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식사하며 모처럼 한국어 뉴스를 보다가, 정부 청사에 내걸린 현수막이 눈에 들어온다. 아, 저게 새 정부의 슬로건이구나. 대통령 취임한지가 언젠데 인식이 늦어도 한참 늦다. 정보가 없어서가 아니라 당장 눈에 안 들어오고, 옆에서 아무도 이야기를 안 하니 머리에 주입이 안 되는 것뿐이다.
그런데 말이지... 평소 아무 생각도 없다가 갑자기 기분이 팍 나쁘다.
슬로건을 뜯어보자. 하나하나.
1. 다시, 대한민국
새 정부니까... 그래그래... 새출발 하고싶겠지. 그런데 다시, 뭘??? 다시, 부정부패? 다시, 유전무죄? 다시, 지들끼리만 짜고 치는 고스톱? 다시, 인권탄압 삼청교육대 대한민국? 다시, 검찰천국 대한민국? 다시, 재벌특혜 대한민국? 나는 차떼기당 이전부터 보수정권이 옛날에 지들끼리만 해 먹던 작태를 많이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라, 이 희망적으로 보이길 바라는 "다시, (뭔가 알아서 상상하시고) 대한민국"의 이미지가 전혀 긍정적이지가 않다... 무슨 슬로건이 시작부터 빽도야?
"아니 사람이 왜 그리 부정적이요?"
ㅡ_ㅡ 아니 그러니 평소에 좀 잘 하시지. 내가 아무런 배경지식도 없는데 부정적인게 아니지 않나... 내 이미지는 내가 만들듯, 보수정권의 이미지는 보수정권이 만든거지 나보고 어쩌라고.
암튼 내 눈에는 다시 지들끼리만 다 해먹겠다는 문구로 보이는 첫 번째 슬로건부터가 영 마음에 안 든다. 차라리 "다시, 위대한 대한민국"이나, "다시, 행복한 대한민국"이나 정부가 바라는 키워드를 넣었더라면 저런 감정이 들지는 않았을 것 같다. 사실, "다시"라는 표현 자체가 과거 회귀형이라 미래지향 슬로건으론 빵점이다.
2. 새로운 국민의 나라
사실 두 번째 문구에서 마음이 더 크게 팍!!! 상했다.
이게 좀 의미가 이중적인데, "새로운 국민(의 나라)" 또는 "새로운 (국민의) 나라"로, 새로운이 수식하는 단어가 뭔지 불명확하다. 언어를 명확히 사용하려면 수식어는 수식받는 단어와 가급적 가까이 두라고 교육받았으니, "새로운 국민(의 나라)"쪽이 더 작가의 의도에 가까운 게 아닐까 싶다. 나라를 강조하고 싶었으면 "(국민의) 새로운 나라"라고 썼겠지. 어쨌든 해석은 양쪽 다 열려있는 게 사실이다.
정권을 뒤집고 새로 잡았으니 "새로운 나라"라는 표현은 일단 인정. 사실 이것도 엄밀히 말하면 새로운 정권인 거지 국호를 바꾸는 건 아니니 새로운 나라라는 표현도 너무 나간 느낌이 있지만 이 정도는 눈감아 줄 수 있다. 그런데, "나라"라고 하면, 당연히 국민의 나라이지 대통령의 나라인가? 국회의원의 나라인가? 검찰의 나라인가? 아니면 이전에는 "좌파의 나라"였는데 이번에 "국민의 나라"로 돌려준다는 건가?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헌법 1조 몰라? 몰라서 알려주는겨? 대체 무슨 속셈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굳이 수식이 필요없는 "국민의" 이라는 사족을 불필요하게 생색내듯 붙인 꼴밖에 안 되는 것 같다.
"새로운 국민"
하... 이 표현이 진짜 의도라면 정말 미치겠다. 아니, 정권이 바뀌었으면 바뀌었지, 나는 그대로인데 내가 왜 새로운 국민인가? 새 정부 들어왔으니 정신개조라도 하라는 건가? 니들 정말 이럴래? 내가 안 기르던 수염 조금 길렀다고 새로운 국민이란거야? 내가 새로운 국민으로 개조가 안되면 새로운 국민 수입할래? 이민자 잔뜩 받아들여서 그 사람들을 새로운 국민으로 부르고 싶은거야? 진짜 이건 욕을 싸질러주고 싶을만큼 기분이 많이 많이 많이 나쁘다.
나는 깃발, 로고, 슬로건의 힘을 크게 믿는 사람이다.
