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근교로 바람을 쐬러 나갔다 허물어져 가는 산소를 만났다. 이끌리듯 다가가 손을 뻗어 마른 풀을 쓰다듬고 흘러내리는 흙을 매만졌다. 손금 사이로 먼지가 끼고 봉분에서는 오래 버려진 시간의 냄새가 풍겼다.
왕릉도 대단한 인물의 무덤도 아니었지만 한참이나 주변을 맴돌았다.
‘무덤’, 언젠가 한 번은 꼭 다뤄보고 싶었던 주제였다. 산문이나 소설이어도 좋고 아트 콜라보의 오브제로도 괜찮을 것 같았다. 누군가에게는 죽음의 이미지로, 지인에게는 죽은 이에 대한 기억으로, 당사자에게는 삶의 흔적으로 남겨질 것이다. 관점에 따라서는 미래를 향해 날아가는 과거에 쏜 화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과녁 끝에는 과연 뭐가 있을까?
Life 시뮬레이터
죽은 이의 집이자
산자들이 가야할 곳, 무덤
자리를 뜨기 전 한 번 더 봉분을 쓰다듬었다. 낯설면서도 차분해지는 그 느낌이 싫지 않았다.
왤까? 삶의 황폐한 결말이 맘에 드는 건지 모르겠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든 생명이 종국에는 죽는다는 결말.
영화 멜랑코리아에서 우울증을 앓던 여주인공이 보인 심리(전 인류를 멸망시킬 수 있는 혜성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주인공의 마음은 차분해진다)와 비슷한 것일까? 나에게만이 아닌 전 인류에게 선고된 ‘죽음’이라는 결말이 주는 불길한 따스함.
이런 마음은 사악함과 연약함에서 비롯된 것일까? 내가 먼저 죽더라도 남은 존재들도 결국엔 죽는다는 사실,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고약한 위안. 글쎄, 그런 마음이 아예 없지는 않겠지만 타인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는 내 자신을 들여다보면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열정 혹은 부질없음, 성실 혹은 권태. 빛나는 순간 그리고 영원한 침묵
끝내는 소멸되고 마는 아지랑이 같은 현실과의 단호한 이별이 주는 쾌감
매일같이 무덤을 떠올리며 살 수는 없다. 내 안의 욕망이 그렇게 내버려두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도 때때로 그리워질 것이다. 한낮의 더위 아래 펼쳐진 죽은 자의 흔적, 그 풍경을 보고 있으니 드라이브를 나서게 만들었던 두통이 한결 가라앉는 것 같았다.
파주에서 일산으로 이어지는 강변도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세상이 온통 노오랗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