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는 얼마 전에 있었던 남편 P와의 충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그녀는 작정을 하고 P의 가슴팍에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소리를 질렀다. 지렁이도 밟으면 움찔한다고 성질을 한번 부려야겠다고 작정했다. 하지만 싸우고 나면 서글픈 생각이 들어 땅속으로 숨고 싶었다. 중년이면평온한 일상이 보장이 될 줄 알았는데 양은 냄비 끓듯 하는 정서 상태가 안타까웠다.
상대의 큰소리, 찌푸린 얼굴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었다. P는 아내의 외침이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는 절망의 절규임을 알지만 변화할 생각은 못한다. 그럼에도K의 플랜 안에는 이혼이 없다. 그녀에겐 너무도 낯선 계획이며 두려운 선택인 것이다. 견디는 이유는 둘 사이의 아이들 때문인데그동안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게 할 수는 없었다.
소파에서 담요를 덮고 있던 K는 남편의 짧고 흰 머리카락 한올을 집어 든다. 결혼 이후 처음으로 집 밖에서 잠을 청한 남편이 마침 옷을 갈아입겠다고 들어왔다. 남편 P를 보자 K는 그동안의 원망이고 뭐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동안 고생을 너무 했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며 울먹였다. 왜 그때 하필 흰 머리카락이 그녀 앞에 보였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동안, 우리가 서로에게 했던 말을 다 잊자,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서로 같이 살 수가 없다"라고 P도 말한다. 극적인 화해를 했지만 다툼의 기억은 불탄 집의 기둥에 남은 그을림처럼 흔적으로 남아있다.그들의 스승은 자연이다. 엄마의 품처럼 다정한 공간 속에서 3살 때로 돌아가 불을 피워 장난을 치며 노는 가운데 회복이 이루어진다.
캠핑에서 가장 재미있는 시간은 둘러앉아 캠프화이어를 하는 시간이다. 그것은 자연이 주는 선물이다. 그 선물을 먹으면 정서적 허기가 달래 진다. 내가 주는 만큼 너에게서 받아야 한다는 평상시의 생각을 잊는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일상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진실하고 대단하지도 않다. 마음이 아련한 가운데 경쟁사회에서 실아가는 서로의 처지가 가엾고 안쓰럽다.
"저 불빛은 뭐야?"
"누군가 캠핑을 하고 있네, 불이 깜빡깜빡하고 있잖아"
"아닌것 같은데, 강 위에 띄운 배에서 나오는 불빛이야".
"여보, 오늘 밤을 꼭 기억해요."
"그러자고, 나도 하고 싶은 대로만 했던 것 같아! 미안해".
K가 남편이 변화될 것이라고 믿게 된 것은 아마도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늘 P에게 절대 변화는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자신이 옳다는 것이 그렇게 중요했다는 말인가? 그녀는 자신이 옳은 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상대를 이해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K는 변화를 원했지만 변화를 자신도 모르게 막고 있었다. "너 때문이야"라며 갈등에 대한 책임을 남편 P에게서 찾았다. 남편을 미워하면서 살았다. 덕분에 아이들은 마치 DMZ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불안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자 죄책감이 들었다.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비가 오는 가운데 출발한 별난 여행은 결혼 27년 만에 변화를 부르는 분기점이 되었다.
그러나 밀린 숙제를 하루에 다 풀 수는 없다. 과제마다 그 무게와 부피가 크다. 더군다나 부부 문제는 오죽하면 칼로 물 베기라고 할까. K는 우선 단호하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남편 결정에 따르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함께 결정하는 아내로 살아야 한다. 그것은 의미 있는 결정이었다. 스스로의 존엄성을 깨닫고 인정하는 순간이었다. 그동안 엄마로서 아내로서 스스로를 존중하지 못한 것은 잘못한 것이었다. 딸들 앞에서 엄마의 인격을 포기한 것이었다.
촘촘하게 박힌 별무리가 검은 밤하늘 속에서 반짝거렸다. 마치 검은 비 단위에 큐빅을 뿌려 놓은 것 같다. 별이 가득한 하늘을 함께 바라본다. 부부란 대화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상황과 경험을 숙명처럼 함께 지게 된다. 혼자만의 독단적인 방식으로는 애초에 어림도 없는 것이다.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 보니 밤사이 눈이 살짝 내렸다. 단 하루 동안에 비, 안개, 별, 무지개까지 온갖 자연현상을 다 겪었다. 그것은 자연이 베푼 은혜였다. 지치고 가엾은 그들을 향한 절대자의 배려였다.
캠핑에서 돌아갈 때 그들은 식당에 들러 따뜻한 시간을 가지려 한다. 아이들은 부모의 친밀감에 기대어 자란다. 기분이 좋은 다 큰 아이들이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어릴 때처럼 "냠냠"음식을 먹는 모습에 K는 가슴이 따뜻해졌다. 어느 집 아이들보다 더 철이 일찍 든 아이들도 부족한 엄마 아빠 때문에 고생이 많았다.
아이들이 하나 둘 셋 태어나면서 K와 P는 부부 중심에서 아이들 중심으로 모든 것을 바꾸었다. 좌충우돌 서로 자신의 사랑 법만을 고집했다. 그러면서 부부로서의 시간도 잊어버렸다. 어설펐던 엄마의 역할은 예행연습도 없이 바로 실전으로 들어간 날 것의 상태였다. 그것은 마치 엑스트라가 연습도 없이 가장 정교해야 하는 연기 장면을 연기한 것이다 다름이 없었다.
결혼이란 훈련과 노력이 필요한 고난도의 기술이 필요한 과정이었다. 서로의 정서적 허기를 달래줄 지식과 노력이 필요한 줄 알았더라면, 그 방법을 제대로 터득했더라면 아이들의 정서적 허기도 달래 줄 수 있었을 것이다. K는 남편 P가 절대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대신에 누구보다도 로맨틱하게 변화하는 남편의 모습을 기대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관계란 한쪽이 바뀌면 마치 요철처럼 상대도 바뀌게 된다고 하니 그 마법만큼은 믿고 놓지 않는다.
짧은 하룻밤 캠핑으로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시간을 번다. 이번 여행길에는 해, 달, 무지개, 별, 눈뿐만 아니라 비, 바람, 안개까지 만났다. 문제가 있을 때에는 문제에 머무르기보다 그것을 품어 줄 수 있는 자연으로 떠나면 된다. 문젯거리는 풍경화를 바라보듯 해야 한다. 숲을 바라보아야지 나무 한그루만 보며산을 탐험할 수는 없다.
나란히 앉는 것과 서로 마주 보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 마주 보면 서로의 모습만 보이지만 나란히 앉으면 함께 바라볼 수 있는 대상이 더 많아진다. 자연보다 더 착하고 진실한 대상은 없다. 매일 다가오는 삶의 숙제를 싸 들고 변화를 찾아 주말에 또 산으로 떠나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