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운폴 - 더 보잉 케이스'를 보고
해외 지사장 신분이라 모든 직장인이 선망하는 "날마다 무두일"을 누리는 나지만, 그렇다고 출근이 즐거운 건 아니고 당연히 주말만 쳐다보고 직장생활하는 숙명의 샐러리맨 신분. 아기다리 고기다리던 주말이 왔다. 오늘은 마음 느긋하게 영화 한 편 때리고 자야지.
정말 오랜만에 넷플릭스 접속을 해서 이것저것 살펴보다가 흥미로운 제목을 발견했다. '다운폴 - 더 보잉 케이스'
잘못된 신념을 가진 경영진이 어떻게 회사를 망가뜨리는지, 첨단기술시대 어떻게 최신 민항기가 취역한 지 두 달 만에 추락하는 건지 원인을 세세하게 분석해서 알려주는 시사 고발 다큐멘터리. 그래. 허무맹랑 SF만 보는 것보단 이런 다큐멘터리도 흥미진진하고 재밌지. 이걸로 결정.
보잉 하면 747 점보 여객기로 유명한 에어버스와 쌍벽을 이루는 항공기 제조회사. 모르는 사람이 드물 듯하다. 대적할 경쟁사가 없을 정도로 잘 나가던 보잉은 점점 에어버스의 추격을 허용하더니, 매출과 수주량 모두에서 에어버스에 역전을 허용하고 만다.
초대형 여객기의 시대가 저물고 중소형 여객기 직항 편을 늘리는 시대가 되었는데 에어버스가 이 틈을 잘 비집고 들어간 전략이 주요한 것. 에어버스는 기존 A320를 개조한 A320 NEO라는 여객기를 런칭하여 보잉보다 연료소비효율이 낫다는 점을 강조하였고 고유가시대 기름값을 아끼려던 항공사들은 연료효율이 나쁜 보잉 737 기종보다 에어버스를 선택했다.
시장에 대응할 기체가 없던 보잉은 다급해졌다. 신형 항공기를 개발하려면 최소 10년 이상은 걸릴 텐데 그 기간 동안 대응을 못 하면 에어버스에 완전히 시장을 뺏기게 될 것이다. 그리하야, 보잉이 내놓은 대응은 1965년 처음 시장에 선보였던 보잉 737을 개조해서 효율 좋은 신형 엔진을 달고 시장에 내놓는 것. 이 모델이 보잉 737 MAX 기종이다. 737 MAX는 기체 길이와 최대 좌석수에 따라 737 MAX 7, 737 MAX 8, 737 MAX 9, 737 MAX 10 기종으로 세부적으로 나뉜다.
737이 세상에 나온 지 40년도 더 된 기체다 보니 보잉은 이 기체를 완전히 대체할 신형 모델을 개발할 계획을 가지고 있긴 했다. 그런데 에어버스 A320 NEO가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보잉은 시간이 많이 걸리는 신형 모델 개발 계획을 취소하고 737을 개조하기로 2011년 결정한다. 그리고 이 개조계획은 착수 4년 만에 마무리되어 2015년 1호기가 출고되었고 2017년 미국 연방항공국의 운항허가를 취득하며 공식적으로 상업운항을 시작한다.
737 MAX는 런칭과 동시에 항공기 시장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특히 세계 각국의 저가 항공사에서 인기가 높았다. 2019년 1월 말까지 737 MAX 계열 확정 발주량은 무려 5,011대에 달했다.
2018년 10월 29일 인도네시아 라이온 에어 610편이 수카르노 하타 국제공항 이륙 13분 만에 바다로 추락해 탑승자 189명이 전원 사망하였다. 이는 보잉 737 MAX 8의 첫 사망사고 기록인데, 해당 기체는 라이온 에어에 인도된 지 2개월 밖에 안 된 말 그대로 "페인트도 안 마른" 새 기체였다.
보잉은 "조종사의 실수 또는 조종미숙"을 원인으로 몰아갔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기종에서 매우 유사한 사고가 다시 발생하며 기체 결함 의혹이 사실로 밝혀지고 만다.
인도네시아 라이온 에어 610편 추락사고 발생 후 불과 5개월이 지난 2019년 3월 10일, 에티오피아 항공 ET302편이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 볼레 국제공항 이륙 6분 만에 아디스아바바 동쪽 외곽 상공에서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역시 기체는 보잉 에어 737 MAX 8.
조종사의 과실을 주장하며 제작결함을 숨기려던 보잉은 최신예 민항기가 출고되자마자 두 편이나 추락하는 빼박 증거를 더 이상 감출 수 없었다. 항공 관계당국과 합동으로 진행한 사고조사에 밝혀진 사실은 다음과 같다.
