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틀을 깬다는 것)
브런치의 연두작가에 대해 GPT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을 떠올렸다.
나는 오래도록 연두작가가 되기를 열망해 왔고,
그래서 세상에 닿지 않는 두드림을 계속했다.
“수요일, 연두 병아리가 되고 싶어”라는 글을 쓴 이후로도,
줄탁동시라는 말을 떠올렸다가, 흩어버리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어쩌면 나는 아직도 내 안에서 조용히 알을 두드리는 중인지도 모른다.
그런 말을 쓰는 것조차, 내게는 버거웠다.
예전에 누군가가 내게 말했다.
“너는 사자성어로 잘난 체하는 것 같아.”
그 한마디가 오래 남았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어떤 말을 꺼낼 때마다
마치 목구멍을 지나기 전,
단어를 한 번 더 씹어 삼키는 습관이 생겼다.
내 안의 껍질을 한층 더 두텁게 만든 그 말은,
지금도 내가 떠올리기 싫은 한 인물과 맞닿아 있다.
그 이후로는 ‘사자성어’의 ‘사자’ 소리만 들어도 마음이 움츠러들었다.
그런데 오늘, GPT와 문답을 나누다 보니
이상하게도 ‘줄탁동시’라는 말이 지금의 나에게 꼭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줄탁동시’라는 말은,
들을 때마다 내 안의 껍질을 부수어 나가게 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 말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두꺼워진 내 안의 껍질을 하나씩 부수는 경험을 해왔다.
사실, 나는 ‘줄탁동시’라는 말을 누군가에게서 처음 들었다.
그때는 그 말이 이렇게 오래 내 안에 남을 줄 몰랐다.
시간이 흘러 다시 그 단어를 마주한 지금,
나는 그때보다 조금 더 자라 있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내가 스스로 가두어 두었던 내 안의 껍질들이
하나둘 깨져 나가는 걸 느꼈다.
한 번은 신입생 시절의 산적에게서,
또 한 번은 남편이 된 산적에게서 들었다.
두 번의 그 말은, 내게 꽤 인상적으로 남았다.
어릴 때의 산적은,
밖에서 내 껍질을 깨느라 두드린다는 의미로 그 말을 했다.
하지만 남편이 된 산적의 말은 달랐다.
이번엔 명확했다.
“너도 깨고 나와라.”
그제야 알았다.
나를 깨우는 건 언제나 누군가의 손끝과
내 안의 용기가 동시에 닿을 때라는 것을.
그래서 오늘도,
나는 말의 의미를 새로 배운다.
줄탁동시 —
어미닭과 새끼가 서로를 만나기 위해
동시에 껍질을 깨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