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가 돌아가셨다

by radek

병원은 환자 보호를 위해 이름 세 글자를 전부 공개하지 않는다. 우리 어머니는 응급실에서도, 중환자실에서도, 마지막 1인실에서도 늘 박유* 이셨다. 불편했다. 마땅히 이름으로 불러드려야 할 분이 이름조차 제대로 못 불리며 병원의 이곳, 저곳을 떠도는 듯 싶어 화가 났다. 평생을 OO엄마, 집사님, 권사님, 언니, 누나, 딸, 여보, 엄마로 호칭을 당하느라 당신도 당신 이름을 들으신 지 오래 되었겠거니, 그런데 이렇게 의식 없이 죽음을 눈 앞에 두고도 이름 석 자 중 한 자는 가려져야 하는 건가 싶어 안쓰럽기까지 했다. 결국 장례식이 되고 나서야 이름 세 글자를 당당히 벽면에 붙여놓을 수 있었다.




어머니가 의식을 잃으신 첫 날, 면회가 오전 10분 외에 금지된 중환자실을 떠나 내가 집에 들어오며 처음 한 일은 엄마가 쓰러져 누워계셨던 그 곳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이었다. 긴급한 상황은 늘 스쳐 지나가고 말아 생각보다 정확하게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차 사고가 나서 크게 다칠 뻔했을 그 순간에도, 보드를 타다가 다리가 어긋나 절단을 할 뻔했을 순간에도, 그리고 이번에도. 순간의 위급함을 모면하기 위한 우리 몸의 생존 본능인가 싶다. 아침에 쓰러지시고, 응급실까지 따라갔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의식 없이 중환자실로 들어가시는 것을 보고 돌아왔을 때 그 날 아침의 기억은 어느덧 벌써 까마득했다. 긴박하던 와중에 가장 인상 깊은 순간들만 마치 사진으로 한 장씩 찍어놓은 듯이, 조잡한 가족사진들을 모아놓은 낡은 앨범을 열어보는 듯이, 기억이 났다. 집에서 나간다고 하신 어머니의 모습이 불현듯 스쳐 지나가 불안히 집 천장을 올려다보던 순간. 처음 쓰러지신 모습을 대면한 순간. 숨이 없어 정신없이 인공호흡을 하며 입술을 당신의 입술에 이십년만에 처음 맞댔을 때의 내려앉던 내 심장의 기억. 구급차에 실려가실 때 뛰쳐나와 하늘을 보니 내리던 초라한 가랑비. 두세평 남짓의 소생실에서 간호사, 의사 열명이 붙어 정체모를 약물을 가져오라고 소리치던 모습. 최악을 준비하라던 응급실 과장. 응급실 안 대기실에서 고갤 숙인 아버지. 그리고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튜브와 약물에, 인공호흡기마저 입에 달고 있어 불쌍하게 느껴졌던 어머니의 모습.


그런 기억들 대신 실체가 남은 것이라고는 고작 쓰러지시면서 쏟으셨던 라떼가 벽에 남긴 선명한 자국뿐이었다. 그 곳, 그리고 그 자국을 보면서 한창을 서 있었다.


비록 제대로 생각을 해 본 적조차 없지만, 누군가의 인생에는 늘 발자취가 있기 마련이라고 믿었다. 남아있는 사람들이 간직하는 추억과, 먼저 간 사람이 언젠가 행하였던 선한, 또는 악한, 영향력으로 인하여 바뀌어 있는 우리들의 모습들. 그렇지만 막상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직면할 때 그런 추상적인, 아무런 형체 없는 것들은 그 사람을 기억하기에는 부족하다. 여행을 가면 그렇게 기념품을 다들 강박적으로 사오고 사진으로 어떻게든 추억을 현상하는 이유인가보다. 기억은 신뢰할 수 없어서 왜곡되고, 변화하고, 잊혀지니까. 이에 질세라 어머니가 남긴 흔적들을, 유품들 중 의미 있는 것들을 찾고자 온 집, 애지중지하시던 자동차, 메일함, 심지어는 인스타까지 뒤져보았으나 마찬가지였다. 고작 의미 있는 것들이라고는 조그만 보따리 안에 남긴 친한 친구들이 남긴 손편지와, 나와 동생이 생일날마다 써 드렸던 손편지, 취직하고 처음 드렸던 용돈, 빽빽하게 메모로 채워진 성경 한 권 정도. 그 외에는 어머니가 어떤 사람이라고 기억하기엔 턱없이 모자른 옷, 교회 일을 도우며 남긴 여러 공책과 메모들, 핸드백 몇 개, 별 볼일 없는 악세서리와 화장품, 그리고 아끼던 필통 정도의 수준이었다. 처음 취직하고 드렸던 그 용돈이 가장 눈에 띄었다. 분명 그 보따리 안에 넣어두고 잊어버리셨겠지만, 그 돈을 어디 계좌에 입금하시지도, 쓰시지도 않고 남겨놓은 그 마음이 차마 헤아려지지가 않아 눈물이 참기가 힘들었다.


아들인 게 원망스러웠다. 딸이라면 그 옷들을 입고, 핸드백들을 메고 다닐 수 있었을 거다. 팔찌도 하고, 안경도 끼고, 화장도 비슷하게 하고, 향수도 뿌리고. 어떤 초라하고 볼품 없는 방식으로나마 당신의 유산을 이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라서 그 방법조차 모르겠으니. 다들 조언이랍시고 말해주는, 어머니가 원했을 삶을 살아라, 어머니는 너를 자랑스러워 했을 것이다, 이런 말들은 부족하다고 느껴졌다. 더 이상 살아있지도 않는데, 내가 당신이 뭘 원했을 지나, 뭘 자랑스러워 했을 지를 감히 어떻게 제대로 알고 행동을 할 수 있을까. 당신을 이어가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막막하니 오히려 의미 없는 것들에 집착하게 되었다. 설거지나 제대로 하고, 옷이나 제대로 다려서 입고, 전에 했던 카톡들을 다시 한 번 읽어보는 수준의 그런 소소한 재회. 그리고 쏟아진 커피 자국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지나가는 일이 루틴이 되었다.


예견된 죽음이 나은지, 예견되지 않은 죽음이 나은지 아직 결론은 서지 않았으나, 현재까지는 예견되지 않은 죽음이 조금은 더 견디기 힘든 것 같다. 드리고 싶은 말이 참 많고, 후회되는 일들도 많고, 보다 덜 외롭게 함께 시간을 많이 보냈어야 했고 쓰러지시는 그 순간에도 옆에 있었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기에 자책할 수밖에 없고 앞으로도 자책할 예정이다. 역설적이게도 살아 돌아오셨어도, 의식이 깨어나셨어도 그런 순간들은 채 몇 년이 가지 않았을 것이고, 어느덧 또 인생에 이리저리 치여 하루하루를 버티다 보면 – 그리고 또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나도 부모가 되어보고 나면 – 어머니는 또 뒤에서 남아 응원하고 계셨을 것이다. 아쉬운 건 그 공감을 못 해드려 그 마음을 살아계실 때 감사하다고 제대로 표현 못한 것이 아닌 가 싶다. 추운 크리스마스날 유난히 그 뒤가 허전해 가슴이 먹먹해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니 싶어 짧은 글로라도 추모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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