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의식

아침 맞이

by 스토리텔러 레이첼

"뿌아앙"

까만 새벽 오토바이 소리가 반갑다.

새벽시간이면 바닷물 속에 깊숙이 잠긴 빙산처럼 숨겨져 있던 무의식이 경계를 푼 머릿속으로 스멀스멀 끝도 없이 꼬리를 물고 파도처럼 밀려든다. 그럴 때에는 머릿속과는 비교되게 몸은 마치 시멘트로 발라 놓은 것처럼 굳어 있어서 벌떡 일어서기가 힘들다. 질긴 동아줄처럼 단단히 나를 동여매고 있는 것들을 탁 끊어 버리고 일어서야 하는데 눈동자만 빠르게 움직일 뿐 몸이 움직여주질 않는다. 그렇게 머릿속에서 생각들이 이리 뒹글 저리 뒹글 거리면서 몸과 마음을 분열시키고 있을 때에 외부로부터 무엇인가가 인기척을 내면서 나를 이끌어 구해 주면 퍽 다행스럽다. 그리고 그런 행운이 매일마다 있는 것이 또한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캐나다 밴쿠버의 겨울밤은 오후 4시경부터 다음날 7시까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극과 가까워 하루 15시간 이상 되는 깜깜한 비 오는 겨울밤, 밤이 길어진 만큼 눈을 감고 있어야 하는 시간도 는다. 마땅하게 갈 곳도 놀 곳도 없고 그러니 늘어난 시간만큼 집안에서 몸과 마음을 잘 달래면서 보내야 한다. 초저녁은 그래도 그나마 달콤하게 시작되지만 새벽이면 그렇지를 못했었다. 눈을 뜨면 되는데 비몽사몽중에 늪 같은 꿈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 누군가가 던지는 밧줄을 기다렸다. 그 밧줄은 때로는 스마트폰의 알람이기도 하고, 빗소리, 때로는 눈 소리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제대로 아침시간을 구원해주는 튼튼한 동아줄을 만났다. 그렇게 스스로 거룩하게 나만의 의식을 치르기 시작한 것이 반년은 된 것 같다.


언젠가 '아날로의 혁명'이라는 책에서 저자가 자랑스럽게 소개한 공책, 몰스킨 노트에 뭔가를 부지런히 적고 있다. 값진 물건의 가치에 대해 안목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이것은 달랐다. 소장용으로 좋다고도 하고 무엇보다 쫙 펼치면 양쪽 페이지 끝 부분까지도 빽빽하게 글을 쓸 수 있을 만큼 제본이 잘 되어 있다. 언젠가부터 소중하게 나의 글을 고급스러운 노트에 담아두고 싶어 졌다. 고급스러운 하드커버에 싸여 있는 노트를 글밭 삼아 펜으로 정성스럽게 가꾸고 싶었다. 마침 아이들이 작년 크리스마스 때 선물로 무엇을 갖고 싶은지 묻길래 두말할 나위도 없이 사달라고 했다. 정성스럽게 글을 적으니 돈을 저금하는 것도 아닌데 부자가 되는 것 같다. 글이 무럭무럭 자라서 언젠가는 싹이 트고 잎이 돋고 꽃도 피어서 씨앗까지 맺힐 수 있도록 매일 물도 주고 창문을 자주 열어 환기도 시켜주어야겠다.


거룩한 새벽에 치르는 나만의 의식의 순서는 이렇다. 우선 내가 하고 싶은 그날의 우선순위를 적는다. 가끔은 아침에 의식을 치르는 것을 잊을 때도 있는데 그럴 때는 자기 전에 내가 했던 일들을 적어보기도 한다. 그럴 때에도 노트를 조금이라도 채웠다는 기쁨에 보람이 느껴진다. 계획했을 때에도 좋지만 계획도 못했는데 더 기쁜 하루를 보내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우연히 횡재를 한 날은 더 기쁘다. 그런데 문제는 그 노트가 너무 비싸다는 것이다. 세금까지 더하니 거의 40불 가까이 된다 그래서 캐나다의 대표적인 학용품 대형 쇼핑센터인 '스테이플'에서 유사하게 생긴 'Trured'사의 노트를 3권이나 더 샀다. 비용은 훨씬 저렴한 19불인데 퀄리티는 보기에 비슷하다. 몰스킨 노트에는 그날의 할 일들, 목록을 적는다. 그리고 나머지 'Truroad'사의 세 권의 노트 중 1권에는 성경을 옮겨 적고 (지혜를 얻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기도하면서 ) 2권에는 읽는 책들의 표현들을 필사하고 (박완서 님의 글 위주로) 마지막 3권째에는 그때그때 생각나는 글을 엮어 놓는다. 그러고 보니 갑자기 납작하고 가벼운 검은색 금고처럼 생긴 노트를 4개나 동시에 가진 부자가 되었다.


비가 오건 눈이 오건 새로운 날의 시작을 알리는 아침에 눈을 떴다는 사실이 감사하다. 내세울 것도 없는 인생인데 뭐 그리 트라우마가 많은지 겨울밤 새벽은 고난의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토록 고통스럽던 기억들이 이제는 가물가물 생각도 잘 안 나서 그 이야기 들이 내 것 같기도 하고 어디서 들은 것 같기도 하다. 내 이야기를 주인인 내가 잊어가고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는다. 가끔은 내 인생인데도 마치 남의 소설을 읽는 것처럼 덤덤하기까지 하다. 멀리서 보면 인생도 희극이라던 찰리 채플린의 말이 생각난다. 그래서 내가 나를 더 잊기 전에 부지런히 이야기로 남기고 싶다. 간절함을 잃고 싶지가 않다. 뜨거운 호기심으로 삶에 애착을 가지고 싶다.



