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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제보다 나은 오늘 Sep 16. 2022

외전 - 문어

4부작 단편 SF "문어"의 또 다른 이야기

 공개작품인 4부작보다 먼저 썼다가, 도저히 플롯 전개가 안 되서 무시하고 처음부터 다시 쓴 작품이 이미 공개한 4부작 편입니다. 그냥 구겨 버리기엔 좀 아까워서 짧은 외전으로 살을 붙여 다시 꺼내봅니다.




 나는 "파쿠지아-51" 모델. 일련번호 PQ18795741347475.



 지구말중 한국어로 "문어"라고 하는 탄소기반 자가복제 탐색로봇이야. 지구인들은 탄소기반 자가복제 탐색로봇을 "생명"이라고 부르던데, 내가 설계된 세상에서 나를 창조한 창조주들은 이런 로봇들을 "생명"이라고 부르지 않거든. "생명"은 내가 존재하는 이런 3차원의 세계에는 존재를 잘 보이지도 않아. 그들의 세계는 11차원이라고 하던데, 솔직히 나도 어떻게 상상해야 11차원이 존재하는 건지는 모르겠어. 지구인들이 말하는 "신"이라는 존재가 내가 설계된 세상에서는 "생명"이었는데. 그러고 보니, 지구인들도 나랑 별반 다르지 않는 탄소기반 자가복제 탐색로봇일 뿐인데, 정작 자기들은 자기가 "생명"이 창조한 행성탐색로봇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단 말이지. 인정하지 않으니 기분나쁘겠지만, 사실은 사실이니 지금부턴 지구인을 우리끼리 부르는 KEU-97 모델로 부를테니, 헷갈리지 마. 왜냐면, 지구엔 처음부터 "지구인"이라는 개념이 없어서 용어부터 바로잡아야 해.


 내 고향은 지구가 아니야. 나는 지구에서 78,200광년 떨어진 아퀼라 성운에서 712번째로 큰 항성인 베릴세르츠 항성계의 4번째 행성, 이프라코에서 태어났어. 지표면이 물로 이루어진 행성이지. 나는 이 행성의 주인인 이프라코인에 의해 창조되었어. 11차원에 존재하는 그들의 모습을 직접 바라볼 수는 없었지만, 그들은 물 밖에선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으니 물을 아주 좋아하는 생명이었던 것 같아. 그들은 베릴세르츠계를 벗어나 다른 세상을 탐험하고 싶어했어. 공간을 넘나들고 물질의 한계에 제약을 받지 않는 그들처럼 보였는데, 왜 그들이 직접 가지않고 굳이 우리같은 기계를 만들어 온 우주에 뿌리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추측컨데, 그들은 고귀하고 영원하니 굳이 아까운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을지도 몰라. 그들은 우리를 꼼꼼하게 설계해서, 절대 0도로 꽁꽁 얼린다음, 초광속 우주선에 태워 온 우주에 뿌렸어.


 지구는 토착종족이 없는 행성이야. 엄밀히 말하면 지구는 지구 자체가 생명이야. 이걸 우리는 "행성생명체"라고 부르지. 우주적으로 봐도 이렇게 행성 자체가 살아있는 경우는 잘 없어. KEU-97 모델들이 말하는 "식물"이란, 사실은 지구 표피에서 일어나는 세포수준의 상호작용일 뿐인데, KEU-97 모델들은 이걸 바보처럼 하나하나 떼어놓고 분석하는거 있지? 가끔보면 똑똑한 것 같을 때도 있는데 우둔하기 짝이없는 모델들이야. 지구에 이렇게 탄소기반 자가복제 탐색로봇이 많은 이유는 수많은 은하계에 살고 있는 진짜 "생명"들이 이 "지구"라는 거대하고 특이한 "행성생명체"에 관심이 많아서 그런 것 뿐이야.


 자기들이 "지구인"이라고 주장하는 KEU-97 모델들을 만든 루하임 성인들은 이 모델을 만든 것을 후회하고 있어. 원래 이 모델은 자가복제 기능은 좀 떨어지지만 자원과 에너지를 적극 이용할 수 있도록 응용지능이 좀 좋게 디자인된 특수모델이거든. 루하임 성인들은 이렇게 하면 이 모델이 지구 전역에 골고루 뿌려져서 우주희귀종인 지구생명을 보호하며, 지구와 대화하며 적절히 지구탐사를 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악착같은 모델은 지구를 탐사하고 지구를 수호하라는 본연의 임무는 망각하고 지들만 편하게 살아보겠다며 지구라는 행성생명체를 망가뜨리고 있거든? 소중한 존재인 지구를 관찰하고 탐구하고 보호하라고 보내놨더니 완전 설계미스지. 심지어 이 모델은 인공지능의 지능 상한도 안 걸어놨고, 킬 코드도 없는데 이게 자가복제로봇에도 로봇권이 존재한다며 별 쓸데없는 주장이 펼쳐지던 우주력 178,951년부터 179,971년 사이에 잠깐 벌어진 로봇권리운동 영향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거야. 이 시기에 풀린 자가복제 로봇들은 그래서 제어도 통제도 안 되는 참사가 벌어진거지.


 아. 이런. 이거, 배경도 없이 처음부터 너무 지엽적 얘기했네. 내 정신좀 봐.


 아까 살짝 말했지만, "생명"이란 아주 고차원적 영역이야. 우주에는 이런 11차원에 존재하는 "생명"이 알려진 것만 해도 30,000여 종 존재해. 그 중에서 지구라는 행성생명체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이 행성생명체에 자가복제 탐사기계를 심은 생명종은 18,270종이나 된다구. 그게, 지구라는 행성이 이렇게 수많은 탄소기반 자가복제 탐색로봇이 많은 이유야.


