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오는 날들

(feat.가을바람이 부는 날)

by Rachel

갈바람이 부는 아침,
추위에 떨며 아침 운동을 마칠 때쯤이었다.

우리는 1교시를 자체 휴강(...) 하고
느긋한 시간을 가졌다.



남자 동기들이 하나둘씩 군입대 신청을 하던 때라
조금이라도 사진을 남기려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하성 선배의 디카로 사진을 많이 찍었다.
그중에는 산적과 여자 동기들 사이에서 찍은 것도 있었다.


나는 그때 장난기가 발동해서
산적을 찌르는 흉내를 내기도 했다.



갈바람이 차갑게 바닥을 얼린 덕에
우리 발바닥은 여름 합숙의 진진이처럼 찢어지기도 하고,
란란이처럼 부상을 입기도 했다.

그래도, 우리는 추계 대학검도연맹전을 위해
열심히 운동을 했다.

그리고 나는—
선배들 사이에서 인정받은 건 아니지만,
미르치과기에서 후보 선수로 등록해 뛰게 되었다.

후보로 등록된 날,
엄마에게는 대회 이야기를 따로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
엄마에게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D야. 너 지금 어디니?”

“나? 용인.”
“용인? 거기가 어디라니?”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아빠가 간단한 시술에 들어갔는데,
엄마 무서워서 그래.
아빠 전신마취를 했거든.”
“응, 그런데요?”
“두 시간이 지났는데 안 일어나.
엄마 너무 무서워.
아빠 이대로 안 깨어나면 어떡하니?”
“아니에요, 괜찮아요.
나도 수술했을 때 늦게 깬 적 있잖아요.
아빠 곧 일어나실 거예요.
간단한 시술이라면서요.”
“그래도 엄마가 너무 무섭다…”
“엄마, 진정하고 제 말 들어요.
사람마다 마취에서 깨는 속도가 달라요.
너무 무서워하지 말고요.
나 지금 용인이라 갈 순 없지만,
통화는 할 수 있으니까
불안하면 계속 전화해요.”
“그래, 고맙다. 또 전화할게.”


전화를 끊은 뒤,
내 얼굴빛이 끔찍했나 보다.

은명 선배가 물었다.


“너 왜 그래? 갑자기?”

“그게… 아빠가 시술했는데,
마취에서 안 일어나신대요.”

“어떡할래? 집에 갈래?”

“여기서 어떻게 가요.
그냥 전화기 붙들고 있을게요.”


초조한 마음에
손톱을 물어뜯으며
나는 전화기를 붙잡았다.


무신론자였지만, 신을 찾으며 기도를 드렸다.

빨리 아빠가 깨어나게 해달라고.

우리 아빠는, 착한 사람이니까 잘 일어나게 해달라고.

다행히, 30분 후 아빠가 무사히 깨어났다는 엄마의 전화가 걸려 왔다.


가을 바람이 불던 그 날, 나는-

아빠가 깨어나던 그 날을 기억한다.

아빠가 무사히 깨어났음을 축하하며, 나도 경기에 임했다.

후보 선수도 마지막에는 호면을 써야 했기에 호면을 쓰고 경기장으로 들어갔다.


사실 앞이 잘 보이지는 않았다.

아빠 걱정 때문이었는지, 긴장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혼란과 걱정 속에서 나는 나의 첫 공식전을 치렀다.



공식전을 마치고 비틀비틀 나오자,
후들거리는 다리를 누군가가 붙잡았다.

하성 선배였다.

“D, 집에 무슨 일 있다면서. 괜찮니?”
“네, 괜찮아요.
지금 좀 혼란스럽고 그래서 비틀비틀거리는 거 같아요.
긴장 많이 했나 봐요.”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에 털썩 앉자,
하성 선배가 물 한 병을 건네주었다.

“아, 감사합니다.”
“너무 많이 마시진 마. 곧 또 나갈 테니까.”
“네.”


그날의 물맛은 이상하리만큼 달았다.
차가운 물이었지만,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면서
온몸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날 나는,
사람의 손길이 마음에 더 따뜻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하성 선배가 잡아준 도복 자락이,
얼음처럼 굳어 있던 내 몸에
가을 바람을 불어넣어 주는 것 같았다.

시원하다 못해,
조금씩 풀려가는 마음에—
그날 두 번째 경기를 나설 땐
조금은 더 가벼워진 걸음으로
경기장을 밟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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