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기)
통신사가 닛코로 참배를 떠난 것에서 보듯 어찌 보면 이 세상의 일 가운데 상당 부분은 명분과 실리 싸움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세상의 변화를 재빨리 읽어서 그걸 반영하는 거지요. 오늘날의 사회는 워낙 눈부시게 발전하는 데다 그 변화의 속도도 무척 빨라서 조금만 방심하면 뒤처지는 세상이 돼 버렸어요. 이처럼 사회가 급변하는 현실에 잘 적응하려면 평소 어떤 버릇을 들이는 게 좋을까요? 솔직히 말이 쉽지, 변하는 세상을 따라잡는다는 게 그리 호락호락하진 않죠? 그렇다면 변하는 현실에 맞춰 그때그때 실리를 취하는 것이 바람직할까요, 아니면 언제나 변하지 않는 명분을 취하는 것이 바람직할까요,? 그도 저도 아니면 실리와 명분을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취하는 것이 바람직할까요?
생각 열하나)
언젠가 『사형수 김대중』이라는 연극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어느 한쪽의 지지를 받는 정치인을 다룬 연극에 대해 말하는 게 왠지 조심스러워집니다. 어른들 사이에서는 대개 종교나 정치 얘기는 꺼내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편이거든요. 이 둘은 개인의 신념이나 이념에 따라 주장하는 바가 명확하다 보니 이편과 저편으로 나뉘어 다투기 쉽거든요. 자신이 어느 쪽에 가까운지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상대에게 비호감을 살 수 있으니까요.
자신과 다른 편의 믿음이나 생각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에요. 만일, 여러분이 팬덤이 확고한 유진스나 아이브 어느 한쪽의 팬이라고 가정하면 이해가 쉬울지도 모르겠네요. 각각의 팬들에게 어느 그룹이 더 나은지 토론해보라고 한다면 열렬한 팬일수록 시끄럽지 않을까요? 이런 사정을 알지만, 이번 편에는 여러분이 잘 모르거나 관심 없는 우리나라 정치 얘기로 시작해볼까 합니다. 닛코로 가느냐 마느냐를 갖고 통신사가 고민하는 건 전례에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국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당을 방문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 때문이잖아요. 이런 게 모두 두 나라 안팎의 정치 문제이기도 하고요.
「“독일이 유대인의 학살에 대해 사과했다고 해서 유대인이 그 학살 현장이나 히틀러 묘소에 가서 참배할 수 있겠느냐?”, “일본이 우리에게 사과했다고 해서 우리가 야스쿠니 신사에 가서 참배하고, 천황의 묘소에 가서 절을 할 수 있겠느냐?”
「유대인이 히틀러 참배할 수 있나」, 중앙일보 기사, 2015년 2월 11일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높은 자리에 오르거나 새로운 일을 맡은 다음 날 첫 일정으로 보통 하는 일이 있어요. 바로 현충원을 참배하는 일이지요. 당연하게 보이는 이런 일정을 두고 다음 날 신문마다 왈가왈부하는 기사로 시끄러울 때가 있어요. 포털에 ‘현충원 참배 논란’이라고 검색하면 많은 기사가 뜰 거예요. 저도 그런 논란들 가운데 한 정치인의 말을 그대로 인용한 기사를 가져와 본 겁니다. 현충원은 우리나라 순국선열들을 모셔놓은 곳이잖아요. 그런데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 가운데 몇 분의 묘소도 여기에 있거든요. 그러다 보니 누가 어떤 사람의 묘소를 방문했다거나, 또는 하지 않았다거나 하는 문제로 말이 나오는 거예요. 정치하는 사람들한테는 이게 생각보다 간단치 않은 문제거든요.
