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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일럿 Apr 09. 2024

퇴사 메일을 보내고 얻은 것

보내길 잘 했다.

9년 간 몸 담았던 나의 첫 직장을 그만뒀다.


그동안 나는 선박 브로커로 근무했다. 브로커는 배와 관련된 이해 관계자들을 연결해 주는 역할로, 쉽게 말하자면 부동산 중개인과 하는 일이 비슷하다. 대신 집이나 건물이 아닌, 화물을 싣고 나르는 다양한 종류의 선박을 새로 짓거나, 중고 선박을 사고, 팔고, 금융하는 거래를 도와주고, 중개 수수료를 받는다. 거래처들을 만나 어떤 수요가 있는지 파악해 시너지가 날 것 같은 회사들을 연결시켜 주고, 두 당사자가 모두 만족할 수 있는 거래 구조를 만드는데서 브로커로서 가치를 더할 수 있다.


출장이 잦고, 시장 상황의 영향을 많이 받아 빠른 페이스로 돌아가며, 전 세계에 있는 거래처를 상대하기에 9-5의 근무시간이 무색하다. 도파민 자극을 쉴 새 없이 받기를 좋아하는 성향의 사람들에게 잘 맞는 직업인 것 같다고 늘 생각했다.



내가 거래했던 배들 중 하나로, 사진은 원유를 수송하는 선박이다. 축구장 3개를 합친 정도의 크기이다.



업무를 하며 많은 것을 배웠다. 천성이 외향적이진 않은데, 사람들을 만나 얻는 정보와 네트워크로 승부하는 직업이다 보니 업무용 사회성을 많이 길렀다. 새로운 거래처를 개발하기 위한 끊임없는 콜드메일, 콜드콜은 기본이고, 무수한 점심/저녁/술자리들이 있었다. 한 번은 초대받지 않은 invitation-only 업계 파티에 한껏 치장하고 나타나, 왜 내 이름표가 준비되지 않았는지 항의하고는 임시 이름표를 건네받고 파티를 활보하기도 했다. 이런 경험들을 통해 배운 건 무엇을 먹는지, 어디에 있는지보다 그 순간, 누구와 함께 있는지가 나에게 더 중요하다는 것. 나의 부족한 부분을 어느 정도까지 개발하는 것은 좋지만, 그 정도가 심해져 업무용 성격과 실제 성격 사이 간극이 너무 커지는 것은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꾸며낸 외향성은 에너지를 소모시킨다. 사람의 성격은 4년을 주기로 변한다는 이론이 있다. 브로커로 근무한 9년이 지난 나는 다시 혼자가 편하고, 용건 없는 대화는 이어나가기 어려우며, 파티보다는 조용한 곳을 선호하는 사람이 됐다.



퇴사 날짜가 다가오면서, 기억에 남는 거래처분들께 이메일로 퇴사 소식을 알리고 싶었다. 어떤 내용이 좋을까.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면 업무에 능숙해지고 싶다는 생각으로만 가득 찼던 시기도 있었고, 무례한 거래처들에게 상처받은 기억도 있다. 나는 싱가포르에 있어서 그나마 나은 편이라고, 한국의 모 회사는 신입사원들에게 '브로커를 잘 길들이는 법' 이라며, 소위 말해 브로커를 조질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매뉴얼로 알려준다는 걸 한국에 계신 업계분께 위로로 들었다. 험하다.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좋았고, 감사한 순간들이 압도적으로 더 많다. 입사 이전, 미래에 대한 불안을 털어놓으니, 그럴땐 한 곳에 집중하면 불안은 사라지게 된다고, 나는 세계 최고의 브로커가 될 수 있을거라며 내가 생각하는 나 자신보다 나를 더 높게 봐주신 사장님을 비롯하여, 진심으로 나를 생각하는 조언들을 해주신 분들, 사실 나는 심마니가 되는 게 꿈이라며 산을 돌아다니며 발견한 삼 사진들을 보여주셨던 거래처 이사님,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뭔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던 인도네시아 해운 회사의 여자 대표님, 같이 방문한 선주 사무실의 안내 데스크 직원 분께 가장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했던 노르웨이 브로커 등... ‘나도 저런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멋진 분들을 셀 수 없이 많이 만났다.  



꽤 오랜 시간 고민해 짧은 메일을 작성했다. 그리고 퇴사하기 일주일 전 기억에 남는 거래처분들을 모두 숨은 참조로 해서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안녕하세요, XXX의 파일럿입니다.


다가오는 3월 8일을 마지막으로 지난 9년 동안 XXX에서의 여정을 정리하고 퇴사하게 되어 메일로 소식을 전합니다.


처음 입사 했을 때 저보다 모든 면에서 베테랑인 거래처분들과 일하며, 제 자신이 너무 서툴게만 느껴져 '5년 정도 시간을 빨리 감기 해서 쓸모 있는 사람이 됐으면' 생각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9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네요.


과거에 제가 상상했던 업무에 능숙한 멋진 커리어우먼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 된 것 같지만, 그래도 저는 그간 너무나 훌륭하신 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한 분 한 분과 소통하며 업무 협의를 하면서도 오히려 삶의 자세 같은, 인생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을 배우는 멋진 순간들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앞으로 저는 잠깐의 휴식을 가지고, 싱가포르에 머물며 XXX라는 비영리 환경단체에서 해운, 조선 분야의 지속가능한 발전과 신재생에너지 보급 촉진을 돕는 업무를 하게 됐습니다.


다시 한번 이 메일을 통해 그동안 정말 고마웠다는 말씀을 드리며, 아래 제 개인 연락처를 남깁니다.


그럼 건강하세요.





회신을 크게 기대하진 않았다. 나중에 나에게 이메일을 보냈다가 '없는 이메일 주소입니다'라고 바운스 메일을 통해 퇴사 소식을 알게 되는 것보다는 내가 직접 소식을 전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 안내 차원으로 쓴 글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답장들이 들어왔다. 그것도 아주 따뜻한 응원의 메시지들이.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내가 조금 꼬여 있었구나. 사람들이 브로커인 나를 낮춰보고, 나의 퇴사 소식에는 큰 관심이 없을 줄 알았는데. 내가 아무런 도움 되는 정보를 주지 않더라도, 나에게서 아무런 이득을 얻을 게 없더라도 좋은 마음을 가지고 그걸 표현해 주는구나.



이 경험은 더 나아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따뜻한 면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이 처한 팍팍한 현실과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내면의 따뜻한 심성을 내보일 용기 또는 여유가 없거나, 아니면 오히려 자신이 상처받지 않기 위해 더 무표정하고 사무적인 태도로 내면을 보호하고 감싸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만들었다. 과거 나에게 상처를 줬던 거래처들에도 생각이 닿았고, 그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까지 슬며시 생겼다.



나의 다음 여정을 응원해 주는 메시지들에는 엄청난 힘이 있었다. 사람들의 따스한 말 한마디가 나에게 이렇게 큰 힘이 되고 하루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처럼, 나도 다른 사람들과 나 자신에게 친절하고 따뜻한 마음을 자주 표현해야겠다고, 그런 다짐을 했다.


퇴사 메일을 보내길 잘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꼬깃 꼬깃 접혔던 마음의 구김들, 덕분에 다 깨끗하게 펴고 갑니다.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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