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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봉 Mar 31. 2021

지금 어디에 살고 계십니까?

오디오북 체험

#1 
요즘 걸어서 출퇴근을 합니다. 고질병인 요통 때문이기도 하고 회사 주차장이 늘 만원인 이유도 있어요. 40분 정도 되는 거리를 걸으며 보통 음악을 듣는데 요즘은 오디오북 듣는 재미를 들였습니다. '책을 듣는다는 행위가 무슨 독서인가'라고 그동안 생각해왔는데, 글을 읽는 것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더군요. 


#2
누군가의 육성을 통해 나온 글에는 온기가 있습니다. 사람의 목소리에 체온이 있기 때문이죠. 활자에 체온을 더한 오디오북은 그래서 책을 읽는 행위보다 더 감성적이고 감각적인, 일종의 체험이더군요. 그게 장점이기도 하고 반대로 단점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3
정이 별로 가지 않던 오디오북에 요즘 발길이 자주 가는 것은 김영하 작가 때문입니다. 그가 읽은 단편 소설 <오후 5시, 한강은 불꽃놀이 중>(조수경 저) 역할이 컸어요. 글을 기술적으로 잘 읽는 사람은 아니지만 김영하 작가의 낭독은 이 소설의 문체와 잘 맞아떨어지게 들리더군요. 담백한 낭독은 소설 속 화자에 대한 깊은 공감으로 들렸습니다. 마치 글쓴이에 이입되어 사연을 읽어주는 발군의 라디오 DJ들이 그런 것처럼 말이죠.



#4

소설의 내용은 이래요. 회사 사장의 마땅찮은 심부름으로 중고나라에서 호텔 식사권을 구매하려는 의진은 사기를 당합니다. (서울에 아파트를 갖고 있는) 남자친구와의 미적지근한 관계를 결혼으로 돌파하고 싶었던 의진에게도 이 식사권이 필요했습니다. 돈은 곧 돌려받게 되지만 의진은 사기를 친 여자가 발신한 주소를 우연스럽게 혹은 운명적으로 찾아가게 되죠. 발신지는 재개발을 앞두고 폐허로 변한 서울의 어느 외진 동네. 이 여자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갭 투자를 통해 자신도 언젠가는 한강 조망 아파트를 갖는 게 꿈이었던 의진은 오후 5시 한강변을 차로 달리며 미묘한 기분에 빠져들게 됩니다. 


#5

이 단편 소설이 실린 책 제목은 [시티 픽션, 지금 어디에 살고 계십니까?]입니다.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에 대한 욕망과 원하는 걸 중고나라에서 사야 하는 현실과의 괴리. 갭투자 비법을 전수받아 계급을 상승시키고 싶은 마음과 자신에게 사기를 칠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여성에게서 느껴지는 미묘한 동질감. 그렇게 간신히 일상을 버티고 있는 의진의 태도와 목소리가, 묘하게도 김영하 작가의 낭독에 담겨 있었습니다. 그가 일류 연기자처럼 책을 연기하지도 않는데 말이죠. 아마도 소설에 대한 이해와 통찰이 있었기 때문으로 느껴집니다. 


#6

책을 잘 듣기 위해 조용한 길을 찾아 걷습니다. 돌아가더라도 골목이나 남의 아파트 단지 안길을 걷게 되는 이유입니다. 어떤 골목은 삭막해 걷기가 꺼려지기도 하고 또 어떤 곳은 봄을 맞아 나름 단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의진이 보고 싶지 않아던 동네와 살고 싶었던 동네. 그런 곳들 중 가장 낮고 고요한 길로 걷고 또 걷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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