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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병원인간 지니 Sep 27. 2022

우정 테스트

친애하는 나의 몸친구에게


나에게는 절교하고 싶은 친구가 한 명 있다. 사정이 좀 딱해 이야기를 듣기만 하면 짠함이 느껴지는 친구다. 같이 쌓아온 추억들이 많아 더 마음이 가는 친구 이기도 하고. 가끔은 이게 가능할까? 버틸 수 있나? 싶은 순간에 기대하지 않았던 힘을 쏟아내 온몸으로 멋짐을 표현하는 친구. 이렇게까지 합이 잘 맞아도 되나 싶었는데, 이제는 이 관계를 정말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도무지 버틸 재간이 없다. 합이 잘 맞나 싶었는데 갑자기 제멋대로 모든 걸 결정하고 이미 일을 저지르고 나한테 수습하라는 꼴을 한두 번 겪은 게 아니다. 나 더 이상 이 꼴 안 볼란다. 이건 친구가 아니라 친구인척 하는 적이다. 그것도 아주 나쁜 악당. 만약에 연애대상이었다면 그만둬도 한참 전에 그만뒀을. 이것만 아니면 참 좋은데… 수준이 아니라, 이것도 별로. 저것도 별로. 예쁜 구석을 찾는 게 하늘의 별따기이다. 하도 못하는 게 많아서 해내기만 해도 칭찬이 절로 나오는 수준이랄까.




평생을 함께할 친구인데, 좀 잘 달래 봐

매일 약을 챙겨 먹는다는 말을 해석하면, (정말 열심히 아껴주지 않는 이상) 위가 제정신 일리 없다는 말이다. 매일 약을 챙겨 먹어야 하는 만성 병원인간들의 세상에 위장질환은 아주 가볍고, 귀여운 존재일 정도로. 문제는 속 쓰림, 위액 분비 과다, 잦은 소화불량을 해결하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은 약을 먹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병원인간의 세상에서는 문제의 요인과 해결방법이 동일하다. 문제도 약이고, 해결법도 약이다.


몇 일째 먹기만 하면 게워내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소화력이 좋지 않은 건 알고 있었지만 쌀도, 죽도, 음료도 하다 못해 물도 게워내는 지경에 이르니 염라대왕님아 저를 잡아가셔도 좋은데, 얌전히 데려가시면 안 될까요?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응급실에 가도 받을 수 있는 처치는 없고, 근처 내과에 가도 쌓이는 건 약봉지뿐.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결국엔 한의원을 향했다. 약을 먹으면 약을 게우는 지경이니 갈 곳은 여기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병원인간에게 가장 사랑스러운 병원은 어디일까? 친절한 병원? 효과가 직빵인 병원? 명의가 있는 병원? 깨끗한 병원? 아니. 평일에 9시까지 야간진료를 하는 병원 그런데, 무려 주말에도 여는 병원. 진료시간이 긴 병원. 그런데, 의료진이 모두 마음에 드는. 이 모든 것을 충족한 병원이 도보 5분 이내에 있을 가능성은? 잭팟이다. 병원인간 인생 최초로 잭팟이 터졌다. 죽겠다는 마음으로 찾은 가장 가까운 병원이 행운이 되어 돌아왔다.


찾았다 내 명의~ 내가 찾던 명의~ (뜨겁게 안아주고 싶어)  


무엇보다 이 한의원이 내 최애 병원이 된 이유는 선생님과의 티키타카인데, 하루 걸러 하루 체해서 골골대며 오는 모습을 보던 원장 선생님이 참지 못하고 던진 한마디가 그 기폭제가 되었다.


"본인은 그냥 평생 이러고 살아야 되는데. 아마. 얘는 달라지지 않을 거야. 그럼 어떡해? 어떡하긴 뭘 어떡해. 좀 잘 달래 봐. 평생 같이할 친구다 생각하고. 얘를 고치려는 마음을 버려. 그냥 달래. 무조건 달래. 그래야 본인이 산다니까?"


환자분이 아니라 '본인'이라 표현하는 것도. 너의 병을 내가 무조건 낫게 해주겠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도. 무엇보다 지금 병원인간으로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말을 한 것. 그것으로도 그는 나의 명의가 되기 충분했다. 미우나 고우나, 어떤 작가의 말처럼 갖다 버리고 싶어도 갖다 버리지 못하는 이 몸뚱이. 내가 챙겨야지 누가 챙기나 싶은 거지. 그래. 너! 내 친구가 돼라!




