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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병원인간 지니 Sep 13. 2022

내가 노약자석에 앉아도 될 상인가

교통약자석에 앉지 못하는 교통약자


묘한 시선이 꽂힌다. 자리에 앉지 못한 할머니, 할아버지와 근처에 서있던 젊은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다. 누군가 금방이라도 나에게 "젊은 사람이 자리를 양보해야지!"라고 외칠 것만 같다. 핸드폰을 켜서 어제 다 못 본 드라마를 보는 것도, 출근길 힘을 내기 위해 꼭 봐야 하는 아이돌 영상을 켜는 것도, 모두 죄를 짓는 것만 같다. 지하철 개찰구를 나오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나를 책망하는 눈길이 모두 사라졌다. 나는 교통약자석에 앉아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왜 사람들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걸까.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지만 이내 '그래, 사람들은 보이는 것만 믿으니까. 그걸로 평가하니까. 그럴 수 있지.'라고 내 마음이 가장 편한 합리화를 시작한다. 매 순간 바득바득 기를 쓰며 살 수는 없는 거니까.



이 구역의 싸움닭은 접니다


오늘은 무릎이 고장이다. 이유는 모른다. 매번 통증의 이유를 찾는 건 꽤나 피곤한 일이고, 대부분의 통증들은 진통제의 힘을 빌리면 쉽게 지나칠 수 있다. 급한 데로 무릎 보호대를 착용하고 절뚝이진 않지만 살짝 리듬을 넣은 누가 봐도 조금 이상해 보이는 바운스의 걸음으로 출근길을 시작한다. 지하철 플랫폼에 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는 순간 결심했다. 아, 오늘은 앉아서 가야겠다. 평지보다 계단에서 통증이 확 번지는 게 움직이는 지하철에서 중심을 잡으며 서서 가는 건 역시나 무리라는 판단이 들었다. 다행히 한자리가 비어있어 눈칫밥을 먹으며 자리에 앉았다. 이 정도 눈칫밥으로 다리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면 오늘은 기꺼이 노약자석에서 눈칫밥을 먹겠다는 결심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싸한 시선이 꽂힌다. 한 정거장, 두 정거장. 그렇게 십여 분. 나를 쳐다보며 중얼거리는 말들이 이어폰을 타고 흘러들어온다. 불편하다. 나뿐만 아니라 그 공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아픈 것도 짜증스러운데 이까짓 자리 하나에 부모가 들먹여지고, 사회문제가 들먹여지는 꼴을 보자니 더 이상 못 참겠다는 생각뿐이다.


"선생님, 뭐라고 하셨어요?" 순간 조용해진다. 한참을 떠들던 그 사람이 모르는 척을 한다. 다시 눈을 마주치고 묻는다. "선생님, 뭐라고 하셨어요?" 돌아오는 답은 없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나 다시 소리가 들려온다. 요즘 애들은 참 무섭다고. 나는 다시 묻는다. "선생님, 뭐라고 하셨어요? 저에게 정확하게 말씀하세요." 역시나 돌아오는 답은 없다. 다리가 아픈 건 이제 모르겠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 사람을 쳐다보고 말했다. "선생님, 여기 앉으세요. 제가 앉는 게 그렇게 마음에 안 드시면 정확하게 저한테 말하시지 이렇게 사람들 불편하게 20분을 중얼거리세요." 돌아오는 대답에 정말 화가 나버렸다. 됐단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들에게 나는 오늘도 '이상하고 성질 더러운 젊은 사람'이 됐다. 오늘'도'라고 말한 이유는 세상 친절한 목소리로 선생님이라 존칭 하며 정중하게 상황을 설명하는 오늘 같은 일이 스페셜한 이벤트는 아니기 때문이다. 한 달에 두어 번 정도는 가볍게 겪는 일. 그리고 누구도 챙겨주지 않는 이 나쁜 기분을 털어내기 위해 다시 합리화를 시작한다. '그래도 오늘은 참지 않고 말했네. 잘했다.'


