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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봉 Aug 24. 2020

집문서가 어딨더라?

집의 시간들


"등기권리증이 빠졌네요. 추가로 가져다주셔야 해요."

"그게 뭐죠?"

"네, 아버님. 집문서 아시죠?"

 

나는 '등기권리증'에서 한 번 놀라고 '아버님'에서 한 번 더 놀랐다. 안심전환대출 신청 때문에 은행에 서류를 제출했는데, 빠진 서류가 있다며 전화가 온 것이다. 등기권리증이라 불리는 집문서는 분명 집안 어딘가에 있을 테지만, '아버님'은 도대체 누굴 말하는 건지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런데 집문서가 어딨더라?


나에겐 고질병이 세 개 있다. 만성 허리병과 '후천성 뚜껑 안 닫기 병' 그리고 '물건 못 찾기 병'이다. 나는 내가 둔 물건조차 찾질 못한다. '아버님'이 되어가며 점차 기억력이 쇠퇴하는 이유도 있겠지만, 왜 그런지 사소한 것도 어디에 뒀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당연히 '이건 중요하니 잘 둬야지' 하는 것들은 열이면 열 너무 잘 감춰 둬서 결국 아내에게 찾아달라고 부탁을 해야 한다. 그러니 집문서처럼 중요한 걸 어디에 뒀는지 알 턱이 없다. 결국 아내의 도움을 받아 등기권리증을 찾았다. 참고로 '후천성 뚜껑 안 닫기 병'은 거의 모든 뚜껑들을 반 바퀴만 돌려놓는 희귀한 질병이다. 세 바퀴는 돌려야 꽉 닫히는 병뚜껑을 대충 쓱 얹어 놓거나 아니면 반 바퀴만 돌려놓아 결국 대참사를 부르는 악성 질병이다. 후천성인 이유는 예전엔 안 그랬는데 결혼 후 증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아내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고도 질환이 전혀 호전되질 않는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정말 왜 그런지 나도 모를 일이다.


내 집이 처음이니 등기권리증이란 것도 처음 보았다. 집을 매입하고 고치며 수많은 일들을 겪어서인지 이 문서를 언제 누구에게 받았나 기억이 안 난다. 놀랍게도 등기권리증에는 우리가 계약한 부동산 매매계약서가 들어 있었다. 소유권이전등기신청서가 있고 취득세를 낸 서류들도 있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우리 집'에 살았던 이들의 이름들이 계약서 형태로 모두 담겨 있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집을 판 '너무나 솔직했던' 전 집주인과 그분이 집을 샀을 또 누군가의 이름. 또 그분들의 그분들까지. 타자기로 쓴 계약서부터 자필로 쓴 이름까지 이 집에 살았던 시간의 흔적이 모두 집문서에 고스란히 적혀 있다.  


등기필증 = 등기권리증 = 집문서


그러고 보니 집문서는 이 집을 거쳐간 사람들을 기억하는 저장소인 셈이다. 등기권리증이란 딱딱한 이름에 그 내용은 더 딱딱한 계약서들이 전부지만, 이 문서에는 '집의 시간'이 쌓여 있다. 이 집에서 살았던 많은 이들의 삶과 기억들이 빛바랜 문서 한 귀퉁이에 고요히 앉아 있다. 그리고 이들의 흔적은 우리 집 곳곳 어딘가에도 남아 있을 테다. 누군지도 모를 이들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집의 시간'을 함께 했다는 생각을 하니, 우리도 결국 이 집의 주인은 아니라는 생각에 이른다. 우리 역시 이 집이 내어준 공간과 시간의 일부를 살다 가는 사람일 뿐이지 않은가. 집의 진짜 주인은 무한한 시간이다. 우리는 잠시 집이 내어준 공간 안에서 저마다의 삶을 이렇게 저렇게 고치며 살다 가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유한한 우리 인생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갑자기 인생무상함에 맥이 풀린 '아버님' 같은 생각에 한참 등기권리증을 바라보았다.


최근 <집의 시간들>이란 다큐 영화를 보았다. 재건축으로 집을 떠나야 하는 서울 둔촌주공아파트 주거민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담은 영화였다. 낡은 아파트지만 그 집이 내어준 공간 속에서 저마다의 삶을 살아온 주민들의 이야기. 조금씩 온도차는 있지만 자신들의 삶을 포근히 감싸 주었던 집과 아파트 단지에 대한 애정을 영화는 인터뷰로 풀어놓는다. 그런데 카메라는 이야기하는 사람의 얼굴은 보여주질 않고 계속 집의 이곳저곳을 비춘다. 마치 이사를 가기 전  마지막으로 집을 돌아보며 그 모습을 마음에 새기려는 시선처럼 카메라는 집안의 사물과 집에서 보이는 풍경을 계속 응시한다. 그 시선에 등장하는 공간과 사물에는 그곳에 살던 이들의 체온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아파트 단지에서 들리는 일상의 소리도 영화의 여운을 더 깊게 남긴다. 이곳이 곧 사라질 재개발 아파트라 하니 그 감정은 더 크게 다가온다. 영화가 전하고 싶었던 것은 아마도 우리 삶을 영위했던 집이라는 공간과 그 공간에 머문 사람들의 기억인 듯싶다.


영화의 여운 탓인지 아니면 태어나서 처음 보는 집문서 때문인지 내가 살고 있는 집을 천천히 다시 바라본다. 이 집이 기억하는 사람들. 이곳에서 보냈을 저마다의 기억들. 우리도 이 집이 내어준 공간에서 잠시 유한한 삶을 살다 가는 거겠지. 우리가 이 집의 주인임을 증명해주는 집문서는 역설적이게도 내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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