역대 대통령들을 평가할 때 사람마다 생각하는 잘한 일과 잘못한 일이 있겠죠. 그 대통령이 속해 있던 정당은 업적을 앞에 내세우며 치켜세울 테고요, 반대편 정당은 잘못을 주로 지적하며 깎아내리고 싶을 거예요. 우리나라는 눈부신 경제 성장과 더불어 독재라는 어두운 그늘이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했던 현대사를 갖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어느 쪽에 더 후한 점수를 주느냐에 따라 평가가 극단으로 달라져요. 같은 사람을 두고서도 자기 권력을 유지하려고 많은 사람을 가두고, 고문하고, 죽인 독재자로 평가하기도 하고요, 그와 달리 국가가 나서서 산업을 키우고 국민 의식 개조를 통해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한 지도자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각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두 편으로 갈라져 있겠지요. A는 B를 향해 일제와 독재 정권에 부역한 기회주의 정당이라고 공격하고, B는 A를 향해 북한이나 중국과 결탁한 빨갱이,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로 서로를 일컬으며 몰아가기도 합니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투표를 통해 대통령도 뽑고,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도 뽑잖아요. 선거는 권력을 두고 벌이는 전쟁과 같아서 정치인들은 보통 상대를 무너뜨리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어요.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선의의 경쟁을 벌이고, 선택받지 못하면 깨끗이 승복하고 함께 협력하면 좋으련만, 현실에선 좀처럼 그런 모습을 보기 어렵거든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현충원 참배를 하는 정치인들은 자신의 정치 셈법에 따라 지지자들이 좋아할 만한 대통령의 묘소만 참배할 때가 많아요. 가끔 반대편에 있는 대통령의 묘소를 함께 참배할 때도 있는데 그러면 같은 당에서나 지지자들 사이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지요.
위에 인용한 기사가 그런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민주주의를 위해 싸워 온 정당에서 독재자의 묘소에 참배할 수 있느냐는 말을 하려고 제국주의 시대의 나치와 일본을 끌어와 비판한 대목이거든요. 당시 당 대표가 되어 묘소를 참배한 정치인은 과거가 아닌 미래에 방점을 두고 국민 통합이라는 명분을 앞세웠고요, 이를 비판한 같은 당 정치인은 민주주의를 지키다 희생한 사람들의 정신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실리 면에서도 참배한 정치인은 지지자를 넘어 중도로 외연을 확장할 수 있다고 보았을 테고, 비판한 정치인은 선명한 태도를 통해 자신이 속한 당의 지지와 결속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겠지요. 한편에선 이러한 비유가 적절한가를 두고 또 한바탕 설전이 벌어지기도 하고요.
「김대중은 국교 정상화에 대한 ‘무조건 반대’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국익을 위해서 일본과의 수교는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국제사회에는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는 법이었다. 식민지였던 국가들이 침략자들과 수교를 하는 것은 침략 행위를 용서해서가 아니라 국익을 위해서였다. 강해져서 다시는 침략을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선진 기술은 받아들여야 했다.」
『새벽 : 김대중 평전』, 김택근, 사계절, 2012, 59~60P
김대중 전 대통령은 박정희 시대에 다른 야당 지도자들과 달리 일본과의 국교 수교는 필요하단 입장이었습니다. 당시 일본과의 수교는 국내 산업을 발전시킨다는 명목으로 일본으로부터 달러를 빌려오는 일종의 대가였거든요. 국민 여론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고 해요. 임진왜란 후 일본과 수교를 맺고 조선통신사를 파견할 때도 조정에선 찬반으로 시끄러웠잖아요. 반복된 역사지요. 그는 철저한 민주주의자로서 독재에 반대하고 박정희 정권을 비판했던 사람이었으니 이에 반대하는 편이 더 유리할 법한데 그리 하지 않은 거지요.
그는 박정희 시대에 의문의 교통사고와 납치사건으로 목숨을 잃을 뻔한 정치인입니다. 전두환 시대에는 내란음모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죽음을 기다리기도 했고요. 제가 보고 온 연극 사형수 김대중은 이를 소재로 다룬 작품이기도 하지요. 그런 시련을 겪었던 그가 대통령에 취임하고 바로 지시한 일 가운데 하나가 박정희 기념관 건립이에요. 스스로 기념사업회 명예회장이 되거든요. 대통령 당선인 시절에는 정치 공작으로 자신을 죽이려고 했고, 광주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인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사면하기도 하지요. 신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가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서의 말을 실천으로 옮긴 걸까요?
