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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봉 Aug 31. 2020

할머니들의 마켓컬리

우리 동네 사람들 3 채소 아저씨

"아이참, 괜히 좋아했네. 우리 동네는 안 된다네."

"뭐가?"

"샛별 배송이라고 새벽 배송해주는 건데, 우리 동네는 샛별도 안 되고, 쓱도 안 되고. 참."


구도심 주택으로 이사하고 대체로 만족하며 살고 있다. 주차문제, 방범 문제가 해결되니 이제 걱정할 일도 별로 없다. 요즘 같은 코로나 시대에는 공동주택에 살지 않아서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마저 든다. 그런데 한 가지 불편한 게 있으니 바로 택배 배송이다. 주택에 살면 택배를 받아줄 데가 마땅치 않다. 물건 받을 사람이 없는 경우 택배 기사분도 골칫거리다. 그래서 대문에 택배 받는 구멍을 만든 집마저 있다고 한다. 이웃과 관계가 좋은 집은 옆집에 부탁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 집은 담이 없다시피 해서 기사분들이 알아서 대문을 열고 들어와 현관 앞에 택배를 두고 가신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동네는 새벽 배송이 안 되는 지역이라는 아내의 불평이다.


"사람들이 많이 안 살아서 그런가?"

"글쎄. 여기가 시골도 아니고 그래도 도심인데 너무 하네."

"그러면 차라리 채소 아저씨한테 사는 건 어때? 그 아저씨도 마켓컬리 해."

"(눈만 끔뻑끔뻑)"


구도심엔 골목길 마켓컬리가 있다. 트럭을 몰고 채소와 과일을 파는 채소 아저씨. 내가 주문하지 않아도 매일 하루에 두 번 동네를 찾는다. 이른 아침에는 순두부 아저씨가 한 번 지나가고, 오전과 오후 시간 차를 두고 채소 아저씨가 다녀간다. 그 사이 전기제품 수거하는 분이 또 한 번 확성기를 켜고 지나간다. 가끔 생선 파는 트럭도 오고, 고추 철에는 고추 트럭이 오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성실한 건 채소 아저씨이다.


"다마네기 왔어요. 무, 배추, 느타리버섯 왔어유. 사과, 배가 한 상자에 만 원. 싱싱한 알타리 무 왔어유."


아저씨는 그날그날의 품목을 녹음해 확성기로 튼다


작년에 나는 취재를 하며 채소 아저씨의 트럭을 탄 일이 있다. 구도심 골목길 사람들의 일상을 취재하는 음향 시리즈였는데, 누구보다 골목길을 잘 아는 분이 이 채소 아저씨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인천 전도관부터 시작해서 제물포, 송림동, 금곡동, 창영동, 도화동 골목을 아저씨는 40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다녔다고 한다. 그의 트럭을 얻어 타고 구도심 골목길을 돌았다.


"저기 할머니들 보이지? 나 오기만 저렇게 기다린다니께. 하하하"  


채소 아저씨는 그의 오랜 단골들을 만나면 밑도 끝도 없는 농담을 건넨다. 하긴 40년을 다녔다고 하니 그의 고객들은 친구와 다름없다.


"할매, 고구마 사가."

"아이 돈 없어. 먹을 사람도 없고."

"24개월 할부해줄게. 그냥 가져가."  

"일 없어."

"할매 남자 친구 없지? 그러니까 없는겨. 내가 남자 친구 소개해줘?"

"그래, 어디 데리고 와봐라."

"그럼 나 용돈 좀 줘 봐."


할머니들은 뭘 사려고 나온 건지, 아저씨 얼굴을 보러 나온 건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아저씨도 뭘 팔러 온 건지 놀러 온 건지 알 수 없었다. 한참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마치 같은 반 친구들끼리 쓸데 없는 농담 따먹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그나마 조용하던 골목길에 잠시 활력이 돈다.


"느타리버섯 있다고 그러더니 어딨어? 없네?"

"아까 저 집에서 다 사갔슈."

"그게 뭐야. 스피커에 거짓말이나 하고. 왜 그래?"

"이따 갖다 줄게요. 나 참, 필요하면 전화를 하지 그랬어."

"오이도 갖다 줘. 부추도 있으면 가져오고."


채소 아저씨는 이미 40년 전부터 집 앞 배송, 마켓컬리 서비스를 하고 있었다. 주문을 하지 않아도 후미진 골목길까지 잊지 않고 찾아간다. 미리 전화를 하면 집 앞에 배달도 해준다. 배달시킨 사람이 안 나타나면, 이웃집에 맡기든, 대문에 끼워 넣든 어떻게든 주고 간다. 심지어 외상이 일상인 서비스이다. 나중에 물어보니 알아서 다 준다고, 왜 자네가 쓸데없이 걱정하냐고 한다. 당연히 무료 배송. 당일 주문 당일 배송이다. 로켓 배송 저리 가라다.


채소 아저씨의 트럭은 거의 공공 서비스이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을 찾아가고, 마땅한 가게가 없는 골목길 끝까지 배달을 해준다. 물건만 파는 것만이 아니라 외로운 노인들의 말벗도 되어준다. 게다가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던 할머니들의 이성 교제까지 신경 써 준다. 이익을 추구하던 그의 경제 활동은 어느덧 공익의 영역에 들어섰다.


사람들이 떠난 구도심 골목길. 빈집이 많은 곳을 지날 때 아저씨는 확성기 소리를 줄인다. 날이 갈수록 그의 확성기 볼륨은 점점 작아져왔다. 남는 장사가 아닐 것 같은데, 환갑을 넘긴 아저씨는 이 일을 놓지 않았다.


"저기도(전도관) 엄청 많이 팔았어. 재개발하기 전에는. 송림동 사람들 전도관서 우리 집을 다 거쳐가거든. 옛날에는 밤 12시까지 장사를 했어. 5톤 차로 물건 들여오고 그랬거든. 내가 골목길에 나타나면 사람들이 두 줄을 서서 샀따니께. 이제 그만둘 수도 없고, 하던 거는 해야지. 놀 수도 없고."


하루 종일 채소 아저씨를 따라다니다 보니, 그가 이 일을 그만둘 수 없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목소리가 들리면 엉금엉금 골목으로 나오는 할머니들. 골목에서 함께 나이를 먹은 사람들. 그는 골목길 할머니들의 성실한 심부름꾼이자 남자 친구요, 마켓컬리의 원조 사나이였다.


"할매, 내일 또 만나요!"




구도심 주택살이 봉봉 TIP


1. 우리나라 서비스 시스템은 신도시 아파트 위주라는 생각이 들어요. 수지타산이 안 맞기 때문인지 구도심 소비자에 대한 서비스는 매우 열악하단 생각입니다. 도시재생의 방향은 이런 수익성 문제로 민간이 하지 않는 부분을 공공의 영역으로 이끌어내는 것이라 생각해요.


2. 로컬! 로컬리티! 로컬 푸드, 로컬 경제 이런 말들이 많던데, 트럭 아저씨들 네트워크를 만들어 로컬 창업을 하든가 해야지, 이거 원!  


3. 경기도에서는 다음 달부터 '행복마을 관리소'라는 도시재생 사업을 실행한다고 합니다. 아파트 관리사무소 같은 거라고 하네요. 구도심 지역 빈집이나 공공시설, 유휴공간 등에 이를 만들어 여성안심귀가, 홀몸노인 교통지원, 택배 보관, 공구 대여 같은 생활밀착형 공공서비스를 제공한다고 하네요. 이런 사업들이 구도심 모든 동네에 있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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