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TI를 맹신하는 것까지는 아니어도 사람을 이해하는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저 사람은 저런 성향이 있구나 알고 나면 그의 말과 행동을 이해하기가 한결 수월하기 때문이다.
MBTI를 이십 대부터 해봤던 것 같은데 한동안은 매번 ENTJ가 나왔다. 성격유형 해설을 읽다 보니 칭찬이랄 게 별로 없어서 그냥 나 혼자만 알고 지냈다.
이따금 한 번씩 회사에서 MBTI 얘기가 나올 때 테스트를 해보면 E와 I가 번갈아 나왔다. 원래부터 극E 성향은 아니었기에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피곤할 땐 I가, 교류하고 활동하는 시기에는 E가 나온 것 같다. 그래도 NTJ는 변함이 없어서 그런가 보다 했다. 나에 대한 주변의 평가도 대부분 '이성적이고 계획적이다' 였기에 나는 그런 사람인가 보다 하고 넘겼다.
몇 년 전 회사를 잠깐 쉴 때였다. 우연히 생각이 난 김에 MBTI테스트를 해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 처음으로 ENFJ가 나왔다. 왜 그랬을까? 마감에 쫓기고 퍼포먼스를 내야 하는 압박이 없었기 때문일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 되게끔 스스로를 통제하지 않아도 되었기에 그랬을까. 눈뜨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딱히 할 일이 없으면 그냥 흘러가는 대로 하루를 보내도 되는 시기였기에 그랬을까. 나에게 이런 면도 있구나 싶었다.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일하는 요즘에는 이 마저도 경계가 없는 것 같다. 다만 이 모호한 경계에 아직은 적응 중이다. 어디서든 일할 수 있지만 한편으론 어디서든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간도 마찬가지이다. 아이들을 픽업하려고 일찍 퇴근하면 아이들을 재우고 나서 다시 일해야 정해놓은 데드라인에 맞출 수 있었다.
이런 폭넓은 자율이 감사하지만 일과 생활의 경계가 딱히 없기에 더러 피곤할 때도 있다.
우리 가족은 내가 퇴근하면 같이 저녁을 먹는다. 저녁을 치우고 집안을 정리하는 동안 아이들은 쉬면서 씻고 옷을 갈아입는다. 이후에는 같이 모여 공부를 한다. 아이들이 놀이에 빠져 늦어지거나 하면 아직 남은 일 생각에 자연스레 아이들을 재촉하게 되었다. 이런 나를 보고 둘째 민서가 말했다.
엄마, 평일에 일하고 주말에는 쉬어.
으응?
뜻대로 안 된다고 승질부리지 말라는 의미였다. 일정에 맞춰 결과를 내는 건 일할 때나 하고 자신들에게는 그러지 말라는 뜻으로 들렸다. 정해진 경계가 모호하다면 스스로 기준을 세우라는 뜻인가?
아이들은 일 할 때의 내 모습과 안 할 때의 모습이 확실히 다르다고 했다. 자신들과 함께 있을 때는 여유 있는 모습의 엄마이길 바라기에 그런 말을 한 것 같다. 나는 빠르게 인정하며 평소보다 톤을 한층 높여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