이쯤 되면 인터넷 세상 어딘가 '4호선 노약자석 빌런'이라는 이름으로 영상이 올라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한다. 그리고 혹시라도 그런 영상을 본다면 알려달라. 친절히 달려가서 내가 맞는지 확인하고, 침착하게 고소장을 날려줄 테니.


거참,
진단서를 이마에 붙이고 다닐 수도 없고


오늘은 이런 일이 있었다고 친구에게 이야기를 하니 친구가 한 마디 했다. "너 진단서 하나 챙겨 다녀.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진단서를 꺼내 보여줘. 야, 진단서로 배틀 뜨자고 해!" 생각지도 못한 말에 웃음이 터졌다. 진단서 배틀이라니! 그날 밤 침대에 누워 상상에 돌입했다. 자, 병원인간 다음에는 이렇게 말해보는 거야. "선생님, 제가 여기에 앉아서 언짢으시죠? 그런데, 제가 지금 고관절, 슬관절 괴사로 뼈가 무너지고 있어요. 골다공증 고위험군이기도 하죠. 아, 의사 선생님은 그냥 60대의 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하던데, 그래도 제가 앉으면 안 되는 걸까요?" 낄낄. 생각만 해도 재밌다. 이런 상상을 왜 하냐고? 하면 재밌냐고? 나도 하나 물어보자. 로또 1등 당첨되면 뭐하지?라는 상상하면 너무 재밌잖아요! 짜릿해! 병원인간들도 숨 쉴 구멍 하나는 있어야죠. 이렇게라도.



피해의식과 자기 검열 그 사이 어디쯤


그날따라 유독 노약자석 자리가 많이 비어있었다. 오늘은 조금 덜 쫄고 집에 갈 수 있겠군이라는 마음이었는데 앞자리에 앉은 아저씨의 진득한 시선이 꽂혔다. 내 행동을 한참을 따라다니는 시선. '자리가 이렇게 비어있는데 이렇게까지 죽일 듯 쳐다볼 일인가?' 평화로웠던 퇴근길이 일촉즉발의 눈치작전으로 바뀌는 건 순간이었다. 5분, 10분. 애써 시선을 피하다가 고개를 들면 이내 다시 마주치는 눈에 짜증이 올라왔다. '뭐라고 할 거면 빨리 뭐라고 하던가. 진짜 왜 저러는 거야.' 그리고 갑자기 내 옆자리로 자리를 옮겼다. 올 것이 왔다는 생각뿐이었다. 기어코 옆자리까지 올 건 또 뭐람. 10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행동 시나리오가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아저씨 입에서 나온 말에 모든 시나리오가 하늘로 흩뿌려졌다.


"내가 핸드폰에서 이걸 하는데, 잘 안되는데… 한 번 봐줄 수 있어요?"


아뿔싸. 내 예상이 빗나갔다. 20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젊은 사람에게 말을 걸까 말까를 고민했을 것을 생각하니 공격 태세를 하고 있던 마음이 모나게 느껴졌다. 지하철에 내려 집으로 걸어오는 동안 마음은 더 엉망이 되어버렸다. 선의를 선의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음이 꼬일 대로 꼬여버린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그동안 쌓인 안 좋은 경험들이 모여 오늘의 상황까지 왔다고 생각하니 어디서부터 문제인지 찾을 수도 없었다. 온몸에 피해의식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것만 같았다. 아침, 저녁 지하철역에 도착할 때마다 그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노약자석은 쳐다볼 생각도 못했다. 열차에 앉을자리가 없어 보이면 다음 열차를 기다렸다. 자리가 텅텅 빈 열차가 올 때까지.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건지, 아닌지 누구에게 묻지도 못했다. 가까운 사람에게 말할수록 답은 더 흐려질 것 같았다. 현상보다 내 감정을 더 먼저 생각할 것 같아서. 내 얼굴에 침 뱉기를 할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꾹꾹 참고 있던 날들을 보내던 중 심리상담가로 활동하고 있는 동료를 만날 일이 생겼다. “있잖아, 사실은 이런 일이 있었는데, 나 너무 부끄럽고 창피해. 나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실은 나도 피해의식에 똘똘 뭉친 병원인간인가 봐.”

 

그런데, 돌아오는 답은 나에게 또 다른 충격이 되었다.