이에 대한 평가는 저마다 달라요. 천신만고 끝에 권력을 잡고도 정치 보복이 아니라 용서를 택한 그의 결정을 두고 ‘역사적 화해’, ‘비범한 휴머니스트’라고 평가하기도 하지만, 그 결과로 힘 있는 사람들한테는 법보다 ‘정치적 판단’이 더 앞설 수 있다는 나쁜 선례를 남겼다고 평가받기도 하지요. 이렇듯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정치는 없어요. 민주주의는 총칼이라는 무력 대신에 말(설득과 대화)로 국민의 지지를 얻는 과정이니 언제나 시끄러울 수밖에 없지요.
「정치란 말이다.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생겼을 때, 그 갈등을 부드럽게 조정하여 서로 싸우지 않고 질서를 유지하면서 사이좋게 잘 살게 하려는 거야. 정치가 잘 되면 당연히 모든 사람이 행복하겠지?」
『열두 살에 처음 만난 정치』, 신재일, 주니어 김영사, 20P
정치학을 전공하고 가르치는 학자가 어린이들을 위해 쓴 책입니다.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 지호는 아빠의 말에 의구심을 갖지요. 할아버지가 보는 뉴스에서 맨날 싸우는 정치인들과 놀이터에서 자기들이 주인인 양 행세하는 힘센 형들을 떠올려요. 아빠는 그 모든 게 정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라고 말하거든요.
정(政)이라는 글자는 바르다(正)는 글자와 치다, 두드리다(攵)는 글자가 합쳐 만들어졌어요. 뜻 그대로 풀면 정치(政治)는 ‘바르게 쳐서 다스린다’는 말이잖아요. 바르지 않는 건 그냥 두는 것이 아니라 치거나 두드려 깨닫게 하는 행위가 포함되어 있지요. 무엇이 바른 것인지는 때와 장소에 따라, 사람마다 다를 거잖아요. 저마다 바르다고 생각하는 걸 막대로 치고 두드려 알려 바로 잡는 게 정치니 늘 시끄럽지요. 따라서 정치에서 갈등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입니다. 사람 사이나 나라 사이에 생겨날 수밖에 없는 갈등을 ‘조정하여 서로 싸우지 않고 질서를 유지’하는 게 정치니 얼마나 어렵습니까? 한편, 이렇게 어렵고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하려고 나선 사람들이 정치인이란 거잖아요. 그러니 마냥 정치인을 모두 싸잡아 싸움만 하고 제 잇속만 챙기는 사람들로만 볼 건 아니지요.
결국, 어떻게 갈등을 원만하게 조정할 것인가가 가장 중요한 정치 덕목이 될 거예요. 이때 중요한 게 법과 제도입니다. 조선통신사가 오갔던 시절에는 왕이나 쇼군이 절대 권력을 쥐고 있던 시대니 거기에 맞는 법과 제도가 있었을 테지요. 국민 주권 시대인 오늘날은 또 여기에 맞게 법과 제도가 변화, 발전해왔고요. 시대마다 어울리는 명분과 실리가 있었고, 그와 달리 변하지 않는 가치 또한 있을 테지요. 이를 두고 벌이는 다툼과 협상이 정치의 영역에서 오늘날에도 계속 일어나고 있는 거고요.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조선통신사를 둘러싼 사건들도 대부분 이런 정치 문제이기도 합니다.
자, 다시 닛코 얘기입니다. 조선 사신의 처지에서는 얼마나 난감했을까요. 사정을 아는 일본은 경비를 다 내줄 테니 유람을 다녀오라고 회유하잖아요. 얄밉지만 자신의 정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영리한 꾀를 냈네요. 이에야스는 왜란을 일으킨 장군은 아니지만, 어쨌든 히데요시 다음으로 일본을 통일한 최고 권력자였잖아요. 이렇게 극진한 대접을 해주는 데 안 가겠다고 할 수는 없고, 거기까지 갔는데 참배를 안 하고 올 수도 없을 테고요. 원칙이란 게 처음 한 번 거스르는 게 어렵잖아요. 한 번 그리 하고 나면 그게 또 전례가 되고 점점 더 유연해지기 마련이지요. 나중에는 어떻게 되나요? 다음 사신이 갈 때는 조선에서 종도 보내주고 삼구족이라 해서 제사에 필요한 향로, 화병, 촉대도 보내고요, 글도 멋지게 써주지요. 나중에는 제사 음식을 잘 준비하라고 요리사까지 보냈다고 하니 일본의 전략은 제대로 통했네요.