나는 이제 지쳤어요 (땡벌 땡벌)

몸과 친구가 된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지독한 짝사랑이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밀당의 고수인 똥차를 사랑하게 되어 버린 모태솔로? 밀당도 이런 밀당이 없다. 내가 생각해도 조금 벅찬 일정이어서 버틸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 때는 또 거뜬히 버텨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기특함의 감정을 가져다준다. 때때로 아니, 자주 이 정도는 당연히 할 수 있지 싶은 순간에는 파르르 몸을 떨며 못 버티겠다고 질색팔색을 한다. 가끔은 눈치도 보는데,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본다. 몸 중에 한 번에 다 아픈 경우는 없다. 관절이 아프면 위장은 좀 얌전하고, 위장이 난리를 치면 다리는 강철이 된다.


그런데 정말 나를 미치게 만드는 건 살살 잘 달래는데도 지랄 맞은 성격을 드러낼 때다. 고기에, 면에, 기름진 볶음밥을 때려 넣고 아차!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그럴 땐 또, 얌전히 지나간다. 한 번 눈감아 주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런데 또 어떤 날은 된장찌개 백반을 먹었는데 먹은 지 30분도 안돼서 그대로 게워내는 걸 보면 도대체 어쩌라는 건가 싶은 거다. 소화가 어려운 음식도 아니고 맵게 만든 것도 아닌 구수한 된장찌개인데 말이다. 억울해 미치는 거지.


몸과 친구가 된다는 건 생각보다 많은 인내심이 드는 일이었다. 알 수 없는 게 사람 마음이라지만, 얘는 말도 못 하니 소통 자체가 안된다. 나 정말, 너랑 친구가 될 수 있는 걸까?



친구사이에도 거리두기가 필요해

병원인간으로 살기 시작하면서 나의 몸 친구를 가장 많이 소개하는 곳은 인스타그램이다. 나름 인스스(인스타스토리) 스타다. 어떤 날은 몸 친구라 소개하며 우리의 우정을 뽐내다가, 조금이라도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면 바로 몸 새끼가 되어버린다. 나의 주변 사람들은 몸 친구와 몸 새끼로 몸에 대한 애칭이 바뀌는 것을 무척이나 재미있게 보고 있는데, 나의 유머러스함을 알아주는 사람들 덕분에 병원인간이 밖으로 나올 힘을 얻었다.


나의 병에 대해, 나의 몸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병을 밝혀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위험부담은 오롯이 내 몫이니까. 하지만, 나의 몸이 몸친구와 몸새끼로 지칭되고 나니 조금의 변화가 생겼다. 스스로 심리적 변화가 생긴 것이다. 나와 나의 몸의 상태가 조금씩 분리되기 시작했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내 마음이 약해서가 아니라, 내 몸의 기능이 약해진 것뿐이라고.


갑자기 몸이 안 좋아 일정에 변화를 주어야 할 때. 동선을 바꿔야 할 때. 먹는 것을 가려 먹어야 할 때. 정말 내가 별로라서, 내가 잘못해서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라는 질문에서 나는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지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의 일부가 문제일 뿐이라는 답에 가까워지고 있다.


병원인간들에게 몸의 문제가 내 문제인 것 같은 느낌은 아마 평생 떨쳐내기 어려울 거다. 몸상태가 좋은 날은 내가 너무 좋았다가 안 좋은 몸상태의 날이 늘어갈 때마다 내가 싫어지고의 반복. 우리는 하나의 그룹이기에 떼어낼 수 없겠지만, 우리에게는 몸의 상태를 타자화하는 경험이 꼭 필요하다. 내가 병원인간으로 내 몸과 더 오래 살아가기 위해.


그리고 조금 더 내 감정에 솔직해지고 싶다.

사랑해 마지않는 친애하는 나의 몸친구에게 끊임없는 관심의 애정을 표하면서. 때로는, 미운 마음이 덕지덕지 붙어 저 멀리 갖다 버리고 싶은 징글징글함을 표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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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내가 따로 또 같이 환장의 듀오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조금 더 친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가끔은 노약자석에 앉고, 아주 가끔은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서른한 살.

대학교 입학, 졸업, 취업 그리고 퇴사까지 나의 의지만큼 의사의 소견도 중요한 몸을 가졌지만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은 사람. 커리어와 함께 병명도 쌓여가는 삶을 살고 있다. 병원에 가는 것이 숨 쉬는 것처럼 익숙한 사람이라 스스로를 병원인간이라 부른다.

늙음은 아픔이 용인되지만 젊음에게는 아픔이 용인되지 않는 사회에서 병원인간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천천히, 꾸준히 이야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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