“지니, 근데 다시 생각해봐. 너도 모르게 검열하고 있던 거 아냐? 지니가 노약자석에 앉아도 된다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스스로도 계속 의심하고 있던 거지. 스스로 진짜 내가 여기에 앉아도 될 사람인지.”


그녀의 직업 때문인가, 매 번 대화를 나눌 때마다 무료 심리상담을 받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많지만 이번에는 정말 돈을 쥐어주고 싶었다. 선생님, 이건 이번 달 친구비를 가장한 상담료입니다.


사실 괜찮지 않아도, 입에서 괜찮아라는 말이 먼저 나가는 것처럼. 나는 꾸역꾸역 눈칫밥을 먹으면서 애써 웃으며 나는 눈칫밥이 서럽지 않아!라고 말했던 것이다. 노약자석에 앉아있다 머리가 하얗게 센 어르신들이 오면 일어나 양보하고 싶은 마음과 나의 몸 상태 사이에서 늘 무게를 다. 그 수많은 눈들이 나를 나쁜 년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아서.


병원인간들에게 자기 검열은 일상이다. 자기 검열은 스스로를 갉아먹는 것임을 너무나도 잘 알지만 쉽게 놓기 어렵다. 병원인간은 사회에서 정상의 궤도를 벗어났다고 판단되기 때문에. 그래서 검열의 기준은 평균보다 더 높을 가능성이 높다. 안병원인간*만큼 해내야만 한다는 생각이 기본적으로 장착되어있을 테니까.

*적절한 표현을 못 찾아 병원인간의 반대말로 안(not)병원인간이라 칭해본다. 보통사람이라는 표현은 쓰고 싶지 않다. 보통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내가 노약자석에 앉아도 될 상인가


노약자석에서 한 소리 들은 경험은 나만 겪은 일은 아닐 거다. 병원인간이 아니더라도 정말 체력이 떨어지는 날, 배가 미친 듯이 아픈 날, 열이 펄펄 끓는 몸살이 난 날 혹은 다리를 다쳐 깁스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비슷한 상황을 겪은 이야기들도 많이 들었다.


어쩌면 당신도, 고민한 적이 있을 거다. ‘저 빈자리에 앉고 싶다.’ 그런데 앉은 날보다 참은 날이 더 많을 거다. 내가 앉아도 되는 걸까?라는 질문을 덧붙여서.


이렇게 장황하게 노약자석에 열변을 토하는 것은 1n년차의 병원인간도 노약자석에서 작아지기 때문에. 그래서 오늘은 이렇게 외쳐보고 싶다.


병원인간들아, 우리 검열하지 말자. 그냥 앉자. 일단 앉자. 내가 아픈 건 내가 제일 잘 아니까. 

(겉보기에 병증이 드러난다는 보장은 없지만) 나보다 이 자리가 필요하다고 추정되는 또 다른 병원인간이 있다면 그때 자리를 내어줄 상황이 된다면, 자리를 양보하자. 그래도 충분하다.


그리고 누군가 '당신이 왜 거기에 앉아있냐'라고 묻는다면, 세상 똘망똘망한 목소리로 되묻자.

"선생님, 교통약자란 무엇일까요?"


"교통약자"란 장애인, 고령자, 임산부, 영유아를 동반한 자, 어린이 등' 생활을 영위함에 있어 이동에 불편을 느끼는 자를 말한다.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 제2조 1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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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 나이는 30대인데 신체 나이는 60대입니다.

젊은 병원인간들이 조금 더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꿈꿉니다.

가끔은 노약자석에 앉고, 아주 가끔은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서른한 살.

대학교 입학, 졸업, 취업 그리고 퇴사까지 나의 의지만큼 의사의 소견도 중요한 몸을 가졌지만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은 사람. 커리어와 함께 병명도 쌓여가는 삶을 살고 있다. 병원에 가는 것이 숨 쉬는 것처럼 익숙한 사람이라 스스로를 병원인간이라 부른다.

늙음은 아픔이 용인되지만 젊음에게는 아픔이 용인되지 않는 사회에서 병원인간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천천히, 꾸준히 이야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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