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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은 엄마의 감정을 먹고 자란다

엄마와 딸, 상처받은 마음의 치유를 위한 책

by 파일럿


엄마와 대화할 때 종종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이 왜 생기는지 궁금해하던 때에 이 책을 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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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엄마를 바라보며 '나는 저렇게 하지 않아야지'라는 얕은 수준의 긍정적인 거울치료가 되기도 했지만, 마음 한켠에는 부정적인 감정들이 많았다. 책을 읽으며 사색해보니 알게됐다. 엄마를 향한 분노는 사실 엄마에게 보이는 내가 싫어하는 내 모습에 대한 분노였다. 이는 엄마가 충분히 애도하지 못한 과거 힘든 삶에서 오는 상처에 대한 안타까움, 그 아픔을 내가 해결해주지 못하는 무력감, 그런 엄마를 한국에 혼자 두고 해외에서 나만 잘 살고 있다는 죄책감이 복잡하게 얽혀 표출된 감정이었다. 그저 답답하다고만 어렴풋이 느꼈던 감정이 죄책감, 미안함, 안타까움, 그리고 슬픔이 뒤섞인 감정이라는 걸 알게되니, 감정에 윤곽이 잡히면서 신기하게도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이 책은 수많은 엄마와 딸들을 상담치료한 전문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모녀 관계에서 엄마가 딸과 자신을 동일시 하지 않고, 독립된 개체로 바라보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자녀에게 정답을 주려고 하지말고, 엄마가 본인의 삶을 사랑하고, 삶에 대한 애착을 가짐으로써 그러한 삶의 태도를 딸이 자연스럽게 체화하도록 말이다.






하지만 우리의 상황은 조금 다르다. 평균 수명을 고려하면, 엄마는 이미 인생의 2/3의 시간을 보냈고, 앞으로 1/3의 삶이 남아있다. 나는 남은 시간 동안 엄마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들을 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주체적인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엄마의 비관적인 사고방식이 안타깝고, 엄마에게서 보이는 내가 싫어하는 나의 모습들도 함께 개선됐으면 한다.






당분간 엄마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내가 삶을 대하는 방식을 보여주고, 함께 책을 읽고 대화하면서 엄마의 관점 변화를 돕고, 건강한 생활 습관 - 식단, 운동 관리도 함께 하며 엄마의 회복 여정을 같이 가져보기로 했다.




책 중에서




많은 여성들은 타인의 감정을 자기 것으로 여기기에 타인을 충족시키거나 타인의 만족을 구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만족시키거나 충족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타인의 감정이나 상태에는 매우 민감하지만, 정작 자신의 상태나 감정에는 무딘 여성이 많은 것도 이런 이유이지요.


- 공감된다. 엄마와 나 모두, 타인의 감정보다 우리 자신의 감정을 더 세세하게 살펴보고, 우리 스스로를 만족시키기 위한 하루들을 살았으면 좋겠다.




엄마인 내가 먼저 내 상태와 감정, 욕구와 요구, 욕망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리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 감정과 아이의 감정을 분리해서 이야기해 줄 수 있고, 나 자신에게도 아이에게도 불필요한 죄책감이나 책임감을 지우지 않을 수 있습니다.




충분히 풀어지지 않은 감정의 덩어리들은 내 안의 곳곳을 떠다니다, 그러다 어느 때든 적절한 환경과 때를 만나면 회귀합니다.




엄마가 자신이 두려워하고 회피하고 싶은 현실을 아이들을 위한다는 이유로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 아이들이 죄책감을 가지게 되니




의존 욕구는 쾌락을 유지하고자 하는 충동만큼이나 집요합니다. 의존성이 강한 엄마들은 대부분 피해자와 약자 위치에 자신을 놓습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의존 욕구 이면엔 지배 욕구가 있습니다. 내 욕구를 타인이 채워 주어야 하는 것이고, 그로 인해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도 타인이기에 늘 피해자일 수밖에 없지요.


- 엄마에게서 느껴지는 것




스스로 책임지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책임질 수 있는 역량과 자원이 없다고 생각하고, 어떤 결정과 선택을 하기를 두려워하지요.




