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구도심 노포
(요즘 코로나19 때문에 식당에 가서 밥 먹기가 꺼려지더군요.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단골집들이 더 생각납니다. 비록 가서 먹진 못하더라도 식당들을 응원하고, 저 자신도 위안하려 이렇게 몇 자 적어 봅니다.)
구도심 단독주택으로 이사해서 좋은 것 세 가지를 꼽자면 비교적 저렴했던 집값과 층간소음에서의 해방 그리고 도처의 맛집들이다. 그동안 내가 사랑한 노포, 단골집 대부분을 이제는 집에서 걸어가 먹을 수 있다는 생각만 해도 흐뭇해진다. 전국의 식도락가들이여 상상해보라. 동네 중국집이 '목란'이고 동네 순댓국집이 '산수갑산'이며 그 옆 콩나물국밥집이 '현대옥'이고 동네 술집이 통영 '다찌집'인 풍경을! 이보다 더한 행복의 파노라마가 있을 수 있겠는가. '스세권', '맥세권'은 이제 옛말, 이제부터는 '노포권'이다. '역세권'과 '학세권'을 잇는 새로운 주거 대안! 삶을 좀 더 명랑하고 활기차게 할 새로운 선택 '노포권..궈언 궈어언 어언~.'
'맛있는 식당이야 먹고 싶을 때 가서 먹으면 될 걸, 굳이 근처에 산다고 좋을 것까지 있나?' 이렇게 생각하는 분이라면 이 글을 거둬들이길 권한다. 마음먹고 차 타고 가서 먹는 것과 아무 때나 내킬 때 걸어가서 먹는 기분은 차원이 다른 일이다. 그것은 마치 내 애인이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지척에 사랑하는 이가 살고 있다는 것. 이른 아침이나 늦은 밤에도 보고 싶을 때면 언제나 애인 집 근처를 서성일 수 있다는 것. 살며시 애인의 창문을 두드릴 수 있다는 것. 동네를 사는 데 그런 두근거림이 있다는 얘기다. 애인을 보기 위해 걸어가는 그 길의 공기가 차로 이동하는 도로와 같을 리 없고, 애인의 옆집이 그냥 주차장이어서 늘 텅 비었으면 하는 바람과 같을 수 없다. 당신의 공간 속에, 당신의 시간 곁에 내가 함께 한다는 그런 못 말릴 애틋함 혹은 쓸데없는 자부심이라고 해야 할까? (풋!)
불행히도 나에겐 사랑하는 단골집들이 너무 많다. 그것이 불행인 이유는 내키는 대로 먹어댔다가는 거지꼴을 면치 못하기 때문이다. 앙큼한 애인처럼 단골집들은 내 배는 불리고 지갑은 털어 간다. 하지만 어쩔 소냐. 그래도 그것이 또한 삶의 기쁨인 것을. 단골집이란 나와 주인이 서로 아는 사이란 뜻이다. 좀 더 친밀한 경우 내 취향을 주인께서 잘 알고 계시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 단골집이 많은 이유는 그만큼 자주 찾기 때문이기도 하고 나를 기억해주시는 주인 분들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기엔 나의 비범한(?) 외모가 도움이 되기도 했다. 한두 번만 가도 나를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셔서,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어?"란 소리를 세 번 만에 듣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는 단골집들은 대부분 노포다. 오래된 동네에 오래된 식당이 살아남은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우리가 살고 있는 구도심에 내가 좋아하는 단골집들이 그토록 많은 이유다. 분식부터 시작해 백반집, 중국집, 해장국집, 대폿집, 돈가스집, 만두집, 고깃집까지 거의 전 장르를 총망라한 유명 식당들이 우리 집 반경 2Km, 걸어서 30분 이내에 있다. 게다가 최근에는 '개항로 프로젝트'라는 일개 그룹이 혜성처럼 등장해, 그동안 올드 타운에서 맛보지 못했던 햄버거, 분짜, 반미, 비건 레스토랑까지 참신하고 명랑한 맛을 더해주고 있다. 이러니 내가 단골이 안되고 어떻게 버틸 수 있단 말인가.
자, 그럼 각설하고 내가 사랑한 단골집들을 하나씩 소개하기로 한다. 아마도 식도락가라면 이미 알고 있을 인천 구도심의 노포들일 테다. 여기에 내 입에 맞는 신흥강자들도 넣기로 한다. 이 전 글 <백만 번의 집들이>에서 소개하고자 했던, 집들이를 대체한 식당들이니 동인천 일대에 올 일이 있다면 눈여겨보시길.