'자유'를 글자 그대로 해석했던 어린 시절, 그때에는 그저 천방지축이었기에 무엇인가를 계획하는 것이 싫었다. 과제에 충실했기에 인생의 목적은 그날그날 나에게 주어진 임무를 있는 힘껏 달성하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그때그때 열심히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시간을 일생의 숙제를 하는 시간으로 여겼고 부지런히 숙제를 하기는 했는데 지나 놓고 보니 과제를 마친 것일 뿐 내가 무엇을 했었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렇게 귀찮은 숙제를 끝내고 나면 목적도 없이 빈둥빈둥거렸다. 그 젊었던 시간들이 다이아몬드 같은 가치를 가진 것인지 알았더라면 그렇게 쉽사리 내 던지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시간을 어떻게 쓰는지 몰랐기에 나는 더 자주, 빨리 지치곤 했었다. 지름길을 몰라 돌고 돌아 가느라 경비도 엄청 썼다. 그러는 동안 맞닥뜨리는 내 안의 것들과 내 밖의 환경들에 대항해서 싸우고 화해하느라 내가 가진 무기였던 연장들이 낡고 닳아버렸다. 다른 무엇보다도 누군가에게 끝까지 인정받으려고 애썼던 시간들을 생각해 보면 한숨이 나온다. 어떻게 그렇게 모든 사람들에게 나란 존재를 증명하려고 했었는지 그때에는 힘이 장사였는가 싶다. 그런데 그럴수록 집착의 대상은 멀어져 갔던 것 같다. 아무리 쏟아부어도 차지 않던 밑 빠진 독에 물도 엄청 부었다. 그것은 내가 스스로에게 가진 갈증이었고 나의 어린 자아에게 바치던 치맛바람이었다. 그것을 또 허기라고 부르는지도 모르겠다. 정서적으로 얼마나 굶주렸기에 그랬었는지 가끔은 스스로가 가엾고 안쓰럽다. 그래도 지치고 힘들고 돌고 돌아온 만큼의 주행거리가 있어서 거기서 덤으로 얻은 이야기가 많다는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수확이다. 그것들을 싼 보자기가 좀 헤졌기로서 그것이 문제가 될 것도 없다. 흘린 이야기들보다는 아직은 남겨진 이야기들이 더 많다고 믿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 글을 쓸 때에는 시간이 나와 함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스스로가 쓰는 이야기라서 그럴까? 지난 시간들은 급물살을 타고 마치 요트를 탄 것 같아 보였다면 이제는 앞에서 흐르는 시간들이 슬로모션으로 보일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또 안경을 쓰고 먼저 글을 쓰며 내 앞을 지나간 사람들의 발자국이 새겨진 책을 읽는다. 그 시간이야말로 '금 나와라 뚝딱 하는' 시간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새벽에 깨어 나만의 의식을 치르는 그 시간에 나는 그날의 일정에 대한 목차를 만들어 보기도 한다. 이제는 스스로를 최대한 살갑고 친절하게 배려하면서 만든다. 삶의 불확실성 때문에 목차의 순서도 매일 바뀌고 내용도 변덕스럽지만 그런 점이야말로 예측불허의 삶을 보여주는 증거이기 때문에 좋다.


Happiness의 어원은 Happen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2021년 2월 20일 오늘 있었던 소소한 일들 몇 가지가 오늘을 더 기쁘게 만들었다. 아주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과의 시간이 첫 번째, 한 권에 4불씩, 세 권에 12불 내고 눈에 착착 달라붙는 한글책을 한인 책방에서 빌리는 것이 두 번째, 마지막으로 한인타운에 있는 길거리 붕어빵 가게에서 단팥 붕어빵 한 개랑 슈크림 붕어빵 1개를 섞어서 사고 추가로 쫄깃한 찹쌀 꿀호떡 2개를 추가하는 것이 세 번째이다.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글감이 될 만한 것들을 만나는 것이 오아시스에서 샘물 만나는 것처럼 기쁘다. 또한 살아온 날들에 비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 얼마 전까지는 허망하게 느껴지더니 이젠 그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만큼 알아갈 것들이 많은 미지의 영역이 내게는 많다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직 접하지 않은 책, 음악, 미술 등이 넓은 평야처럼 내 앞에 쫘악 펼쳐져 있는 것 같다.


드디어 긴 겨울이 조금씩 멀어지는 것을 아침에 창문의 블라인드를 올릴 때마다 느낀다. 벌써 허리까지 쑥 올라온 튤립 싹들도 보인다. 그들도 나만큼 봄을 기다렸었다보다. 아직은 이른데 가끔씩 들이닥치는 늦은 한파에 고생깨나 할지도 모르겠다. 이제 해가 점 점 더 길어진다. 겨울에 밤이 길었던 것처럼 여름엔 낮이 그만큼 더 길어진다. 여름에는 모두들 얼굴이 까매진다. 직접 밖에서 꽃들처럼 새들처럼 살아내자니 당연하다. 겨우내 너무 움츠리고 살았었나 보다. 화석처럼 뻐근한 어깨와 목을 조금씩 움직이면 얼음이 버그적 삐져나올 것만 같았다. 이제 그만 기지개를 켜자. 봄이 오고 있다.


책을 읽고 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도 많은지 브런치를 하기 전에는 몰랐다. 이제 며칠 후면 브런치 입문 딱 한 달, 브런치를 알고 글을 쓰면서부터 자주 미소 짓는다. 공감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큰 위안이다. 나 외의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데 글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는 것 같다. 글로 맞이하고 글로 보내는 선물처럼 주어졌던 오늘 하루도 지나고 있다. 자기 전에도 거룩한 의식, 감사기도를 드려야겠다. 그것 말고는 이 은혜를 갚을 길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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