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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신 Sep 03. 2024

외로움을 대하는 법

외로움을 가래떡으로 대접한 날

 몇 달째 방치된 쌀포대를 보다 결국 먹을 것 같지 않아 떡을 하기로 맘 먹었다.

아들이 친구 아버지 농사하는데서 도와드리고 받아 온 쌀이 우리 집에서는 그다지 대접을 못 받고 있었다.

현미를 먹거나 외식을 하거나 빵을 먹거나 하는 다양한 식생활이 주원인이었다. 

떡이라도 하면 나눠 먹기라도 하겠구나 싶어 10kg를 떡집에 맡겼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시장은 붐벼서 차를 주차할 수도 없어 가래떡 두 상자를 힘들게 들고 걸어왔다. 손목이 빠질 것 같고 새벽부터 나가 일하느라 수고한 몸이 떡까지 들고 힘을 빼느라 집에 오니 정신이 거의 나간 것 같았다. 두 상자나 되는 떡을 보다가 이웃들과 나눠 먹고 싶어 아래 위집에 나눠 드리고는 정신없이 소파에서 자 버렸다. 




 여기저기 맘이 가는 사람들에게 나눠 줘야지 하다가 문득 나를 보게 된다.

힘들게 떡을 해서 여기저기 나눠주는 모습이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내가 이렇게 이고 지고 해서 떡을 해가지고 온 것도 모른 채 정작 받는 사람은 쉽게 받을 건데 왜 사서 고생하지라는 마음이 올라온다. 물론 누군가의 인정이나 감사를 위한 것은 아닌데 아마도 나 자신을 혹사한 것에 대한 화남과 미안함이 올라온 것 같다.


오늘 주문한 책 '외로움의 모양'에 대한 첫 부분을 읽다가 잠시 더 생각해 본다

각기 사람들은 다른 외로움을 느낀다고 한다. 자신이 느끼는 외로움을 표현한다면 다 다른 모습이라고 한다.

어떤 이는 외로움을 '바람에 구르는 바싹 마른 낙엽'같다고 하고 또 다른 이는 '물살에 떠내려가는 스티로폼'이라고도 표현한다. 이렇게 달리 표현하는 외로움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자리 잡고 있다.

오늘 몇 개씩 가래떡을 물어 먹으면서 나도 모르게 드는 생각이 '내가 지금 외로운가'라는 되물음이었다. 질겅질겅 씹어 먹는 가래떡이 오늘 나에게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방편인가라는 물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생신이었다.

온 가족이 생일상을 만들어 함께 했던 식사가 떠오르면서 돌아가신 엄마의 그리움도 무척 사무치게 느껴진 하루였다. 부모님의 따뜻한 밥냄새를 다시 함께 하지 못함에 떡이라도 해서 나누고 싶었는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나에게 지금의 마음은 어떤가라고 물어본다면

가래떡을 먹고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는 느낌이다.

가래떡의 졸긴 함이 내 입안에서 오물거림으로 잠시 머무르다 내 배를 채우지만 먹어도 배가 배가 부르지 않았다.

난 배보다 마음이 고픈 것 같았다.

조용히 내 삶을 채우는 일들로 나를 더 성찰할 수 있지만 내 안의 외로움의 한 부분은 여전히 공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그것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채울 수 없을 것이다. 잠시 채웠다고 느껴도 다시 공허해질 것이다.

오늘은 그 허함이 부모님의 부재로 많이 시렸다.

다시는 볼 수 없는 나의 부모님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이 내 마음을 촉촉이 적신다. 




 뜨거운 가래떡이 시간이 지나 따뜻한 열기가 남아 있는 말랑말랑한 가래떡이 된다.

그 가래떡을 소분해 냉동실에 몇 시간 넣어두니 쫀득한 가래떡이 된다. 

아마 하루가 지나면 딱딱한 가래떡이 될 것이다.

그러면 딱딱해진 가래떡은 떡국떡이나 떡볶이용으로 잘라질 수도 있게 굳어질 것이다.

나의 마음도 그렇게 될까

나의 공한 마음이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에서 감사함으로 이어져 단단한 나로 잘 다듬어지게 할 것인가. 그렇게 되리라 믿는다. 다만 때론 훅하고 쳐들어 오는 외로움을 애써 싸우려 하지 않고 가끔 찾아오는 손님으로 잘 대접해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난 오늘 가래떡으로 외로움을 대접했다.

부모님의 부재에 대한 아쉬움을 나눔으로 대신했다.

평소에는 잘 먹지 않은 떡을 오늘은 몇 배로 먹으며 내 배를 쓰다듬어준다. 고마워라고

오늘의 외로움을 내 안에 채워지지 않는 공이라고 했지만 그것을 부정적 시각이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 바라볼 것이다. 


인간이면 누구나 들 수 있는 감정의 하나로써 가끔 만나게 되는 손님과 같은 존재로 그 외로움을 대할 것이다.

오늘의 그 외로움에 대한 나의 해석이 몇 개씩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내 위장이 잘 움직여 줄 것이라는 믿음이 생긴다. 먹어도 배부르지 않았지만 점점 편해지는 마음으로 속은 부대끼지 않았다.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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