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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봉 Jul 25. 2021

완공! 지하실 아지트

다시 한번 단독주택에 진심입니다

작은 일 하나가 큰 변화를 몰고 오곤 합니다. 최근 제가 겪은 것도 그런 일의 연속이었어요.

저는 요즘 영화 <기생충>의 아저씨처럼 지하실에 박혀 살고 있습니다. 스스로 지하생활자가 되었다는 것이 그 아저씨와는 좀 다르긴 하지만 아무튼 집에 있는 시간 대부분을 지하에서 보냅니다. 단독주택으로 이사 온 후부터 꾸미고 싶었던 '나만의 아지트'가 드디어 완성되었거든요.


시작은 대학 선배로부터 입니다. 어느 날 선배에게 전화가 왔어요. 자기는 더 이상 LP를 안 듣는다며 필요하면 LP와 CD를 주겠다고 하더군요. 이 형은 학창 시절 롹 음악 마니아였어요.


"아니 요즘 LP가 얼마나 핫한데?"

"나는 이제 파일로만 음악을 듣기로 했어. CD도 필요하면 가져다줄게."

"집 앞 배송까지?"

"그런데 너 와이프한테 쓰레기 들였다고 혼나는 거 아니냐?"

"괜찮아 형. 나에겐 지하실이 있잖아."  


저도 나름 직업으로 음악을 꽤나 들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의식적으로 발을 들여놓지 않은 영역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LP의 광활한 세계죠. LP와 오디오에 빠지면 집도 절도 날리는 지름길이거든요. 하지만 그냥 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저에게는 보물 반 쓰레기 반인 지하실이 있는걸요.  


형은 LP 뿐만 아니라 앰프와 CDP도 가져왔더군요. 자신은 안 들은 지 10년도 넘었다며, 정들었을 물건들을 쿨하게 내놓았습니다. 아마도 제가 쓴 책 <단독주택에 진심입니다>를 읽고 저희 집 지하에 자신의 추억을 묻고 싶은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무튼.


형의 음반 리스트를 보니 롹 음악을 들은 전형적인 코스였어요. 비틀즈나 레드 제플린 같은 음악부터 시작해 하드코어 메탈에 경도되었다가 아트롹 같은 음반들로 영역을 넓힌 것이 시대별로 보이더군요. 그중에 제 취향은 레너드 코헨이나 수잔 베가 라이쳐스 브라더스 같은 팝적인 넘버들이에요. LP로 들어보고 싶더군요.



그때부터 지하 음악감상실 작업이 착착 진행되었어요. 대구에 사는 분께 중고로 턴테이블을 구입하고 '단독주택엔 톨보이 스피커지'라는 말에 혹해 지인에게서 중고 스피커를 샀습니다. 그리고 지하에서 굴러다니던 것들을 이것저것 조합해보니 그럴싸한 모양이 잡히더군요. 제가 생각해도 그 활용이 신기할 정도로 쓸모없이 굴러다니던 쓰레기들이 바로 이 순간을 위해 구박을 견뎠구나 싶을 정도였어요. 타조털 먼지떨이를 사고 현관 방충망을 하고 몇 달 동안 돌리지 않던 진공청소기를 돌렸습니다. 청소가 이렇게 신나는 일이 던가요.


그리고 지하 공간 어디에서 음악을 들으면 좋을까, 이리저리 스피커를 옮겨 다니다 결국 팟캐스트를 하려다 멈춘 방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 방에도 쓰레기가 반이었는데 정확한 용도가 생기니 잡동사니가 다시 제 역할을 하더군요. 케토톱을 붙이자 벌떡 일어서는 노인처럼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물건들이 음악감상실을 위해 춤을 추는 것처럼 되살아 났습니다. 밖은 이렇게 폭염인데 에어컨도 없는 지하실은 왜이리도 시원한지 참 놀라운 일입니다.


그리고 이틀 휴가를 내고 오늘까지 나흘 동안 지하에 처박혀 음악을 듣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내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그렇게 좋아? 맥주 냉장고만 있으면 아주 끝내주겠네."

 

지하실에만 처박혀 있다고 구박하기 시작한 아내는 또 어떻게 그런 기막힌 생각을 했을까 싶습니다. 본인이 맥주를 좋아해서겠지만 아무튼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모은 CD를 팔아서 미니 냉장고도 사고 아지트에 필요한 물건들을 채우자. 아지트에 아저씨들을 모으자. 차마 버리지 못하는 낭만을 채우자. 그들의 리스트를 만들어 사람들과 공유하자. 과연 그렇게 저의 아지트가 나아갈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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