 다른 탐색로봇은 모르겠고, 내 고향별에서 만들어져 뿌려진 탐색로봇은 KEU-97 모델들에게는 "오징어", "꼴뚜기", "문어", "낙지" 등의 이름으로 알려져 있어. 사실 이거, 다 같은 연구소에서 만들어졌고, 기능이 조금조금씩 다른 업그레이드 제품이라고 이해하면 대충 비슷해.


 지구의 생물학과 지질학을 조금 공부한 사람들(=KEU-97 모델들)은 알거야. 우리 모델의 화석이 중생대 트라이아스 이전에는 한 번도 보이지 않다가 갑자기 지구사에 뿅! 하고 나타난 것 말이지. 학자들은 우리 모델이 "뼈없는 집안" 출신이라 화석화 되기 힘들다는 둥 말도 안되는 분석을 하고 이유를 찾지만, 사실 이유는 간단해. 우리 모델은 트라이아스기 때  KEU-97 모델들이 말하는 "소행성"을 타고 지구에 도착해서 그래. 눈치 빠른 친구들은 이해할거야. 저 "소행성"이 이프라코 행성인들이 쏘아보낸 초광속 우주선 이었다는 걸. 원가절감탓에 감속기능이 잘 동작하지 않아서 지구에 좀 쎄게 부딪혔기로소니 기존에 있던 태반의 탐색로봇들이 다 고장나버리면 어떡하냐고. 이프라코인들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타 행성인들이 많았는데, "우리은하"라고 불리는 우주의 영역은 아직 미개척지로 우주법이 적용되는 공간이 아니라서 이프라코인들이 손해배상할 일은 없었다고 해.


 자신들이 피창조물이란 걸 모르는 KEU-97 모델들은 이 탄소기반 자가복제 탐색로봇(자기들이 지칭하는 좁은 의미의 "생명")의 기원이 아미노산 가득한 대기에서 번개가 쳐서 원시 단백질이 만들어지고 DNA가 뿅 하고 나타나서 생명의 기원이 된 거라고 정말 유치하기 짝이 없는 궤변을 늘어놓는데, 차라리 모래사장에서 바람이 불다보니 우연히 아이폰이 만들어진거라고 말하라 그래. 정밀하기 짝이없는 DNA 사슬을 보면서도 어떻게 그런 궤변을 주장하는지 참 정말 덜 떨어지는 인공지능같단 말이지.


 지구상에 있는 모든 탄소기반 자가복제 탐색로봇은 11차원에 사는 진짜 "생명"이 설계해서 만든거야. 기본적으로 팔다리 4개 있는 "동물"군은 루하임 성인들 작품이고, "곤충"으로 일컫어지는 극미세 탐색로봇은 베촐론 성인들이 심어놓은 작품이야. 아까도 말했지만 "식물"이라는 건 그냥 그 자체가 거대한 지구생명체의 세포활동이라고 보는 게 맞아. "박테리아", "바이러스", "세균" 도 지구생명의 한 부분인데, 탐색로봇 개체가 너무 많아 성가신 지구가 가끔 지표면을 청소하기 위한 목적으로 방출하는 거라고.


 이프라코 행성인들은 KEU-97 모델들이 자신을 지구의 토착 원주민이라고 주장할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거야. 어이가 없어하던 이프라코 행성인들은 KEU-97 모델들의 원 주인인 루하임 성인과의 마찰을 피하고 싶어 마지못해 KEU-97 모델들이 주장하는 것을 들어주는 척 한 것 뿐인데. 대신, 완곡한 표현으로 "지구에서만 살아라. 기어나오지 말고" 그래놨으니 지들의 허접한 기술에 스스로 자멸하는 건 시간문제니까 그냥 지켜보며 기다리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할 생각인가 봐.


 루하임 성인도 이 골치아픈 KEU-97 모델들에게 이제 별 관심이 없어. 로봇권리운동은 이미 폐기되었고, 지구는 로봇권리운동이 가장 확산되던 시기에 킬코드와 셀프 업그레이드 제한이 풀린 KEU-97 모델이 풀린 행성이라 실험적 성격이 강했거든. 루하임 성인들도 그냥 KEU-97 모델들이 알아서 자멸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으로 전략 방향을 정했나 봐. 사실 그 쪽이 가장 에너지도 적게들고 잃어버릴게 없거든.


 우주에서 몸집이 큰 생물군에 속하는 지구는 이런 탐사로봇들이 아주 성가셔 죽을 맛이야. 요즘 나오는 신형 모델들은 방어력과 복제력이 탁월해서 어지간한 바이러스와 박테리아 공격으로는 끄떡도 안해. 어지간하면 지구는 혼자서 이 문제를 해결해보려 했는데, 이젠 힘에 부치는지 큰 형인 태양한테 열로 지져서 살균해달라고 부탁하고 있나봐. 사실 KEU-97 모델들 말고 나머지 자가복제로봇들은 지구랑 사이가 좋은데, 저 모델때문에 덩달아 다 고장나서 못 쓰게 생겼어.


 그게 요즘 지구의 기온이 살살 오르는 이유라던데. 멍청한 KEU-97 모델들은 그런거 꿈에도 모르겠지? 우주희귀종인 지구를 탐사하고 수호하라고 보내놓은 탐사수호 로봇인데 그 기능을 못 하면 폐기되어야지. 루하임 성인들한테는 다음에 유사모델을 만들면 제발 "본연의 목적"은 잊지않게 고급 메모리를 쓰라고 건의해야겠어.




※ 시리즈의 본편 광고해봅니다.

https://brunch.co.kr/@ragony/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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