이런 사실을 두고 두 나라에선 다른 주장을 하지요. 일본에선 조선이 이에야스 영전에 바친 예물이라고 주장할 테고요, 우리로서는 당연히 조선왕의 하사품이라고 말할 테지요. 어쨌든 정국 안정과 도쿠가와 가문의 위세를 내보이려던 정치 목적을 달성한 일본은 이후에는 닛코에 사신 방문을 요청하지 않습니다. 통신사를 대접하는 비용을 줄이는데 더 골몰하게 되지요. 솔직히 얄미울 정도로 셈이 빠른 일본입니다. 조선도 굳이 닛코까지 갈 이유가 사라졌네요.
「“존중하시오, 그리하여 존중하게 하시오(respectez, et faites respecter).”
이렇게 적혀 있는 팻말이 공원의 잔디밭에 서 있는 것을 당신은 자주 목격할 수 있었을 겁니다. 잔디밭에 들어가지 말라는 요구를 점잖게 표현한 것인데, 잔디밭을 존중하여 스스로 존중받으라는 말이지요. 똘레랑스는 바로 이 팻말과 똑같은 요구를 담고 있습니다. 즉 “(남을) 존중하시오. 그리하여 (남으로 하여금 당신을) 존중하게 하시오”라는.
…… 중략 ……
당신의 이념과 신념이 당신에게 귀중한 것이라면 남의 그것들도 그에게는 똑같이 귀중한 것입니다. 당신의 그것들이 존중받기를 바란다면 남의 그것들도 존중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똘레랑스의 요구이며 인간 이성의 당연한 주장입니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 창작과비평사, 1995, 289~291p
사상의 자유를 보장받지 못하던 독재 시절, 이른바 정치 난민이 되어 프랑스로 망명한 경험이 있는 저자가 ‘똘레랑스’라는 생소한 단어를 위 책에서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무언가를 하지 말라는 제안을 저렇게 품위 있고 멋지게 표현할 수 있다니, 위 구절을 보고 정말 감탄했던 기억이 납니다.
닛코 방문을 둘러싼 정치외교에서 일본은 영리하게 자신의 목적을 이루었습니다. 정치 속셈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나쁘다고 저는 보지 않습니다. 그러한 셈은 누구나 하잖아요. 그걸 어떻게 이루는지 과정이 중요하겠지요. 민주주의는 위에서 인용한 ‘똘레랑스’의 태도를 바탕으로 했을 때 아름답게 꽃피울 수 있는 정치 제도입니다. 누가 더 널리 이로운 주장을 하는지, 충돌하는 이익을 어떻게 셈하고 나누는 게 가장 바람직한지, 필연으로 생기는 갈등을 총칼과 같은 무력이 아닌 협의와 토론을 통한 말(수사)로 다투어 가려내야 하니까요. 닛코 방문과 관련해서는 일본도 조선의 입장을 어느 정도 이해한 것으로 보입니다. 쇼군을 대하듯 통신사를 대접하고 일 년 예산의 상당량을 여기에 쏟아부었다고 하잖아요. 적어도 염치없이 이를 요구한 것으로 보이진 않습니다. 그러니 조선에서도 제사까지 잘 지내도록 예물은 물론 관련 사람까지 파견한 것이겠죠.
하지만 여기에는 전쟁으로 터전이 부서지고 가족을 잃은 백성,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은 이들의 자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조선과 일본 두 나라 높으신 분들끼리의 똘레랑스만 비칠 뿐이죠. 조선이든, 일본이든 이에야스 사당을 참배하기에 앞서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두 나라의 군인과 백성을 위한 합동 제례를 먼저 제안했다면 어땠을까요. 봉건 시대라 이런 정치를 기대할 순 없는 걸까요.
