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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에서 온 택배와 병어조림

따뜻한 마음으로 가득했던 하루

by 파일럿


아침에 꽁꽁 싸맨 큰 나무상자가 택배로 도착했다. 이런 걸 주문한 게 없는데 뭐가 왔지 하며 뜯어봤더니, 오스트리아산 꿀, 호박씨 오일, 사과식초와 편지가 톱밥과 함께 담겨있었다. 오스트리아에 계신 나의 멘토님이 결혼 선물로 보내주신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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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씨오일, 사과식초, 꿀1, 꿀2





멘토님과는 대학교 때 교수님과 연구실 제자로 만났다. 업계에 계시다 대학교로 오셨던 교수님은, 다시 업계로 떠나 오스트리아를 거쳐, 지금은 독일에 계신다. 연구생으로 지냈던 나는 커리어의 갈림길에 설 때마다 교수님께 조언을 구하며 인연을 이어갔다.



가장 처음 조언을 구했던 건, 한국에서의 괜찮은 정규직 직장에 갈 수 있는 기회와 해외 인턴쉽의 기회였다. 부모님도 - 대학교를 졸업했으면 돈을 제대로 버는 정규직을 선택해야지, 왜 굳이 또 인턴을 하러 해외에 나가냐고 나무라셨지만, 교수님과 상담한 뒤 해외 인턴쉽으로 결정했었다. 어떻게 보면 그 결정의 나비효과로 지금 이렇게 싱가포르에서 10년째 살고 있고, 덕분에 남편도 여기서 만났으니, 내 인생의 큰 전환점을 교수님 덕분에 만든 셈이다.


교수님은 내면에 사랑이 가득한 분이시다. 본인에 대한 사랑은 물론,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사랑도 넘치신다. 나도 그 사랑을 나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IMG_2846.JPG?type=w966 요새 빠져있는 얌과 오쿠라, 오이 샐러드



꿀은 달콤하고 향긋했고, 호박씨 오일은 살짝 참기름과 비슷한 고소한 풍미가 있었다. 요즘 목감기가 왔었는데, 저녁엔 꿀차를 마시고, 아침엔 호박씨 오일과 사과식초로 샐러드를 만들어 먹었더니 목이 금세 개운해졌다.



교수님의 따뜻한 마음이 샐러드 야채의 한 입 한 입마다, 꿀차 한 모금 한 모금마다 느껴져 행복한 아침이었다.





저녁엔 친구 트위티의 집에 초대받아 남편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갔다. 약 17분 정도의 자전거 라이드. 늘 더운 열대국가인 싱가포르도 요즘은 나름의 겨울이라, 저녁엔 자전거를 타고 달리면 쌀쌀하기까지 하다. 찹찹하고 시원한 공기. 우리 집에서 트위티 집까지 가는 길에는 우람한 열대목들이 특히 더 많아서, 마치 발리에서 오토바이를 타는 듯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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찐한식으로 준비한다는 트위티의 저녁 메뉴는 병어조림과 버섯 탕수육이었다. 남편이 스위스 사람이라, 혹시나 생선 요리가 입맛에 맞지 않을까 걱정했던 트위티는 저녁 내내 정성스럽게 우리에게 생선 살을 발라주었다. 우리는 한국의 깻잎 논쟁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생선 살을 발라주는 건 엄청난 애정이 담긴 행동이라며, 나중에 나에게 혼나는 것 아니냐며 웃었다.



평소에 생선은 연어 말고는 잘 안 먹는 해산물 입 짧은 남편도, 집에 돌아오는 길에 - 그 생선은 의외로 되게 맛있었다고 하기에, 생선 살에 애정이 담겨서 그렇다고 했다.



저녁을 초대해 준 트위티는 세상을 다채롭고 아름답게 보는 고유한 필터를 가진 사람이다. 트위티와 대화를 하다 보면 '이런 게 저렇게도 느껴질 수 있구나'라는 깨달음이 자주 찾아온다. 그녀의 시선이 너무나 소중하고 사랑스럽지만, 예민한 감성을 가진 사람에게는 세상의 아름다운 모습과 마찬가지로 어두운 모습들도 더 극적으로 다가오겠지.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라고 말한,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감이 떠올랐다.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게, 어두운 것은 조금 더 부드럽게 느껴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게 가능하긴 할까?



트위티처럼 섬세하고 특별한 감성의 소유자는 이 거친 세상 속에서 보호받아야 한다. 그녀의 체가 세상의 따뜻한 온기를 마주할 일만 많아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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