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좋아
숫자만 나오면 사고가 멈추는 느낌이야. 오빠는 공대니까 숫자 편하지? 꼭 그럴 필요도 이유도 없을 텐데, 그놈의 숫자만 들으면 생각도 느낌도 멈춘다니까. 이불값이 할인이 얼마고, 이걸 사은 쿠폰으로 바꾸면 얼마고, 안 바꾸면 얼마고, 나는 도무지 하나도 모르겠더라고. 결론은 우리가 저 이불을 싸게 살 수 있었단 얘기지? 진짜 그런 건지, 원. 비싸도 샀어야 했어. 나야 니들 쓰고 남은 거 쓰면 되지, 어머니가 그러시더라고. 뭐라고? 나? 빵 먹을 거냐고? 응, 나 빵 먹고 싶어. 커피도 마시고. 저번처럼 연어하고 아보카도 들어간 브런치 먹어도 돼? 아침에 어머님 해 주신 미역국에 콩나물 하고 애호박 부침 먹고 나오긴 했지만, 오랜만에 밖에 같이 나왔으니까. 거참, 다시 봐도 비싸네. 포인트도 있고 통신사 할인도 있는데 괜찮겠지? 2층에 자리 있는지부터 봐야 한다고? 같이 봐. 아님, 얼른 나가게. 위드 코로나라고 칸막이해놓고 거리두기 안 하나 봐. 자리가 많다. 달달 한 거 먹고 싶다고? 오빠 좋아하는 거? 음, 시나몬 설탕 묻힌 패스트리? 그래 나도 좋아. 근데, 이것도 맛있는데, 마스카포네 크림 든 크루아상. 그래, 완전 살찌는 거. 괜찮다고? 오늘 많이 걷자고? 그래 좋아. 번호표 자리에 놓고 기다리면 나온대. 잠깐, 오빠, 포크랑 가지러 갈 때 마스크 써야 해. 내가 갈게. 냅킨 내가 가져올게. 물티슈도 있어. 끙, 아이고 허리야. 자, 여기. 나 먹어보라고? 이거 나 먹으라고 잘라 논 거구나. 오빠도 먹어봐. 어느 게 더 맛있어? 오빠가 고른 게 더 맛있네. 마스카포네는 아니네. 아까 미용실에 매일경제 신문이 꽂혀 있더라고. 오빠 머리 자를 때 기다리면서 읽었어. 그러고 보니 머리 자른 거 찬찬히 안 봤네. 너무 많이 자른 거 아냐? 금방 자란다고? 아니, 머리숱이 너무 없어 보일까 봐. 아직 괜찮다고? 다른 아저씨들보단 젊어 보인다고? 그래 좋아. 맞아, 말라서 걱정이지, 배가 많이 안 나와서 좋아 보여. 내 배는 찔러보지 마. 그만. 보지도 마, 진짜. 아까 말이야, 차에서 말한 거, ‘요소수’에 대한 기사가 있더라. 맞아. 우리 경유차 폐차하길 잘했지. 그런데 트럭 같은 거, 디젤이 많지 않아? 경운기도 디젤이고. 하긴 외제차 껍데기에 경유차인 경우도 많던데. 매일경제엔 ‘요소수 넘어 요소비료 대란’이라고 기사가 났더라고. 그래, 뜬금없이 기후 회의가 있었다는 게 생각나고, 기후 위기 하니까 전에 먹거리에 대한 어느 신부님 출장 강론도 생각나고. 먹는 건 최대한 자급자족할 수 있어야 한단 내용이었거든. 여기저기서, 특히 중국에서 수입들을 하는데 기후가 급변하면 농사 못 짓고, 그러면 아무리 중국인들 자기들 먹을 게 없는데 수출 안 하고, 그럼 먹을 게 없어진다고 하더라고. 나는 어머님이 엄청 큰일을 하신 거다, 그런 생각을 했거든. 공터에 어떻게든 상추, 당근, 호박, 오이, 고추, 깨를 기르셨으니까. 그러니까, 우리도 지금 아파트 말고 단독으로 이사 가서 어머니처럼 많이 짓는 거 말고 조금씩 우리 먹을 것만 지을 텃밭 있는 그런 집으로 가서 살아야겠다, 그런 생각을 했어. 할 줄도 모르면서 그런다고? 