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살고 싶기에, 새로운 세계로)
그때의 나는,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래야만 살 수 있을 것 같았기에.
그래서 나는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주변의 아이들이 나를 미워하는 것도 모른 채로,
나는 활자 속으로 몸을 숨겼다.
책 속에서는 누구도 나를 혼내지 않았고,
아무도 나에게 “왜 그렇게밖에 못하니”라고 묻지 않았다.
활자 하나하나가 숨구멍이었고,
그 안에서 나는 겨우, 살아 있었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엄마와 아빠가 나를 자랑스러워했다.
그래서 더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엄마와 아빠는 책을 읽는 나를 자랑스럽게 소개했고,
나도 그 일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어느새, 부끄러웠던 내 자신은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즐거운 생활 30점을 맞아 복도에 서 있던 나,
수학 구구단을 못 외워서 손가락을 맞던 나,
그 모든 나는 활자 속에서만 자유로웠다.
책을 읽는 동안만, 나는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었으니까.
나는, 현실의 나를 점점 지워가고 있었다.
내 마음대로 하던 나, 엄마 말에도 내 의견을 말하던 나,
호기심 많던 나, 하고 싶은 대로 하던 나는 점점 지워지고 있었다.
대신, 엄마 말을 잘 듣는 아이, 책을 많이 읽는 아이, 조용히 자기 할 일을 하는-
소위말하는 "말 잘 듣는 아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혼나는 대신, 칭찬을 받기 위해 뭐든 했다.
남들이 하지 않는 일, 쓰레기를 줍고, 봉사활동을 나갔다.
사람들은 그런 나를 착하다고 했다.
엄마도, 선생님도, 옆집 아줌마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수록 나는 나 자신에게 환멸을 느꼈다.
어린 나는 ‘환멸’이라는 단어를 몰랐지만,
지금의 나는 그 감정을 정확히 알고 있다.
남들을 도우면서 기뻐하는 척 하는 나,
그것이 진심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도 내가 알고 있었다.
내 본심은, 혼나는 대신 사랑받고 싶어서 한 일이었다.
그래서 더 이질적이었다.
내 기질과 어긋난 착함, 내 감정과 다른 미소.
그건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한 연기였고,
살아남기 위한, 또 다른 숨이었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을 하기보다
내 자신을 미워하는 것을 선택했다.
누군가를 미워하다 보면- 나는 나쁜 아이가 되니까.
나쁜 아이가 되면, 다시 그 '혼나는 과정'이 나를 향해 쏟아질 것 같았다.
30cm 자, 팬티, 소금-
그래서 필사적이었다.
동생의 잘못은 내 잘못이 아니었지만,
“누나가 잘 가르쳤어야지.”라는 말이 돌아오면
결국 내가 대신 사과해야 했다.
동생이 공부하지 않으면 내가 혼났고,
그래서 나는 동생을 윽박질러 공부를 시켰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일을 다니게 된 엄마가 퇴근 후,
엄친아와 나를 비교하며 쏟아내는 말 속에서도 억울함을 삼켜야 했다.
그래도, 한 번은 용기내어 말했다.
“엄마, 나는 엄친아가 아니잖아요.
나는 나예요. 그러니까 그런 말은 하지 말아 주세요.”
그러나 그 항변은 언제나 엄마의 분노로 덮였다.
“어디서 말대꾸야?”
그 말 한마디로, 나는 다시 나를 지웠다.
진짜 내가 아닌, 엄마가 원하는 내가 되어야 했다.
그 시간은 길었다.
초등학생 시절 내내, 나는 나를 잃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