1. 도가니 무침의 명가, 삼강옥
삼강옥은 누가 정했는지 모르겠으나 인천 3대 해장국집 중 하나다. 오래전부터 송림동 해장국과 숭의동 평양옥 그리고 삼강옥 해장국을 맛으로 쳐줬다. (놀랍게도 이 해장국집 모두 우리 집 반경 2km 이내에 있다.) 하지만 저마다 입맛이 다 다를 테니, 뭐가 낫고 높다고 할 수 없다. 다만 내가 이 집을 단골로 삼은 이유는 바로 '도가니 무침' 때문이다. 아, 말만 들어도 군침이 도는 도가니 무침! 잘 삶은 신선한 도가니에 파, 마늘 갖은양념으로 버무린 그 맛.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하고 부드러운 식감이 그야말로 기가 막혀 기어코 술을 부르는 음식. 특히 청주와 궁합은 왜 그렇게 좋은지!
신포동 일대에 가면 유명한 선술집 메뉴로 '스지탕'이란 것이 있다. 나도 한때 안주로 삼았던 메뉴인데, 삼강옥 도가니 무침을 먹고 나서부터 '스지탕'과는 작별을 고했다. 오죽했으면 눈물의 도가니라고 했겠는가. '스지'는 일본어로 힘줄을 말한다. 소 힘줄을 삶고 끓이고 어떻게 해봐야 사실 도가니의 위엄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스지탕을 좋아하지 않던 아내도 삼강옥 도가니 무침만은 사랑하게 되었다. 무침을 먹으면 함께 주는 설렁탕 국물에 국수를 적셔 먹는 그 맛도 일품이다. 괜히 70년 넘은 노포가 아닌 것이다. 개성 출신 시아버지에서 며느리로 지금은 아드님으로 그 맛이 전해졌다. 30분마다 종을 치는 괘종시계도 이 집에서 듣기 좋은 소리다. 늦은 시간까지 영업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제는 가야 할 시간을 '댕'하고 알려준다. 2대 주인인 여사님이 젊은 시절 영화배우와 함께 찍은 사진도 이 집의 명물이다. 삼강옥에 가게 된다면 식당 한편에 걸린 사진 액자를 찾아보라. 보고도 믿기지 않는 이 집만의 진풍경, 여사님과 함께 사진을 찍은 영화 배우는 무려 메릴 스트립이다. 믿습니까? 할렐루야! 내가 그 집의 단골이다. 아멘!
2. 동네 중국집이 된 전설의 용화반점
한때 용화반점에 예약을 하기 위해서 가명을 사용한 적이 있다. "사장님 저 '목도리'인데요, 토요일 다섯 시 4명이요." 언젠가 식사를 하러 갔다가 목도리를 두고 오는 바람에 그런 별명이 붙었다. 찾으러 갈 때마다 바쁘니까 다음에 오라고 하는 바람에 겨우내 목도리를 하질 못했다. 그만큼 사장님은 남자 손님에게는 괴짜처럼 군다. 말길이 좀 통한다 싶으면 곁에 와 핀잔을 주거나 농담을 던진다. 어쩔 땐 밥만 시켜도 잡채를 주거나 탕수육을 줘서 밥만 먹으러 가기가 괜히 미안해지도 하다. 아무튼 용화반점이 동네 중국집이 되어서 너무 기쁜 나머지 사장님과 집들이를 하려다 그러질 못했다. 양장피를 들고 오신다고 했었는데, 요즘 통 가질 못해서 죄송한 마음이다.
용화가 동네 중국집이 되었지만 여전히 대기줄은 서야 한다. 단골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맛이 있으니 이 집의 시그니처, 불향 가득한 고추짬뽕밥이다. 조금 진하다 싶을 만큼 걸쭉한 육수에 볶음밥이 말아서 나온다. 그 위에 튀긴 달걀프라이를 얹혀 완성! 인천에서 짬뽕밥을 잘하는 곳이다 싶으면 국물에 볶음밥이 따로 나오는 곳이 많다. 밥도 그냥 밥이 아니라 기름기 없이 계란과 함께 볶은밥이다. 국물에 말아먹거나 따로 적셔 먹는 재미가 있다. 하지만 용화반점은 과감하게도 밥을 고두밥처럼 볶아서 국물에 그대로 말아 준다. 국물에 담긴 그 식감이 나쁘지 않다. 다만 좀 기름지다는 게 문제지만 이 독특한 맛에 한번 빠지면 나처럼 단골이 될 수밖에 없다. 용돈을 받은 날이라면 팔보채와 볶음밥도 권한다. 팔보채에 고량주를 반주로 먹고, 남은 양념 국물에 볶음밥을 적셔 먹으면 그야말로 '띵호와'다. 심지어 용화반점은 아까 말한 삼강옥에서 걸어서 3분 거리에 있다. 마성의 경동 골목길 코스다.
