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 사람들 1 세탁소
"주소 불러줘 봐."
"인천 동구… 1층."
"주택 살아?"
주택으로 이사를 하고 한동안 주소를 쓰는 게 어색했다. 'oo아파트 o동 o호' 이렇게 늘 쓰다가 '1층'으로 끝을 맺으려니 뭔가 덜 쓴 것 같은 느낌이랄까. '1층'도 사실 쓰지 않아도 되는데, 너무 주소가 짧고 어색하여 일부러 쓰는 것이다.
oo 아파트처럼 우리 집도 따로 이름은 있다. 우리 집을 맡은 건축사 사무실에서는 공사가 끝나면 집마다 이름을 지어주는데 , 처음 우리 집 이름은 '문턱 없는 집'이었다. 건축사들과 상담할 때 지하공간 활용을 두고 '누구나 문턱 없이 이용할 수 있는 아지트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내 말을 듣고 붙인 것이다. 그래서 담도 헐고 담장이 없는 집으로 만들려 했었다. 하지만 공사를 하던 중 건축사분들께 낮더라도 담장이 있어야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문턱이 없으니 사람들이 모르고 집에 들어올 수도 있겠다는 의견이었다. 담을 없애는 대신 메탈리스 망으로 낮은 노출형 담을 만들자는 건축사들의 의견을 따랐다. 그래서 다시 '문턱 있는 집'이 되었다. 준공이 나고 입주를 하면 사무소에서 집에 현판을 달아주는데 집 이름이 고민이었다. 다시 문턱도 생겼고 '문턱 없다'는 그 말 자체도 아내는 부담스럽다 하여 고심 끝에 '오붓'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오붓하게 살자는 아내의 뜻이었다.
그러고 보니 옛날에는 집마다 명패가 있었고 집집마다 별칭 같은 것들도 있었다. '이발소 옆집'이나 '쌀가게 집', '수돗가 뒷집', '파란 대문 집', '큰 나무집' 등등. 생긴 것이 다 다르듯 이름도 달랐다. 아파트에서만 살다 보니 이런 기억들도 모두 잊고 버리고 말았다.
집 이름은 '오붓'으로 정했지만 아무도 그렇게 부르는지는 않았다. 정작 우리 집은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는데 세탁소에 가서야 그 이름을 알게 되었다. 이사하고 얼마 후 드라이클리닝을 맡기러 동네 세탁소에 갔다. 아마도 이 동네 인플루엔서로 보이는 세탁소 아주머니께서 우리를 반갑게 맞으셨다.
"새로 이사 왔죠? 학교 앞 이층 집이죠?"
"네. 어떻게 아셨어요?"
"우리야 뭐 여기 오래 살았으니까. 새로 오는 사람 척 보면 다 알지. 집 이쁘게 고쳤던데?"
"아…네.'
"어디서 했어요? 우리 집도 좀 고치게."
그때부터 이어지는 인플루엔서 특유의 친화력과 붙임성에 나도 모르게 그새 아주머니를 팔로우하고 하트까지 여러 번 누를 뻔했다. 아주머니는 처음 보는 사람의 직업과 나이, 고향, 가족관계 그리고 취향까지 모두 술술 불게 만드는 놀라운 말솜씨를 갖고 계셨다. 나도 마냥 서서 취조를 당하는 게 싫지 않았던 것이, 은은한 비취색 타일 때문에 유니크하게 보인던 세탁소 건물 내부는 더 유니크했기 때문이었다. 구조도 특이해서 천장이 높고 깊었다. 그 높은 천장에 옷들이 대롱대롱 걸려있었다. 게다가 아마도 족히 50년은 돼 보이는 재봉틀과 갖가지 집기들이 내 눈을 사로잡고 있었다.
"네? 뭐라고 하셨죠?"
"이거 전부 드라이할 거냐고?"
"네. 그런데 이 재봉틀은 얼마나 된 거예요?"
"몰라요. 아마 백 년은 됐을 걸. 발로 이렇게 밟는 데는 아마 우리 집 밖에 없을 거야. 그래도 이렇게 잘 들어."
세탁소는 적어도 영업을 시작한 지 50년은 되어 보이는 구멍가게와 마주 보고 있었는데, 그 구멍가게 대각선에 있는 중국집도 50년은 넘었다고 들었다. 얼마 전 허영만 선생이 다녀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나마 40년 된 세탁소가 가장 최근에 생긴 거였다. 그러니 이제 이사 온 우리는 당연히 어디 사는 누굴지 동네 사람들 모두가 알만 했다.
"그런데 여기 이렇게 쓰여 있는 건 맡긴 사람들 이름인가요?"
"응. 그렇지. 이건 저기 도깨비, 이건 저기 헌책방, 이건 미장원…."
"과학수사는… 문방구예요?"
"아, 그건 여기 옛날 동부서에서 과학 수사하던 양반인데, 딴 데로 이사를 갔는데도 우리 집에 맡기러 와. 우리가 워낙 잘하니까. 하하."
"과학수사대 경찰요?"
아주머니는 당신대로 기억하는 방식이 있었던 것이다. 이름을 알면 이름을 적었고 이름을 모르면 옷을 가져온 사람의 특징이나 집을 적으셨는데, 가만히 옷에 붙여있는 이름들을 보니 웃음이 났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 별명을 다시 만난 기분이었다. 내 초등학교 친구들. 삐툴이, 뚱땡이, 하마, 꺼벙이, 땜빵, 어르신 등등. 누가 봐도 직관적이고 명쾌하고 때론 불쾌한 별명들. 순간 잊었던 친구들의 얼굴들이 스쳐갔다. 구도심에 살다 보니 잊었던 기억들이 동네 여기저기에서 불쑥불쑥 피어올랐다.
"언제 찾으러 올까요?"
"한 삼일 있다가 와요. 최선을 다할게."
"네. 근데 저희 집은 뭐라고 이름 붙이실 거예요?"
"뭘 물어? 당연히 '학교 앞 이층'이지."
동네 슈퍼 인플루엔서가 이름을 정하셨으니, 우리 집은 이제 빼도 박도 못하고 '학교 앞 이층 집'이 되었다.
구도심 주택살이 봉봉 TIP
1. 단골이 되세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제 단골집들을 소개해 드릴게요.
2. 동네 오래된 세탁소에는 사실 기술자들이 많습니다. 예전부터 옷을 만들던 분들 가운데 맞춤복 유행이 사라지자 세탁소로 전환한 분들이 계시거든요. 프랜차이즈 세탁소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것들도 이 분들은 척척 수선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