국민 주권 시대인 오늘날은 어떤가요. 여전히 정치 다툼에서 정치인들만 보이지 않나요? 다시 말하지만, 정치인들이 서로 목소리를 높여 다투는 건 보기 불편해도 그걸 문제 삼을 필요는 없어요. 여러분이 앞으로 눈여겨보아야 하는 건 그 다툼이 결국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하는 점이거든요. 똘레랑스는 정치에서 필연처럼 생기는 갈등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기본 태도와 관련된 것이면서 동시에 그 자체로 그들이 누구를 위한 정치를 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잣대가 될 수 있어요. 가진 자 혹은 강자를 위한 정치가 아니라 보통의 국민, 사회 약자, 더 나아가 동물과 자연을 위한 정치를 하려는 사람들에게 똘레랑스는 더 절실합니다. 목소리가 작고 약할수록 법과 제도를 통해 모두가 들을 수 있게 보장해주어야 하니까요.
여러분, 내가 먼저 하고, 내가 더 갖고 싶은 마음을 가져도 괜찮아요. 그걸로 친구와 다투어도 괜찮고요. 저도 그렇고요, 여러분 부모님도 대개 그렇답니다. 다만, 내가 그런 마음이 있다면 상대도 그런 마음을 갖는 게 당연한 거예요. 이럴 때 여러분도 정치를 해야 합니다. 못난 어른들과는 달리 내용도, 방식도 바르게 다투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정치라는 말이 지금처럼 오염되어 사람들이 싫어하거나 멀리하는 대상으로 바닥에 나뒹구는 걸 막아주세요.
“서로 열심히 다투세요. 그리하여 평화를 만드세요.”
11. 조선통신사가 닛코로 간 까닭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임진왜란이 서둘러 종결된 뒤 일본에서는 차기 권력을 둘러싸고 큰 내전이 벌어져. 오사카를 중심으로 하는 도요토미 가문과 에도를 중심으로 하는 도쿠가와 가문의 싸움이 그것이야. 결국,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기선을 잡고, 마침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1593~1615)를 오사카성 전투에서 물리친 도쿠가와 이에야스(1542~1616)는 비로소 도쿠가와 바쿠후 즉, 에도 바쿠후 시대를 열게 돼. 그러다 1616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죽게 되지.
이에야스가 죽은 후 에도 바쿠후는 고민에 빠졌어. 왜냐하면, 비록 일본 전국을 통일하긴 했으나 여전히 권력 기반이 공고히 다져지지 않았던 에도 바쿠후는 도쿠가와 쇼군의 정통성과 에도 바쿠후의 힘을 나라 안팎으로 널리 내보이고 싶었던 거지. 그래서 에도 바쿠후를 연 이에야스가 죽음을 맞이하자 곧장 그의 사당을 크게 짓기 시작해. 그게 바로 닛코에 있는 동조궁 곧, 일본말로 도쇼구야. 그러니 닛코에는 에도 바쿠후를 연 도쿠가와 쇼군의 뿌리인 이에야스의 사당이 있어.
사당을 크게 지은 뒤 에도 바쿠후는 이에야스를 신처럼 떠받드는 거야. 그래서일까 에도 시대엔 수많은 일본인의 평생소원 중 하나가 일생 중 한 번이라도 닛코를 방문하는 것이었다고 할 정도야. 오늘날도 닛코는 도쿄 인근의 유명한 관광지로 손꼽혀. 도쿄 근처의 후지산이 일본 화산과 온천의 상징이라면 닛코는 일본 자연과 문화유산의 상징이라고 할 정도야. 다만, 2011년 동일본대지진 이후 상대적으로 후쿠시마 원전과 가까운지라 관광객이 줄어들긴 했대.
하여튼, 그렇게 이에야스 사당을 크게 지은 에도 바쿠후는 전국의 모든 다이묘에게 명령을 내리게 돼. 즉, 앞으로도 조선통신사가 일본으로 오면 사신의 맞이와 접대에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최선을 다하라고 일렀지. 쇼군을 대하듯 모시라고 했을 정도야. 그런 까닭에 1636년 사행에 나선 통신사 일행은 유난히도 접대를 잘 받았대. 그런데 왜 하필 그 시점에 쇼군은 통신사 접대에 더더욱 빈틈없이 하라는 명령을 내렸을까?