※ 사고원인을 요약한 유튜브 영상
보잉 737은 세상에 나온 지 40년도 더 된, 설계개념은 50년이 넘는 장수 기체이다. 누적 생산량이 1만 대가 넘는 초대형 베스트셀러이기도 하며, 그만큼 기체의 안정성은 검증이 끝난 안전한 기체이다. 문제는, 737 MAX는 사실 동체와 날개만 같았지, 기존 737과는 비행 특성은 완전히 다른 기체라는 데 있다. 737 MAX는 에어버스 A320 NEO에 대항하기 위해서 신형 고효율 엔진을 달고 나온 개조형 기체인데, 문제는 이 엔진에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엔진 자체는 문제가 아닌데, 이 엔진이 기존 엔진보다 크기가 커지면서, 동일한 장착점에 이 엔진을 연결할 수 없었다. 기존 장착점에 신형 엔진을 달면 엔진이 바닥에 끌릴 지경이었다.
해결책은 동체 노즈기어 높이를 살짝 올리고 엔진 마운트를 날개 조금 위쪽으로 바꿔달아서, 엔진이 바닥에 안 닿게 하는 것이었는데, 이렇게 하면 비행특성이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엔진이 기존보다 앞으로 이동하고 추력이 커지면서, 이륙과정에서 기수를 치켜들게 하는 비행특성이 생겨버렸고, 이 과정에서 받음각이 너무 커져버리면 비행기가 양력을 상실하고 추락할 수 있는 위험이 보고된 것이다.
엔지니어들은 이 위험을 해결하기 위해 또 다른 장치를 부착하는데, 이것이 문제의 MCAS이다. MCAS(Maneuvering Characteristics Augmentation System, 기동특성증강시스템)는 이륙 중 받음각이 지나치게 커지면 시스템에서 이를 자동으로 감지하고 기수를 자동으로 내려서 실속(비행기가 양력을 상실하는 상황)을 방지하는 장치인데, 앞서 언급한 두 추락사고 모두 이 MCAS가 오작동해서 멀쩡히 잘 나는 비행기의 기수를 시스템이 강제로 내려서 땅으로 꼬꾸라지게 한 것이다.
MCAS... 이 자동시스템이 문제라면 문제를 인식한 조종사가 이 장치의 사용을 중단하고 수동으로 비행기를 살려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게 그리 간단하지 않다. 문제는... 보잉은 이 신형 자동장치의 존재를 고객사에 알리지 않고 비밀로 취급했다. 이게 다 이유가 있다.
737은 공전의 베스트셀러이다. 그런데, 737 MAX를 잘 팔아먹으려면 737 하고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강조해야 했다. 기존 737과 비행특성이 완전 다르다는 것이 밝혀지면 조종사들은 기체운항면허 취득을 위해 장시간 기종전환 훈련을 받아야 하고, 이는 항공사 비용증가의 큰 이유가 된다. 가뜩이나 고연봉 조종사들이 실제 운항도 못 하고 기종전환 훈련을 위해 수십~수백 시간 시뮬레이터 훈련을 해야 기체조종면허가 발급이 된다면 항공사가 좋아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보잉은 737 MAX를 철저하게 기존 737의 파생개조모델로 홍보하고 정부당국을 속였으며 기존 737 조종면허를 보유한 조종사들이 단 몇 시간의 태블릿 교육만 이수하면 737 MAX를 운항할 수 있는 면허를 발급받을 수 있도록 했으며, 이 과정에서 MCAS의 존재는 철저하게 숨겼다. MCAS가 알려지면 비행특성이 달라진 것이 정부당국에 신고가 될 것이고 이 경우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시뮬레이터 교육을 피할 수 없게 되며 이는 항공사들이 737 MAX보단 에어버스 기종을 선택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니까.
MCAS 시스템 자체도 허술했다. 통상 항공기처럼 조종계통에 직접 영향을 주는 계기는 최소 2개 이상의 예비장치를 만들어서 하나가 고장 나더라도 나머지 하나가 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2중으로 구성하는데, 받음각 센서 자체는 좌우 2중으로 구성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MCAS는 받음각을 경고해 주는 센서의 값을 한쪽에서만 취하도록 구성되어 있어 받음각 센서가 고장 나더라도 시스템이 이를 인지할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좌우 받음각 센서의 차이가 많이 나게 되면 이를 조종사에게 알리고 고장을 대비하게 해 주는 경고장치는 옵션으로 판매해서 대부분의 항공사들은 이 옵션을 처음부터 선택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자동차를 팔면서 안전벨트하고 에어백을 옵션으로 파는 경우랑 별반 다르지 않았던 셈.(이후 이 경고장치는 정부의 권고로 필수옵션으로 바뀌었다.)