의존성이 강한 사람이라고 해서 결코 게으르지는 않습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지만, 모든 에너지와 시선은 외부를 향해 있습니다. 오직 외부에서 원인을 찾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고단한 노력을 멈추지 않지요.




모든 것을 알고 있어야 모든 것을 보호할 수 있을 것처럼 말하고 여기는 엄마들이 많습니다. 정말 모든 것을 알아야 도울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자 하는 내 욕망이 무엇인지를 더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 나도 이런 욕망이 있다. 왜 그럴까?




내가 나의 상태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의문을 갖고 의심할 수는 있어야 합니다.


'이 감정은 무슨 감정이지? 내가 왜 이렇게 화가 나는 거지? 나는 왜 내 생각과 달리 이렇게 아이에게 말하고 행동하고 있는 거지?'


우리는 자신에게 무수한 질문을 해야 합니다. 내가 나에게 던져야 할 질문을 아이나 배우자에게 던지며 그들이 그 답을 찾고 해결하길 요구하고 있지는 않은지 지금 멈추어서 한번 살펴보아야 합니다.




엄마가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가 좇아야 하는데, 본인도 정확히 무엇을 욕망하는지도 모른채 그것을 아이가 성취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아이를 심리적으로 위험하게 할 수 있습니다.


- 엄마와 나는 다른 욕망을 가졌다. 나의 욕망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고, 나의 욕망을 알아가려는 시도 없이, 엄마의 욕망을 나에게 투사하는 듯한 엄마의 언어적 표현에 답답함과 서운함, 소외감을 느낀다. 엄마와 내가 욕망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표현해주기. 엄마는 우리가 다른 욕망을 가졌다는 것을 모를 수도 있다.




엄마가 헌신적으로 열심히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엄마가 진정으로 자신의 삶을 얼마나 욕망하고 집중하느냐가 중요하지요. 자신의 삶을 이해하고 그것을 애도하고 수용하기 위해, 또 실현하기 위해 욕망을 발화하지 않는다면, 아이 또한 진정한 자신의 욕망을 찾기 위한 열망을 이어 나가지 못하고 주어진 삶 안에 갇히고 맙니다.


- 엄마가 그랬으면 좋겠다. 얼마 전, 엄마가 - 나는 다음 생에도 꼭 인간으로 태어나고 싶다. 해보고 싶은 게 많아. - 라고 했을때, 엄마가 이번 생은 실패했고, 포기했다고 느끼는 것 같아서 너무 슬펐다.




더 이상 외부에서 원인을 찾고 탓으로 돌리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자녀를 자신의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더욱 위험합니다. 스스로의 삶을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 엄마가 되어야 합니다. 즉, 자신의 삶에 집중하고 자신의 삶 자체를 욕망해야 하지요. 그러나 자기 계발을 하고 능력을 배양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물론 그것들도 한 부분을 매울 수는 있겠지만, 내가좇는 삶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고민하고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더 궁금해하고 공부해야 합니다.




어떤 공부든 상관 없습니다. 무엇인가를 꾸준히 집요하게 반복적으로 지속해 나가면, 반드시 어떤 지점에서 통찰이 일어납니다. 타인 혹은 전문가가 주는 솔루션이 아니라 자신만의 경로를 발굴하고 만들어 갈 수 있지요. 꼬리에 꼬리를 물 듯이 내가 찾고 좇는 길은 새로운 다른 길을 또 열어 줄 것입니다. 아이는 엄마가 내놓는 정답이 아니라 엄마가 삶을 대하는 태도를 체화하는 법입니다.


- 이 부분, 너무 큰 울림을 준다. 엄마가 내가 내놓는 정답 (도 참고하고) 내가 삶을 대하는 태도를 체화했으면 한다.


- 엄마의 내면을 바라보며 글쓰기를 통해 회복했으면.




타인의 시선은 타인의 눈을 통해서 보는 나의 시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엄밀히 말해, 타인에게 나의 시선을 투영하는 것이지요. 정작 타인은 나를 어떻게 볼지 알 수 없습니다. 단지 내가 생각하기에 '이렇게 보일까 봐'의 의미가 더 큽니다. 그리고 그 시선에는 나 자신의 기준과 판단, 가치, 편견, 선입견이 투영되어 있는 것이지요.