사실 조선과 일본은 서로 죽고 죽이는 잔인한 전쟁을 치러 원수처럼 여기는 감정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을 때잖아.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봐. 1636년이면 임진왜란이 끝난 1598년으로부터 약 40년쯤 흘렀잖아. 한 세대가 흘러 두 세대를 향해 흐른 셈이지. 그때만 해도 수명이 지금보다 훨씬 짧았으니 거의 두 세대가 흐른 거나 마찬가지야. 그러면 뭔가 슬슬 시동을 걸어도 될만하다고 생각했겠지? 평화의 사절단인 통신사를 활용해 뭔가를 꾸미고 싶었던 거야. 대체 그게 뭘까?
때는 1636년 12월 10일, 머나먼 여정을 마친 통신사가 국서전달을 사흘 앞두고 에도에 머물 때야. 뜬금없이 쓰시마 영주가 통신사 삼사를 만나 이런 이야기를 전했어.
“우리 쇼군께서 닛코로 유람을 한번 다녀오라고 권하십니다!”
“아니, 그것이 무슨 말씀이오? 우리가 일본에 온 것은 임금님의 뜻에 따라 쇼군에게 국서를 전달하러 온 거지, 한가로이 놀러 온 게 아니잖소? 그런데 갑자기 닛코란 곳으로 유람을 다녀오라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오!”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그러나 쇼군께서는 세 사신이 꼭 닛코에 들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만약, 삼사께서 닛코로 가지 않으면 저희 쓰시마가 아주 큰 낭패를 당하게 됩니다. 쇼군의 명령을 어기게 되면 쇼군께서 저희를 가만둘 리 없습니다. 너그러이 헤아려 주십시오!”
이제 일본 에도 바쿠후의 속셈이 뭔지 감이 잡히니? 맞아! 에도 바쿠후는 통신사의 닛코 유람이 실현되면 쇼군과 에도 바쿠후의 권위를 대내적으로도, 대외적으로도 널리 드높일 수 있다고 생각한 거지. 멀리 조선에서 온 통신사가 닛코로까지 가서 이에야스 사당에 예를 올릴 정도로 도쿠가와 가문은 위대하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확인할 수 있잖아. 따라서 에도 바쿠후는 조선과의 외교 실무를 맡은 쓰시마에게 종용해 통신사를 닛코로 데려가라는 명령을 내린 거지.
대개 외교적 실무를 맡은 담당자 처지에서 보면 나라 사이의 외교 관계에 갈등이 생기는 일을 굳이 하고 싶지 않아. 그러면 그 당시 쓰시마는 어땠을까? 나름 외교 술수가 뛰어났던 쓰시마는 그런 쇼군의 명령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아. 도리어 쓰시마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능숙한 외교 솜씨를 선보여 바쿠후의 믿음을 확실히 사겠다는 의지가 충만했어. 결국, 통신사 삼사는 닛코로 떠나게 돼.
국서를 무사히 쇼군에게 전달한 통신사 세 사신은 에도를 떠나 닛코까지 가야 했어. 하지만 삼사는 하나같이 닛코 유람을 어리석은 짓이라며 흉을 봤대. 통상 외교적 행사를 거행할 때면 설령 마음에 들지 않아도 겉으로는 웃으며 좋은 척하는 법이거든. 그런데도 통신사 세 사신의 반응은 왜 그처럼 좋지 않았던 걸까? 아마 모르긴 해도 여러 이유가 있었을 거야. 어떤 이유가 있을까?