깃발, 로고, 슬로건은 조직의 정신을 하나로 모으는 구심점 역할을 한다. 같은 로고 같은 깃발 아래, 같은 슬로건을 외치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으면 강한 소속감과 결속력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직원들에게 깃발, 로고를 취급하는 일은 각별히 신경쓰게 교육하고 있으며, 잘못된 사용이 있으면 크게 꾸짖는다.
"당신들 지금 우리 가치를 떨어뜨리는 일을 하고 있어요!"
슬로건도 마찬가지다. 짧고 굵은 한 문장 속에 조직의 염원과 가치관을 모두 담아야 한다. 슬로건이 애매하고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으면 이건 실패한 거다. 아니 그런데... 새 정부 국가 슬로건이 왜 저따구야..... 저거 누가 만들었어....? 설마 광고사에 용역주고 대충 만든 거 아니겠지? 대체 누가 저걸 승인한 거야?
나는 크게 지지하는 정당도 없고, 크게 싫어하는 정당도 없다. 대신 좀 많이 비판적이다. 대충 다 거기서 거기다~ 하는 중립파. 쓰다 보니 기분 나빠서 현 정권 비판 목소리도 담기는 했는데 정치 성향은 중립파니까 정치공격 금지! 반사!
악플 달릴까 봐 소심해서 오늘 글만큼은 댓글창 닫아놔야겠다. ㅡ_ㅡ;;;
암튼 정부 슬로건 비판 좀 했다고 잡아가기 없기. 듣고 보니 열받는 이유가 그럴싸하잖아?
나 잡아가시려면 파키스탄 오셔야 되겠다.
[글 발행 5일 뒤 살을 붙여봅니다.]
친한 브런치 작가님께서 의견을 주셨다.
"아니, 이렇게 공감되는 글에 왜 댓글을 막으셨어요~ 공감 100개는 드리고 싶은데."
그러게... 나도 댓글 막고 싶진 않은데 공격받는 건 싫어서. 사소한 단어 하나에 열폭하는 정치꾼들이 많은 거도 안단 말이지.... 그래서 준비한 공격방지용 자체 질문 답변 추가.
Q1. 정부가 좋은 메시지를 준비하려고 한 건데 좀 좋게 해석하고 봐주시면 안 됩니까?
A1. 그럼 "좋은 메시지"를 준비하시면 되잖아요. 누가 뭐라 그럽니까. 저건 "슬로건"이잖아요. "슬로건"의 기본은 직관적 이해가 되어야하고 중의적인 해석이 되면 곤란해요. 그리고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구요. 저는 아무리 다시 읽어봐도 과거로 회귀하는 대한민국은 긍정적으로 보이지가 않습니다. 백번 양보해서 "다시, (위대한) 대한민국"이라고 해도 저는 과거의 위대한 대한민국보다는 더욱 발전한 위대한 대한민국이면 좋겠습니다. 솔직히 지금보다 더 위대했던 대한민국이 과거에 있었나요?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보죠. 과거에 제가 일했던 조직의 슬로건 중 하나가 "(어쩌고 어쩌고) 나가자"가 있었어요. 저는 슬로건을 외치면서... 이게 회사를 관두고 나가자는 소린지, 앞으로 나아가자는 소린지 늘 헷갈렸습니다. 또 강조하지만 슬로건은 직관적이어야 하며 애매하게 이중적으로 해석되면 곤란해요. 나이키의 "Just Do It"같은 거, 애플의 "Think Different"같은 거, 단순하며 직관적이며 전달력이 강하잖아요.
Q2. 비판을 위한 비판만 하는 것은 아무 도움도 안 됩니다. 왜 그렇게 빨간당에만 부정적이신거죠?
A2. 저는 특정 정당이나 계파를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점 꼭 강조하고 싶어요. 그냥 국민의 한 사람으로 제 이름(=국민)이 들어간 저런 슬로건이 무지무지 마음에 안 들고 왜 마음에 안 드는지 밝힌 것뿐입니다. 저는 정치색이 별로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마음에 안 드는 정치나 행정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은 사람인 것뿐이에요. 그 증거로 파란당이 집권했을 때도 비판글을 써본 적이 있네요. 강조하지만, 특정 정당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행위가 제 상식과 기준에 안 맞을 때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비판하는 것뿐입니다. 무조건 제 말이 옳다고 강요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아무튼, 생각보다 라이킷도 많이 받았고, 아직까진 정부 요원들이 잡으러 오지도 않았으니 살포시 댓글 창을 열어보기로 했다. 나는 댓글도 올리는 작품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댓글이 안 달려 사실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반대하셔도 좋은데 욕은 하기 없기. 여전히 소심한 소시민이다. ㅡ_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