내 안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시선은 누구의 것일까요? 우리는 타인을 타인으로 볼 수 있고, 나를 나로 지킬 수 있을 때에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녀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표면상으로는 원만하게 지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적인 상태는 무겁고 안개 속 같은 느낌만 지속된다고 표현했습니다. 고립을 좋아하는데 막상 고립이 길어지면 두렵고,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면 또 불편해지는 것을 반복적으로 경험하고 있었지요.


- Ambivert 성향인 나를 잘 묘사하는 것 같다. 전엔 이런 성향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이를 받아들이고, 적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다. 매순간순간엔 힘들 때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는 것을 알기에 편안해졌다.




밝고 긍정적이어서 나쁠 사람은 없지만, 그렇지 않으면 문제가 되거나 나쁘다는 생각은 우리의 관념일 뿐입니다.




우리의 기억은 선택에 따라 구성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같은 사건을 두고 부모와 자식의 기억이 판이한 것은 우리가 결국 자신이 유리한 쪽으로 혹은 그것이 고통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감정적 이득이 있는 쪽으로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결핍을 선택함으로써 끝없이 갈망하고 욕망할 수 있는 것이지요. 끝없이 나약한 사람으로, 결여된 자로 요구를 멈추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야기하는 내용이 실제로 경험한 것인지, 아닌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분석 과정 중에 거론되는 내용은 한 개인이 실제 그것을 경험했느냐, 아니냐보다 왜 그렇게 이거되는지, 그 기억을 붙들거나 그 기억이 만들어 내고 있는 환상과 욕망이 무엇인지, 그 욕망의 방향이 어디인지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한 개인의 진실과 그 개인이 좇고 있는 진리를 말해 주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드러난 진실과 진리를 개인은 새롭게 받아들이고 스스로 재구성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언어로 구조화되어 있는 우리 의식이 지닌 하나의 가능성이고, 정신 분석의 가능성이기도 하지요.




언어학에 기표와 기의가 있습니다. 기표를 언어로 말하는 '나무'라고 한다면, 기의는 나무가 뜻하는 '의미'에 해당하지요. 누군가 '나무'라고 말할 때, 나무에 대해 가지는 '의미'는 각자 다릅니다.




사색하고 사유하는 엄마여야 합니다. 엄마 자신의 욕구와 욕망, 결핍과 상처를 인식하고 애도할 수 있을 때, 그동안 발화되지 않았던 뜨거운 모성을 만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잘못해서 벌어진 일은 아닐지라도 이미 내 안에 들어온 상처와 고통을 스스로 책임지며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엄마와 아이의 애착 관계가 안정되게 형성된다는 것은 아이가 무엇을 해도 엄마가 자신을 외면하거나 소외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긴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이 믿음이 흔들리면 아이 내면에 두려움이 생기고, 엄마 마음에 들기 위해 지나치게 순응하게 됩니다. 이때 엄마가 아이의 상태에 공감하고 지켜봐 주지 못하면, 아이는 이 불안정한 관계에 대한 책임을 자신에게 지웁니다.




아버지가 엄마에게 언어적, 신체적 폭행을 가할 때 아버지를 막아서서 엄마를 먼저 보호하는 딸은 자신을 그 상황에 노출된 채로 방치한 부모를 향해 분노하기보다는 엄마를 지켜 낼 수 없었던 자신의 나약함에 죄책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이는 남성과 지나치게 경쟁하고 남성을 통제하거나 제업하려는 경향으로 나타나기도 하지요.




우리의 기억에 남는 것은 '그 사람이 얼마나 나를 도와 함께 희생했느냐'보다 '그 사람이 얼마나 나의 고통과 무력감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느냐'입니다.




엄마의 말로 굳이 아버지의 자리를 지우거나 아버지를 가해자나 나쁜 사람으로 보이게 만들면 가장 큰 피해를 보고 그 대가를 치르는 사람은 남편이 아니라 아이들입니다.




