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은 어떻게 하는 거죠?

집주인이 변호사를 선임했다고?

by 마케터유정

변론기일이 다시 잡혔다. 한 달 남짓 남은 기간이었다. 우리가 받아야 할 돈은 적은 액수는 아니지만 변호사에게 맡기기엔 소가가 애매했다.


소가 (소송 목적의 값)
원고가 소로써 달성하려는 목적이 갖는 경제적 이익을 화폐단위로 평가한 금액을 말함


그렇다고 법률 자문 없이 우리끼리 준비하기엔 무방비 상태였다. 지난번 연락했던 사무장을 다시 찾아가 우리가 쓴 준비 서면을 검토만 해달라고 부탁했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우리 같이 나 홀로 소송하는 사람들이 참고할 수 있는 [셀프 소송의 기술]이라는 책이 있었다. 전공서적 같은 두께였지만 변호사 상담비보다도 적은 금액이었다. 책을 사서 먼저 가벼운 마음으로 통독하기로 했다. 책은 생각보다 자세히 쓰여 있었다.


법원에 갈 때 어떤 옷차림을 해야 하는지, 내용증명이나 계약서, 준비서면 등은 어떻게 쓰는지, 변호사 비용을 포함한 소송비용은 어떻게 계산하는지, 판사님이라 부를 것인지, 재판장님이라 부를 것인가 하는 디테일까지 담겨 있었다.


궁금했던 내용에 대한 답을 대부분 찾을 수 있었다. 퍼즐 조각을 맞춰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정장을 갖춰 입고 법원에 가는 거였구나.'


재판 진행에 대한 큰 그림을 머릿속에 넣은 뒤 이번에는 우리의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가면 좋을지 대략적인 구상을 해보았다.


먼저 글의 흐름을 잡았다. 사건의 주요 쟁점과 우리의 주장을 간략하게 정리해서 두괄식으로 배치했다. 다음으로 사건의 경위에 대하여 정리하기 시작했다. 수 차례 다시 읽으며 감정은 배제하고 사실 위주로 써 내려갔는지 살펴봤다. 인터넷과 책, 전자도서관을 열람하여 법률 용어를 찾아 썼다. 논리를 펼 때면 이를 뒷받침할 근거도 함께 보탰다.


우리의 요지는 간략했다.

1. 우리는 임차인으로서 목적물(배수관)을 원래의 용도 대로만 사용하였으며
2. 누수 사실을 인지한 이후에는 피해를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3. 또한 누수의 원인은 배수관 사용이 아니라 임대인의 관리 부실이라고 주장하였다.


다음으로 상대방이 어떤 논리로 나올지 고민해 보았다. ‘신축’이라는 말을 방패처럼 쓰고 있는 피고(집주인)의 논리를 어떻게 하면 깨트릴 수 있을까. 예전 분쟁조정위원회 출석 당시, 집주인이 제출했던 소명자료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집주인이 어떤 식으로 우리의 잘못이라 주장할지 언뜻 감이 잡혔다.


변론기일 일주일 전 집주인이 답변서를 보내왔다. 다음날 우리도 준비서면을 제출하였다.


며칠 뒤에 기일변경 명령과 함께 우리의 사건이 집중심리 재판부로 넘어갔다는 송달을 받았다. 그때는 몰랐는데 소액사건(소가 3000만 원 이하)이라도 피고가 답변서를 제출하거나 재판에 출석하는 등 적극적으로 다투는 경우 집중심리 사건으로 분류되어 집중심리 재판부로 재배당되었다.


가을을 지나고 찬바람이 불고 있었다. 연초부터 시작된 분쟁은 결국 매듭을 짓지 못하고 이듬해로 넘어갔다.


누수 사건이 발생한 지 1년 6개월이 지나고 있었다.




새해가 시작되었다. 남편과 다시 법정에 갔다. 그날은 오후 첫 사건으로 배정되었다.


