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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dioholic May 07. 2024

우울해하지 말아요

라디오가 있잖아요

치과에 다닌 지 한 달이 훌쩍 넘었다. 한 번 가기도 싫은 곳을 매주 가야 한다는 것도 싫지만, 더 한숨이 나는 건 다닌 만큼의 시간만큼을 앞으로 더 가야 한다는 것. 스케일링하러 가야지... 가야지... 가야... 하다가 3년을 미룬 결과는 결국 신경치료라는 대가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 글 보시는 분들은 내일이라도 꼭 스케일링받으러 가실 것을 강력히 추천드린다.


퇴근을 하고 홍대입구역의 북적이는 인파를 뚫고 도착한 치과의 문을 여는 게 사실 가장 힘든 순간이다. 그 후로는 '고생이 많다' 는 표정으로 날 맞이해 주시는 접수데스크 직원분의 안내와, 그날 받을 치료에 대한 간호사분의 단호하고도 친절한 브리핑을 들으며 뭔가 홀린 듯 진료 의자에 눕게 되니까. 그리고 치과라는 단어가 주는 공포에서 날 지켜주는 건 진료실을 나지막하게 채워주는 '배미향의 저녁 스케치' 다.


진료 의자에 누워 의사 선생님을 기다리며, 마취주사를 맞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위이잉캬캬캭 하는 굉음을 내며 내 어금니를 헤집는 기계 소리에 살짝 몸서리를 치면서 듣는 배미향 님 특유의 초저음 음성과 올드팝은 정말 크나큰 위안이 된다. 영화 '쇼생크탈출' 에서 주인공 앤디가 틀어주는 '저녁바람이 부드럽게' 를 듣는 죄수들의 심정이 그런 것일까. 치아가 차가운 기계에 갈리고 헤집어지는 다소 처참한 순간에도 라디오는 나를 고통 없는 다른 세상으로 데려다준다. 참으로 믿기지 않게도.


그동안 병원이라곤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삶을 살다가, 작년부터 부쩍 병원에 다닐 일이 잦아지면서 많이 의기소침해지고 우울해진 게 사실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며 막상 중년으로서의 으레 겪게 되는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탓이다. 성숙해진다는 것은 퇴행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변화로 받아들이며, 자연스럽게 나이 들어가는 연습을 할 줄 아는 게 아닐까. 그런 울적한 순간이 올 때마다 라디오 속 사연들과 위로의 목소리들이 정말 많은 힘이 되었다. 같이 나이 들어가는 동년배들과, 나보다 먼저 그 길을 걸어간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주는 위안은 생각보다 큰 것이었다. TV나 다른 매체들이 주지 못하는 투박한 온기의 힘이랄까.


듣는다는 것만으로도 치유가 된다는 건 정말 큰 행운이 아닐까




그토록 되고 싶었던 라디오 PD는 끝내 되지 못했지만, 라디오를 통해 위안을 받는 삶을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주말 아침에 커피를 내리며 한 주 동안 마음에 덕지덕지 낀 때를 씻어내는 치유의 시간과, 터덜터덜 걸으며 하루동안 날 괴롭힌 것들을 털어내는 퇴근길의 정화의 시간, 그리고 병원에서의 불안과 공포를 잊게 해주는 망각의 시간을 가능케 해주는 게 나에겐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과 DJ들의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힐링을 위해 돈과 노력을 들일 것 이렇게 소리만으로 회복될 수 있는 삶. 좋지 않나?


내 브런치 아이디처럼... 난 아마 평생 라디오 중독자로 살겠지. 라디오 키즈였던 날 라디오 홀릭으로 만들어줬던 승환옹의 이 노래를 간만에 들어봐야겠다.


https://youtu.be/yNRNiXNUQhE?si=wRZOk-g7wQpUkX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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