼈가 부러지면서 수술을 하셔야 했다. 치유 과정이 너무 힘드셨는지 그만 치매 증상까지 오고 말았다. 정신줄을 놓지 않고서는 아마도 그 고통을 잊기가 힘드셨는지도 모르겠다. 남편이 몇 년 전 방문하셨을 때 셋째 아들이 왔다며 반가워하셨는데 화상으로 나를 보고는 너무 반가워하셨다. 셋째 며느리를 잊지 않고 계셨다. 어버이날에도 병원 관계자가 준 카네이션을 달고 무표정하게 앉아 계신 어머니의 얼굴을 대하고 가슴이 멍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병원 관계자들이 비록 사진으로나마 형님들께 자주 소식을 전해 준다고 했다.
몸빼바지를 입고 산과 들을 누비셨는데 어떻게 그 좁은 곳, 침대와 의자에 앉아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시는지 마음이 아프지만 멀리서 마음만 아파보았자 뭘 하겠는가 싶어서 잊어버리려 했나 보다. 자주 전화를 드리지도 못했는데 그나마도 '너희들만 잘 있으면 된다'시며 전화비용 걱정에 얼른 끊으시라고 하시던 시어머님이셨다. 당신이 좋아하는 것 그리고 원하는 것을 찾지 못하고 자녀들을 남편만을 위해 사셨던 어머님이 치매로 아예 현실과 더 멀어져 버린 이 상황이 야속하다.
어머님이 사시던 집은 헐렸고 막내 도련님이 집을 새로 지었다고 한다. 시어머님이 입던 몸빼 바지는 아직도 있을까? 오래전 캐나다로 두어 번 오셨을 때 함께 했던 추억이 사진으로 생생하게 남아있다. 밴쿠버 공항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분에게조차 '야는 딸만 셋이에요' 하면서 셋째 며느리에게 아쉬움을 드러내셔서 섭섭하기도 했다. 그땐 섭섭하기도 했는데 그 목소리가 그립다. 함께 배 봉지를 씌우고 시원하게 오이냉국을 마시던 여름 한낮의 시간이 지금도 마치 내 옆에서 흐르는 듯 지나간다.
내일이 오늘보다 언제나 좋을 것이라며 살았는데 그땐 어렸던 것 같다. 어느 틈엔가부터 오늘의 시간이 내일보다 훨씬 더 싱싱하고 새롭다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랑 백화점에 갔던 기억이 별로 없다. 몸빼 바지 말고도 입고 싶은 바지가 있으셨을 텐데 말이다. 효성스러운 형님들이 잘 챙겨 드리는 것을 그저 당연한 줄 알고 셋째 며느리는 받기만 했다.
내 생일이면 언제나 한 번도 빠짐없이 내의를 선물로 해 주셨던 어머니, 그 내의가 다 닳았다. 내의 서랍이 텅 비었다. 습관이 되어 캐나다에서도 내의를 사지 않고 살았다. 옷 서랍장을 열고 닫으며 내가 어머님께 얼마나 많이 받고 살았었는지를 알게 된다. 이곳에 온 지 20년이 넘었으면서도 어머님의 생일 선물인 속내의를 기다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시어머님 생각에 코가 얼큰해지며 눈앞이 희뿌애진다. 요즘 그래도 좋아지셨다고 하는데 단 한 번만이라도 '셋째 며느리'가 해 드리는 어깨 마사지로 애교를 떨어 드리는 시간을 가지고 싶다.
어머님, 받기만 하고 돌려 드린 것이 없는 셋째 며느리입니다.
어머니, 좋아하시던 서해안 발안에 가서 육손이 아줌마네 맛살로 숯불에 구워 먹을 날이 단 하루라도 있을까요. 사랑하는 어머니, 어머니가 몸빼를 입고 배밭에서 '왔냐" 라며 배꽃 사이로 수건을 쓴 얼굴에 배꽃보다 더 하얀 웃음을 보여 주시던 그 시간이 정말 그립습니다. 겨울이면 사각사각 맛있던 배를 돌려 깎아 주시던 모습도 시골에서 그간 있었던 이야기를 구수하게 들려주시던 순간도 다 기억이 납니다.
어머님, 어떻게 어머님의 시간을 돌려 드릴 수 있을까요.
멀리 있는 아들은 표현도 못하고 셋째 며느리는 울고 싶습니다.
내년에라도 꼭 뵈러 가려고 합니다. '기다려 주실 것'이라고 그때처럼 제 생각만 하며 글을 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