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계를 옮기다> nobody가 되려고요

somebody가 아닌 nobody가 되고 싶다고요?

by 마케터유정

사회생활을 시작하면 누구나 한 번쯤은 somebody가 되는 꿈을 꾼다.
사람들이 나를 중요한 존재로 여기고, 회사에서도 차량이나 사무공간을 마련해주는 등 나를 위한 특별한 케어를 한다. 월급도 이 정도로 나를 위해주는구나 싶다. 언젠가 오를 영광의 자리를 바라보며 오늘도 힘들고 어려운 회사생활을 견디게 된다.

다만, 역설적인 점은 somebody가 되면서부터 실상은 경쟁력을 잃어버리기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실은 누구도 아닌 본인이 자처하는 바가 큰데 동료일 때는 잘 지내다가 완장을 차는 순간 사람이 바뀌었다는 사람들의 후문을 종종 듣곤 한다.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대개 오프닝을 하거나 정리하는 멘트를 하지만 정작 사람 간의 의사소통에서는 무엇이 이슈인지 필터링되고 큰소리 나지 않을 것들만 정제되어 메시지를 듣게 된다. 그리고는 흐뭇해한다. ‘잘 되고 있군.’


결국 경쟁력 있는 존재이자 somebody로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방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다. 직장 졸업반일 무렵 그러한 생각들로 제일 괴로웠다. 앞으로도 커리어를 이어가고 싶은데 좋아하는 일을 하며 생활하고 싶은데 롤모델로 바라보는 somebody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생각이 많았다.


숱한 고민 끝에 나는 위로 올라가기보다 발 딛고 서 있을 땅을 넓히기로 마음먹었다. (함께 읽기 좋은 글: 퇴사 인터뷰를 한다면) 기꺼이 nobody가 되어 보자는 도전이었다. 기회를 쫓아 스타트업으로 옮겼다. 몸은 바쁘고 때론 괴로웠지만 nobody가 되고자 선택한 내가 좋았다.




Nobody가 되다

첫 출근일이 아직도 기억난다. 새로 입사한 사람들이 자기소개를 하는 자리였는데 내가 몇 년 경력이고 신제품을 몇 개를 출시했으며 어떤 일을 했는지 얘기하는데 사람들이 별 감흥이 없었다. 내 경력을 얘기하면 ‘오오’ 알아주었던 사람들이 여기는 없는 것이다. 기술을 상품으로 바꾸기 위한 업무로 마켓인사이트부터 판촉물 제작까지 전 과정을 하게 되었지만 회사 사람들은 나를 가판대 베테랑 영업사원쯤으로 여겼다. 그런 피드백조차 신선했다.


나도 딱히 억울하지는 않았던 게 회사의 대다수인 개발팀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업무를 하는지 몰랐다. 다만, 내가 바라던 경험을 여기서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뻤다. 이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서 먼저 다가갔다. 대학교에서 무엇을 전공했고 어떻게 스타트업까지 오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발표한 논문을 들고 가 무슨 뜻인지 물어봤다. 내가 굳이 이곳에 찾아오지 않았다면 인생에서 만날 일이 있을까 싶을 만큼 다른 궤도의 사람들이었다. 매일이 챌린지였고 매일이 새로웠다.


밤에 잠이 계속 깼다. 어떤 날은 괴로워서, 어떤 날은 흥분되어 깊이 잠들 수 없었다.

nobody로서의 삶은 가벼웠고 나에게 맞았다.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것이 신기했다. 예전 회사에서는 보다 많은 자료를 모으고 여러 사람의 피드백을 거쳐 완성도를 높여가며 하던 일을 불과 며칠 만에 뚝딱 해내는 내 모습이 나도 신선했다. 이렇게도 일이 되는구나 싶었다. 그때는 그런 방식으로 지금은 이런 방식으로 같은 업무를 다르게 할 수 있다는 걸 배웠다.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로 우리에게 알려진 야마구치 슈는 최근 집필한 저서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현대사회의 네 가지 특징인 '변동성', '불확실성', '복잡성', 모호성'을 간단히 뷰카(VUCA; volatility, uncertainty, complexity, ambiguity)라고 부른다. 뷰카화는 우리가 지금까지 '좋다'고 믿었던 여러 능력과 물건의 가치에 큰 영향을 끼친다.

경험의 무가치화. 지금까지 경험이 많은 것이 무조건 긍정적으로 평가받았었다. 이런 시대에 과거의 경험에 의존하는 사람은 인재로서의 가치가 급속히 하락하는 반면, 새로운 환경에서 유연하게 배우는 사람은 가치를 창출해낸다.

뷰카 현상이 두드러지는 시대에는 축적된 지식과 경험이 급속도로 진부해지기 마련이다. 이는 오랜 세월에 걸쳐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을 축적해온 사람, 즉 '전문가'의 지위가 떨어진다는 의미다.

야마구치 슈. 뉴타입의 시대. 인플루엔셜. 2020



‘전문직’의 가치가 낮아졌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직업이라 하더라도 연차가 쌓임에 따라 다양해지는 경험을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하던 시대는 지났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지금은 변화가 심하고 그래서 미래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한편, 정보는 차고 넘쳐 세상 온갖 것이 쏟아지기에 소위 '5%만 준비되면' 일단 시작하고 피드백을 받아 완성해 나가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런 얘기를 하면 내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직장인) ‘맞아’ 하고 이론적으로 수긍하지만 실제로는 달라지는 경우가 별로 없다. 절절히 이해한다. 그게 나였으니까. 그래서 지난 삼사 년간 미적댔다.

‘정말 그럴까.’ ‘이러다가 내가 지금껏 쌓아온 것 마저 잃어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과장을 달려고, 부장 직급을 얻기까지 얼마나 걸렸는데 이걸 놓고 다시 십수 년 전 신입사원처럼 돌아간다고? 안 되는 말이지.’


그럼에도 스스로를 계속 괴롭히며 답이 나올 때까지 질문을 던졌던 이유는
그래야 내가 원하는 것을 하며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경험에 의지하여 해결하기 보다는, 새로운 곳을 향해 뛰어들어 문제를 찾아내며 방법을 터득하는 사람이 살아남는 시대이다. 해가 거듭될수록 이러한 세상은 더 뾰족하게 모습을 드러낼 터이다. 부단히 바뀌어야 한다. 아쉽겠지만 놓고 떠나야 한다. 괴나리봇짐 하나 매고 홀연히 떠나는 마음으로.

누구에게는 참 억울하고 누구에게는 참 감사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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