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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디 Jul 24. 2023

초콜릿을 먹지 못한 건 사랑이야

나는 너를 사랑해

벌써 설 선물세트가 서 있네. 전쟁이라도 치르려나 일사불란한 모습이 결연하다. 돌아 들어가니 초콜릿이 포탄처럼 쌓였다. 젊은 사람들은 세뱃돈을 받아 초콜릿을 살 것이다. 체온 체크를 하고 손 세정제를 바르고 카트 대신 가지고 간 장바구니에 오리고기도 담고 콜라비도 담고 간장, 식초, 식용유를 담아 전투적으로 걸어 나가다가 나도 모르게 덜컥 초콜릿 하나를 집어 들었다. 

    “윽!”

 엉겁결에 왼손으로 옮긴 장바구니 무게를 견디지 못한 팔뚝이 비틀린 것처럼 아프면서 힘이 풀렸다. 그렇지, 나는 지금 초콜릿을 먹을 수 없다. 한 잔씩 마셔줘야 잠이 깨는 그 좋은 커피도 먹으면 안 된다. 카페인 때문에, 높은 당 때문에, 콜레스테롤과 고혈압 때문에, 한약 먹고 있는 중이니까, 아픈 팔이 빨리 나아야 하니까 참아야 한다. 잡은 초콜릿을 다시 되돌려 놓아둔다. 

    ‘아니야. 하나쯤 먹는다고 죽진 않아. 약을 더 많이 먹으니까, 열심히 침도 맞고 부황도 뜨니까, 괜찮을 거야.’

 이번엔 손을 살살 옮겨 옆, 옆에 있는 카카오 90% 다크 초콜릿을 집어 본다. 그러니 저리 뚱뚱하지, 누군가 지켜보고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다. 

    ‘이거 먹으면 밤에 잠을 못 자잖아.’ ‘하룻밤, 잠 좀 못 자면 어때. 맛있으면 그만이지.’ ‘그래도’ ‘한 번만’ ‘괜찮아’ ‘아니, 아니야’…. 내 안에 목소리가 어찌 그리 많은지 편 갈라 싸워대는 통에 머리가 어지러워 한숨이 나온다. 

결국 초콜릿을 담지 못하고 돌아 나오는데 한 젊은 커플이 이게 맛있네, 저게 맛있네, 도란도란 초콜릿을 보는지 자기들 얼굴을 보는지 웃으며, 달고 단 벨기에 초콜릿을 들고 지나간다. 혀끝에 달콤 쌉싸름한 맛이 돌았다. 어깨와 가슴에는 사막의 밤바람이 모래알을 쓸며 지나간다. 생명이 넘치고 그래서 거리낄 것 없는 그들의 젊음이 부럽고 아까운 줄 모르고 쓰다 텅 비어 가는 시간을 깨닫는 일은 씁쓸했다.

 참, 내가 왜 그랬을까, 그때 차라리 초콜릿을 선물할 것을. 나는 칼릴 지브란과 매리 해스켈이 나눈 영혼의 속삭임,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습니다』라는 책에 밑줄을 그어 첫사랑에게 선물했었다. 

     

나는 그대를 영원까지 사랑하겠습니다. 이 육신을 타고나 그대를 만나기 훨씬 전부터 나는 그대를 사랑하고 있었나 봅니다. 그대를 처음 본 순간 그것을 알아 버렸습니다.  


얼굴이 뜨겁다. 알지도 못하고 지키지도 못할 맹세. 하지만 그때 나에겐 이런 문장이 초콜릿보다 달았다. 나의 첫사랑은 이 모든 문장을 지나치게 진지한 의문문으로 받아들였겠지. 답을 할 수가 없었을 거다. 비장한 고백이 없어도 마냥 달콤하고 그저 즐거울 나이였다. 그냥 초콜릿을 주고 헤어졌더라면 이렇게까지 창피하진 않을 텐데. 

나의 “오빠”는 이 사랑 고백에 어떻게 답을 했었나? 초콜릿과 함께 초콜릿보다 더 단 사탕을 엮어 하와이 부케를 만들어 주었지. 두 줄 글쓰기도 버거워하는 기계과 인간이지만 최대한 비유를 해본다면 자신은 ‘거미줄에 걸린 꿀벌’ 같다고 했다.

한 해 두 해 지내보니 초콜릿의 본래 맛은 쓰디쓰단 사실을 알게 되었다. 비었다, 싶어 서글퍼지다, 사랑하고 사랑을 지키려고 애를 쓴 지나간 젊은 시절이 헛될 수는 없잖은가 싶었다. 함께 살게 되어 고되고 슬픈 날도 많았지만 젊음을 바쳐 사랑을 지킨 남편에게 이런 서러움으로 답해서는 안 되지. 지금 내가 초콜릿을 먹지 않는 것은 사랑하는 일이야.      

나는 설 대목 전장에서 달콤한 사랑을 골라 나간 그 젊은 커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잠깐 미소 짓고 돌아서 잠시 내려놓았던 장바구니를 든다.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 그것은 하나의  우연이었던 것에서 내가 다른 것을 끄집어내겠다는 걸 말하기 위함입니다. 우연으로부터 내가 지속성, 끈덕짐, 약속, 충실성을 끌어낼 것이라고 말입니다.
(알랭 바디우, 『사랑예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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