첫째, 닛코로 가면 이에야스의 사당이 있으니, 그걸 무시하고 외면할 수도 없고 반드시 참배해야 할 텐데, 그게 내키지 않았을 수가 있어. 현대사회에서는 외교사절단이 방문국의 국립묘지를 참배해 예를 표하거나 하지만, 왕정 시대에는 대부분 선왕의 무덤이나 사당에 들러 그런 예를 표했거든. 그러니 닛코로 간다는 말은 이에야스 사당에 참배해야 함을 뜻하니 망설이지 않을 수 없지. 그때 통신사로 떠나는 사신들은 대체로 일본을 오랑캐 나라로 여겼으니, 오랑캐 우두머리의 사당에 참배하는 것을 치욕 중의 치욕이라고 여겼을 거야.
둘째, 일본의 말대로 유람이라고 쳐. 하필 그때는 날씨가 몹시 추운 겨울철이었거든. 그러니 주변에 그다지 볼만한 것도 없었을 것 아냐? 날은 춥지, 마음은 내키지 않지, 발걸음은 옮겨야 하지, 그러니 세 사신으로선 참 재미없는 유람이었을 수도 있겠다 싶어. 그렇지? 유람이라면 따뜻하고 맑은 날에 둘레 자연풍광을 음미하면서 느긋하니 둘러봐야 제맛이 날 거 아냐? 그런데 추운 겨울날 옷깃을 바짝 세우고 걸음만 바삐 재촉할 텐데 유람하는 재미라곤 딱히 찾아볼 수 없겠지!
셋째, 외교사절단은 대체로 사전에 합의한 대로만 움직여야 하거든. 따라서 조선 조정의 명령도 없는데 세 사신 마음대로 이에야스 사당을 참배했다는 것을 나중에라도 조정에서 알게 되면 조선으로 돌아갔을 때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도 됐을 거야. 조선 시대엔 왕명을 따르지 않으면 반역죄로 처벌받았거든. 그런 형편인데 닛코로 가는 게 무슨 유람이겠어? 어쩌면 귀국 후 처벌이 두려워 세 사신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서로 닛코에 간 것을 흉본 게 아닌가 싶어.
어쨌거나 통신사의 닛코 유람을 보더라도 조선과 일본 두 나라 사이의 이해관계가 완전히 다르지? 일본으로써는 밑지는 것 하나 없이 충분한 성과를 올리고 있음에 반해, 조선으로써는 손실만 가득한 유람이야. 비록, 그 모든 경비를 일본이 댄다 하더라도 이에야스의 사당에 참배한다는 것은 조선으로선 무척 수치스러운 일이었거든. 아무튼, 닛코로 통신사가 참배를 떠나는 문제는 1636년 사행뿐만 아니라 이어진 사행에서도 이어졌어. 좀 더 살펴볼게.
1643년 사행 때야. 일본은 당시 도쿠가와 이에미쓰(1623~1651)가 3대 쇼군에 올랐는데, 여전히 권력을 안정시키는 게 중요했어.
“나는 아버지인 도쿠가와 히데타다(1605~1623)의 뒤를 이어 20세의 젊은 나이로 3대 쇼군이 되었소! 이제부터는 지방 다이묘에 대한 통제를 확실히 해서 에도 바쿠후의 위엄을 드높이 세우려 하오! 어떻게 하면 내 뜻을 이룰 수 있을지 누가 좋은 생각을 말해 보시오!”
“쇼군 전하! 아무래도 도요토미 히데요시 쪽에 붙었던 서쪽 다이묘부터 없애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들을 그냥 두면 두고두고 불씨가 될 게 빤하니 지금 뿌리를 싹 뽑아야 하옵니다! 그리고 1615년에 만든 ‘무가법 제도’를 21개 조로 바꾸어 지방의 다이묘가 1년씩 교대로 자기 영지와 에도를 오가도록 하면 다이묘가 함부로 반란을 꾀하지 못할 것입니다!”
“쇼군 전하! 에도 바쿠후의 권위를 야무지게 다지기 위해 에도 바쿠후를 연 이에야스 쇼군을 신으로 떠받드는 것이 좋겠습니다! 먼저, 교토에 있는 일왕을 움직여 이에야스 쇼군을 ‘동조대권현’이라 칭하도록 함이 어떠하옵니까? 그런 다음 일왕의 아들이 있는 닛코의 절 도쇼지에서 ‘동조대권현’을 모시도록 함이 합당하옵니다.”