3. 아, 신포동! 신포동집
배다리를 벗어나 보자. 발길을 어디로 옮길까. 물으나 마나 답은 신포동이다. 우리 집 위치가 먹부림 하기 좋다고 말한 건 신포동까지 걸어서 오가는 '싸리재' 길이 있기 때문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길을 걸어가 적당한 취기로 걸어오기 딱 좋을 그런 거리감이라고 해야 할까. 집에서 산책과 요기를 동시에 할 수 있는 그런 적당한 위치에 신포동이 있다. 최근에는 이 컴컴한 싸리재 길을 '개항로'라고 부르는 프로젝트 그룹이 등장했는데, 이들 덕분에 거리가 한층 밝아졌다. 그중에서도 단연 우리 입을 사로잡은 '메콩사롱'은 다음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지금은 대청도 특산품의 향연, 신포동집에 가보자.
신포동은 주당들의 천국이다. 서울로 치면 종로와 명동을 한 데로 합쳐 놓은 곳이다. 오래된 전통의 강호들이 즐비한데 (구)금강제화 앞 마냥집, 염염집, 뽀빠이 라인이 그중에서도 막강하다. 그런데 그 라인에 새로 끼어들어 이 노포들을 평정한 곳이 있으니 바로 '신포동집'이다. 이름만 보면 신포동 터줏대감으로 보이나 실은 그렇지는 않다. 앞서 말한 집들이 노포라면 이 집은 신생아 격이다. 신포동집은 대청도 출신의 정감 있는 아주머니가 해산물 위주의 안주를 내주는 대폿집이다. 대청도가 어디냐면 그 유명한 서해 5도 중 하나로 백령도 옆이다. 대청, 소청의 해산물이 유명하다. 흑산도 홍어와 맞먹을 정도로 홍어가 많이 잡히고 우럭, 꽃게, 섭, 가리비 등 자연산 해산물이 풍성한 곳이다. 이런 신선한 재료에 최고의 조미료인 까나리 액젓으로 음식을 만드니 어지간하면 다 맛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중에서도 이 집의 마스터피스는 우럭 젓국이다. 우럭젓국은 서해안 음식으로 꾸덕꾸덕 말린 우럭을 무와 파 그리고 새우젓만 넣고 끓인 탕이다. 생각이 전혀 없다가도 살짝 비릿한 그 국물 맛을 보면 애주가도 아닌데 술을 마실 수밖에 없다.
나는 이 집의 단골이라 행복하다. 단골만이 누리는 특권이 있기 때문이다. 업무에 지친 오후 시간. 딩동! '오늘 섭 들어왔어요. 드시러 오세요.', 딩동! '오늘 자연산 가리비, 우럭 들어옵니다.', 딩동! '오늘 복날이라 전복죽 했어요.' 때때로 들어오는 카톡 문자를 보기만 해도 피로가 가실 정도다. 신포동 대폿집들을 평정한 이유, 고객관리. 제 아무리 오래된 노포라도 그 맛이 전수되지 않거나, 고객관리 안 하면 끝이라는 걸 대청도 아주머니가 몸소 보여주셨다. 딩동!
구도심 주택살이 봉봉 TIP
1. '노포권'을 주장합니다. 덩실덩실 춤을 추며 단골집으로 걸어갈 생각을 하면, '산다는 게 뭐 있나? 좋아하는 이들과 맛있는 걸 같이 먹으면 그게 행복이지'라는 생각이 특히나 많이 드는 시절입니다.
2. 맛은 인테리어와 비례한다고 생각해요. 멋진 인테리어를 말하는 게 아니라, 아무리 허름하다고 해도 그 나름의 철학이 있는 인테리어 말이죠. 맛을 내는 사람은 나름의 멋도 내려고 노력하는 것 같아요. 맛과 멋이 어우러지 곳을 좋아합니다. 반면 유니크한 인테리어 때문에 들어갔다가 폭망한 경우도 많습니다.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