아이를 두고 있는 부모라면 두 사람만의 관계를 넘어서 자신들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으며 어느 지점에 있는지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이들 때문에 억지로 부부 사이가 좋을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지요. 그것은 또 다른 보상을 아이들에게 요구하게 될 테니까 말이지요.




서로에 대해 어떤 요구가 있는지, 그 요구가 어떻게 좌절되고 만족되고 있는지 정도는 알아 차릴 수 있어야 합니다.




자녀에 대한 과도한 불안은 자녀의 상태나 미래에 대한 걱정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근본적으로는 부모 자신의 내적 불안입니다.




부모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면서 아이에게 끝없이 마음을, 곁을 내주지만 '네 삶에 대해서만큼은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고 할 수 있는 것이 없어'라는 무능의 자세가 아이를 생동감있게 살도록 만들 것이빈다.




내가 해 주면서도 내 아이가 부러워지는 이 복잡한 감정은 무엇일까요? 그 부러움은 내 안에 있는 딸아이 또래의 어린 내가 가지는 부러움입니다.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주는 것이 사랑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나도 못 받았는데, 내가 가지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줘? 뭘 주라는 말이지?"라는 반문과 반감은 내 안에서 충분히 애도되지 못한 탓에 어느 시점에서 멈추어 버린 어린 나의 아우성에 불과합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사랑은 서로의 결핍이 만들어 내는 것이고 내 결핍을 상대가 채워 줄 것이라 믿는 투사에서 일어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내 자신을 스스로 충족시킬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진짜 사랑을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누구를 통한 의존이 아닌 나 스스로도 충분할 때 진짜 사랑을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어떤 반영이 없어도 자신의 존재를 믿고 나를 충분히 괜찮게 여길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홀로 선다는 것은 물리적인 독립이나 경제적 자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 자신을 만족시킬 수 있는 개인이 된다는 의미이지요. 나의 쾌락과 나를 만족시킬 수 있는 권력을 타인에게 양도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야 폐허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래야 고독을 사랑할 수도 있게 되지요.




우리가 누군가를 나 자신보다 더 챙길 때는 그 대상을 통해 나를 확인하려는 욕구가 앞서기 때문입니다.




나태는 사랑하지 못한느 상태이고 부주의함과 무심함은 사랑이 부재한 상태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나태와 무기력은 자신을 무력한 자로 고정시킴으로써 아무것도 실천하거나 실행하거나 결행하지 않으려는 회피의 수단일 수 있습니다. 나태는 단순히 육체적 게으름이 아니라, 자신에게서 도망가는 것입니다. 내가 사소한 것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기 어려운 상태라면, 내 무의식은 어느 곳, 어떤 것에 사로잡혀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글을 쓰는 과정은 끊임없는 자기 정화의 과정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우리 목표는 우리가 가진 나약함을 자각하고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나약한 자신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나약함과 취약함을 새롭게 재해석하고 나의 일부로 인정하여 함께 일생을 사이좋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데 있지요.




자신을 좋은 엄마라고 속이면서 아이에게 은밀한 해악을 끼칠 수도 있고, 자신을 나쁜 엄마라고 죄책감에 빠져 있는 엄마라도 아이를 위해 자신을 온전히 포기하는 선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엄마로서의 고유함은 무한히 열려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렇기에 엄마로서, 한 인간으로서 멈추지 않아야 하는 것이 사색이고 사유입니다. 사유하고 사색하는 엄마를 따라 아이도 자신의 삶과 욕망에 대한 사색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언제나 월요일 오전을 생각하면 기다려지고 기분이 좋아집니다. 이런 사소하지만 나만의 고유한 일상의 루틴을 만드는 일을 조금씩 늘리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매우 사소해 보이지만 꽤 많은 공을 들여야 하지요. 이것은 내 삶의 즐거움과 쾌락을 타인을 통해 느끼거나 얻으려고 하는 의존을 거두어들이는 일이기도 합니다.




나의 쾌락과 만족을 실현시킬 권한을 타인에게 양도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삶을 탓하거나 우울해하는 것은 소모적이기만 합니다. 내 삶에 대한 애착과 애정을 만족시켜 줄 타인을 찾아 헤매기보다는 내가 나 자신을 만족시킬 수 있는 사소한 루틴을 발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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