이에야스를 모시는 사당을 닛코에 세운 이에미쓰는 그 후 닛코에 열 번이나 찾아갔대. 이에미쓰의 아버지이자 이에야스의 아들인 히데타다는 아버지의 사당을 네 번 찾아갔어. 사당은 처음부터 닛코에 있었던 아니고 나중에 닛코로 옮긴 거래. 아무튼, 이렇게 이에야스를 신으로 떠받드는 일이 성공하자 에도 바쿠후는 내부적으로 어느 정도 권위를 굳혔으니 이제 통신사마저 닛코로 보내 멋지게 대외적으로도 대미를 장식하고 싶었던 거지.
“조선에 통신사 파견을 요청할 때 도쿠가와 이에야스 쇼군의 묘에 쓸 조선 임금의 친필과 주요 신하의 시, 대장경과 동종, 향로와 촛대, 화병 따위를 보내 달라고 부탁하면 어떻겠습니까?”
“아니, 그건 왜요?”
“어차피 닛코 사당에 죄다 필요한 것들인데, 이왕에 조선의 왕이 보낸 글씨까지 곁들인다면 우리 일본의 존엄과 쇼군의 위대함을 더더욱 돋보이게 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일본의 이런 요청에 따라 조선은 북쪽에서 새로 일어난 청나라를 견제하고, 남쪽 일본의 사정을 엿보기 위해 통신사를 보내게 됐어. 게다가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여 닛코까지 가서 이에야스의 사당에 제사까지 지내 주었지. 그러니 일본의 에도 바쿠후 체제를 안정시키는데 통신사가 크게 이바지한 셈이야. 아, 지금 닛코에 있는 조선왕의 친필로 알려진 것은 사실이 아니야. 왜냐고? 그때 조선에서 보낸 것은 왕의 친필이 아니라 왕의 종친이 쓴 글씨를 보냈거든.
하여튼, 말 많은 통신사의 닛코 유람을 마지막으로 다녀온 때는 1655년이야. 그때도 일본에서는 이에미쓰의 무덤이 있는 대유원에 쓰겠다며 등롱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지. 그래서 제수를 준비하는 요리사인 숙수까지 딸려 보냈대. 그러니 1655년 사행 때는 국서전달 다음으로 큰 외교행사가 바로 닛코 참배였어. 결국, 조선에서도 닛코 참배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셈이지. 사정이 이렇게 바뀌자 1655년에 닛코로 참배를 떠났던 종사관 남용익은 오랜 피로와 외교적 긴장으로 잠 못 드는 밤이 많았음에도 닛코 산세의 수려함에 감탄하면서 『부상록』에 이렇게 남겼어.
“산의 생김새를 말하자면 웅장하다. 높기는 후지산보다 못하나, 봉우리가 빼어난 것은 멋진 경치다. 원씨 양세가 여기에 사당 터를 정한 것은 진실로 까닭이 있도다.”
여기서 원씨는 도쿠가와 가문을 말하는 것이니 곧 쇼군 집안을 일컫는 말이야. 어때? 통신사가 닛코를 오가면서 겪은 일들을 살펴본 소감이? 세상사란 그런 법이야. 지난 1636년 사행을 떠난 통신사 사신은 닛코의 산세와 사당터를 욕하기 바빴잖아? 그런데 청나라가 들어서고 일본과의 관계가 새삼 중요해져서 닛코 참배를 공식 일정으로 확정 짓자 사신의 평가는 달라지기 시작해. 따라서 통신사의 닛코 참배로 조선과 일본 두 나라는 서로 마찰을 빚기도 하지만, 서로 보탬이 되려고 애쓴 흔적도 듬뿍 묻어나. 아, 통신사의 닛코행은 앞서 본 1636년 사행, 1643년 사행, 1655년 사행이 전부야. 왜냐하면, 그 뒤로 일본 에도 바쿠후는 권력을 확실히 안정시켰으니 무리해서 경비를 써가며 통신사를 닛코까지 보낼 이유가 없었거든. 역사 속 요지경이란 말은 이럴 때 쓰는 말 맞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