보잉은 미국을 대표하는 첨단 기술회사 중 하나로 국민들에게 존경받고 세계적으로 신뢰받는 회사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 회사는 1990년 맥도널 더글러스(McDonnell Douglas)와 합병하면서 기업 문화가 변질되기 시작했다. 이전 보잉은 엔지니어링 회사로 시작해서 기술과 품질, 안전에 대해서는 타협하지 않는 내부문화가 있었다. 기술개발과 적용과정에서 조금이라도 미심쩍은 일이 발생하면 다음 단계로 진행하지 않고 내부적으로 모두가 안전에 대한 확신이 들 때까지 해결하고자 하는 성향이 강한 회사였다. 그런데, 맥도널 더글러스와 합병 이후 주요 경영진이 맥도널 더글러스 출신으로 교체가 되면서 수익 창출을 최우선하도록 기업문화가 변질되었다. 고연봉 장기재직 엔지니어를 해고하고, 현장 품질관리 인력을 1/15로 줄였으며 문제해결보다는 목표공기를 맞추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는 식으로 회사 전체의 운영철학을 바꾸어버렸다.
737 MAX의 첫 번째 사고 때, 보잉은 이미 MCAS가 추락항공기 사고의 원인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이 때라도 사고원인을 시인하고 동일기종 운항중단 결정을 하고 보완책을 마련했더라면 두 번째 사고는 피할 수 있었다. 보잉은 첫 번째 사고 이후 MCAS의 존재를 알리고 오동작 등 비상상황시 MCAS 작동 스위치를 내리라는 비상운영 매뉴얼을 각 항공사에 알렸고, 두 번째 사고기 조종사는 이를 착실히 이행했음에도 추락사고는 피할 수 없었다. MCAS는 기수가 하강토록 전동으로 수평미익을 최고치로 올려버린 상황에서 스위치를 끄는 행위 만으로는 이미 수평미익을 제자리도 돌릴 수 없었고, 주 날개 조종간 조종하기에도 벅찬 조종사가 수평미익을 수동으로 조작하기에는 물리적 시간이 너무나 부족할 수밖에 없었던 것. 결국 첫 번째 사고 이후의 비상매뉴얼도 검증되지 않은 엉터리였던 것이다.
결국 두 번째 사고 이후, 사건조사보고서가 나오기도 전에 세계 각국에서 먼저 보잉 737 MAX 기종의 운항을 거부하고 운항중지 명령을 내렸으며, 결국 미국도 이를 받아들여 안전경보를 발행하고 운항중지를 명령하였다. 이후 보잉은 문제해결책을 제시하고 당국의 운항재개 승인을 받음으로써 2020년 12월 비행을 재개할 수 있었지만 이미 보잉의 신뢰도는 땅으로 추락한 뒤의 일일 뿐이었다.
항공산업 태동기도 아니고, 21세기에 최신예 민항기가 기체 설계 결함으로 추락을 하다니. 몇 년 지난 얘기긴 하지만 정말 믿기 힘든 일이다. 그리고 이 추락사고의 이면에는 안전경시 수익창출 최우선의 경영철학이 숨어있었다니. 그깟 돈이 뭐라고 참 씁쓸하다.
사고 이후 보잉의 행태는 추악하기 짝이 없었다. 737 MAX를 출시하기 전에도 그들은 기체의 불안정성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사고 전 라이온 에어 항공사는 보잉에 조종사들의 기체전환교육을 의뢰했었지만 보잉은 시장에서 의심사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들의 요구를 묵살했었다고 한다.("그냥 태블릿 교육받고 날려~ 문제없어~" 했겠지.) 사고 직후에는 모든 잘못을 조종사에게 덮어씌우는 파렴치한 짓도 서슴지 않았다.
MCAS가 필수불가결한 시스템인가에 대한 의견도 분분하다. 분명 MCAS는 비행기 실속 방지를 위한 좋은 의도로 설계된 시스템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MCAS의 탄생배경에 의문을 품는 얘기도 많다. 훈련된 조종사라면 MCAS 없이도 얼마든지 안정적 운행을 하는 것이 가능한데, 737 MAX를 기존 737과 비행특성이 유사한 것처럼 속이기 위한 목적으로 MCAS를 개발해서 몰래 넣었다는 분석이 있다. 그러니까 조종사에게 이 기능을 알리지도 않았지.
두 편의 보잉 737 MAX 추락사고는 21세기 최악의 항공사고로 기록될 것이며 영원히 씻을 수 없는 보잉의 불명예가 될 것이다. 기업이든 사람이든 신뢰를 쌓아가는 데는 수십 년이 걸리지만 이 신뢰를 박살 내는 것은 단 하나의 사건이면 충분하다. 생명과 안전, 환경의 가치를 무시한 채 수익창출에만 집중해서는 오래 살아남는 기업이 될 수 없다. 역사가 그것을 증명한다.
사고로 희생된 아무 죄없는 탑승객 및 항공사 직원들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