오빠 믿고 그러는 거지. 우리, 지방에서 커피집을 할까? 오빠가 바리스타 하는 거 배워봐. 북카페가 아니라 책 대여해 주는 도서관 같은 커피집을 하는 거지. 서점 말고. 단독집에 오빠 작업실도 하나 만들고. 지난번 캠핑 테이블이랑 만들었듯이 이거 저거 만들고, 맞아, 자전거 수리도 해주는 할아버지 어때? 할 일이 뭐가 그리 많냐고? 아니, 놀다 시간 남으면 쉬엄쉬엄하는 거지. 아직은 바쁘지. 그러게 말야! 오빠 사진 안 찍은 지 오래됐지. 그때 월급 제대로 못 받는 바람에 카메라도 다 팔고. 하나 남았다고? 필름도 있다고? 지난번에 현상하는 거 다 버려버렸던 것 같은데. 이참에 디카를 사. 아니 왜 싫어? 필름이 나오기는 해? 그래, 좋았지. 생각난 김에 어떡하든 찍어봐. 자꾸 잊어버리는 게 많으니까 남는 건 기록밖에 없는 것 같아. 우리 보려고 그러는 거지. 뭐, 남들도 봐줄 만하다 그러면, 뭘 하나 만들어봐도 되고. 일흔 살까지 일할 거라고? 오빠가 그렇게 할 거라면, 그러고 싶다면, 할 수 있겠지. 행인지, 불행인지, 우리나라 출산율이 1명이 안 된다잖아. 그래 좋아. 우린 일하는 게 노후 대책이니까. 프랑스에서는 정부에서 정년 연장하자 그런다고 막 데모하고 그런다던데. 어떤 게 더 복지인지 모르겠어. 우린 몇 살까지 살게 될까? 사는 거 힘들어. 힘들어 죽겠어. 하하, 죽겠다 말 안 해도 생각보다 빨리 갈 테니 그런 말 넣어두라고? 너무 맞는 말이네. 재밌어. 응? 경도인지장애. 그것도 확정 진단 범위 살짝 밖이라 그 연령대 분들 평균보다도 위인데 엄마가 좀 걱정이 많잖아. 우리 힘들게 할까 봐 미리 조심하려고 검사하신 거래. 의사 선생님 화법 있잖아. 그저 수치만 이야기했을 뿐인데 엄마가 생각이 많으셨나 보더라고. 날 닮아서. 자꾸 자기는 들어도 모르겠다고, 네가 잘 들어둬, 막 그러시는데, 나도 겁이 살짝 나더라니까. 어머니 이 하나 혼자 가서 하고 오신 거 알아? 치과 가신다기에 혼자 가셔도 되냐고 그랬더니, 놔둬라, 얘, 그러고 훌쩍 다녀오시더라고. 엄마랑 어머니랑 성격을 반반 섞으면 참 좋을 텐데. 엄마가 날 닮아서 혼자 있는 걸 더 좋아하잖아. 응? 그렇지. 엄마가 날 닮은 게 아니고 내가 엄마 닮은 거지. 맞아. 재밌는 말을 들었어. 치매 유전자라는 게 있다네. 엄마 혈액검사 결과도 뇌 MRI도 아무 이상 없다는데 치매 유전자가 있다는 거야. 그러면서 가족병력을 물어보는데 백지인 거지. 외할머니, 아흔 넘으셔서까지 교회 성경 공부도 하시고, 요리도 잘하시고, 말씀도 또랑또랑하고 하신 거 돌아가시기 전 잠깐 봤잖아. 그거 한 가지 사실만으로 너무나 안심이 되더라. 재밌는 게 얼마 전 거기,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께서 치매가 있으셨고 혼자되신 그분 있잖아, 살아계신 외할머니도 지금 치매시라는 거야. 유전자가 환경에 따라 바뀌는 건 아니지? 그래도 건강하게 비교적 오래들 사신 편이긴 하다. 아무려면 어때 그래, 뭐 좋아. 아보카도랑 연어 나왔다. 여긴 케이퍼가 같이 안 나오네. 빵이 잘 안 잘려. 오빠 먼저 먹어. 이거 나 주는 거야? 그래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