먼저 가서 방청석에 앉았다. 잠시 후 법원주사가 일어서더니 방청석을 바라보며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했다. 곧 법복을 입은 판사가 들어왔다.


제일 상석에 앉은 그를 보는데 왈칵 눈물이 났다. 이 사람은 우리의 억울함을 알아줄까. 우리가 쓴 준비서면을 보았을까. 깊게 숨을 들이켰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마음을 가라앉힐 때 종종 쓰는 방법이었다. 두 눈에 눈물이 가득 맺혔다.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한참 동안 판사를 바라보았다. 문득 법원주사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무슨 사연이 있어 저럴까 싶은 표정이었다. 원고석에 자리한 남편 뒤에 가만히 앉았다.


판사는 피고 측에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누수에 대한 구체적인 정황에 대하여 이야기하며 빔프로젝터로 띄운 사진을 살펴보기도 했다. 이윽고 판사가 물었다. “그런데 공사를 진행한 구체적인 내역은 어디에 있지요?"


세부 내역 없이 계좌이체한 전체 금액만 증거 자료로 제출한 까닭이었다. 집주인은 말이 없었다.


"다음 변론기일까지 제출해 주세요.”




법정에 다녀간 지 며칠 뒤 집주인이 소송을 위임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궁지에 몰렸다고 생각했던지 결국 변호사를 찾아간 것이다. 이 소송에서 반드시 이기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법을 잘 모르는 사람들끼리 마주하는 건 서로 실수도 해가며 어떻게든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지만 변호사를 상대로 소송을 할 수 있을까 걱정되었다.


갑자기 자신감이 사라졌다. 지난 변론기일에서 분위기가 우리 쪽으로 넘어오나 싶었는데…
‘아니야’
다시 나를 다독였다.
‘우리도 변호사 선임할 수 있잖아. 언제라도 할 수 있어. 그런데 왜 안 했지? 다시 생각해봐.’


이긴다는 보장도, 이겨도 얼마나 돌려받을 수 있을지 몰랐다. 그럼에도 변호사를 선임하려면 확정된 금액을 수임료로 지급해야 했다. 변호인을 쓴다고 없던 증거나 나오지도 않을 것이고 있던 증거가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팩트는 확실하고 증거도 있는데 우리 쪽에서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럴 바엔 우리가 하자. 이기든 지든 끝까지 가보자. 배울 것이 있다면 여기서 확실히 배워보자. 법리를 아는 건 변호사지만 사건의 명명백백을 아는 건 우리다.




상대측 변호인은 사건을 파악하기 위해 기일변경신청서를 제출한 뒤, 다른 사건과 변론기일이 겹치는 바람에 한번 더 기일변경을 요청했다. 재판 날짜는 계속 미뤄지고 있었다.


겨울은 말끔히 자취를 감취고 어느덧 봄이었다. 찬바람에 코트를 여미며 법원으로 걸어갔던 날이 있었다면 이제는 가벼운 재킷을 입고 별관 건물로 들어섰다.


재판 시간이 가까워지자 블루 슈트를 위아래로 빼입은 남자가 한 명 보였다. 그는 집주인 아내와 가벼운 인사를 하더니 함께 법정으로 들어갔다.


할 수 있다고 몇 번이나 다짐을 했지만 그의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다. 피고석에 앉은 그는 여유 있고 익숙한 모습이었다. 판사의 몇 가지 물음에 서면을 통해 제출하겠다고 대답하는 그에게 연륜이 느껴졌다. 판사와 변호사가 주고받는 대화를 들으며 그들만이 알고 있는 절차와 룰이라는 커다란 장벽에 부딪힌 것 같았다.


그 장벽을 집주인은 원했을 것이고 우리는 뛰어넘고 싶었다.


변론을 마치고 변호사는 집주인 아내와 몇 마디 나누더니 의기양양하게 가버렸다. 건물 밖으로 나갈 때까지 그는 우리 쪽을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남편과 나는 여전히 어색한 법원을 조심조심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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