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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제보다 나은 오늘 Mar 02. 2023

아빠, "엔빵"이 뭐야?

신조어에 관한 짧은 고찰

"햐~ 무슨 공용전기요금이 이렇게 많이 나왔어? 이 아파트에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고 기껏 가로등이나 현관등 정도 켜고 지하주차장 조명과 환풍시설 가동하는 비용일텐데 이렇게나? 그거 아파트 가구수로 엔빵 하면 그리 많이 안 나올 각인데."


옆에서 가만 듣고 있던 딸아이가 내게 묻는다.


아빠, 엔빵이 뭐야?


 빵이니까 먹는 건가? 아니지.

 나는 "무언가 내야 할 돈이 있으면 그 일에 관계된 사람들이 모두 균등하게 돈을 나누어 내는 행위"라고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비슷한 말로 "더치페이"가 있긴 하지만 이건 밥값 술값 등 먹는 것에 한정하는 느낌이 강하니까 엔빵과는 어감과 범위가 살짝살짝 다르다. 불특정 다수를 뜻하는 변수 n을 써서 "1/n"로 표현하지만 "엔분의 일"이라고 읽기는 귀찮으니 "엔빵"으로 짧아진 말인 줄은 알겠는데, 이 "~빵"의 어원은 또 무엇인가.


 "담배빵(옷에 담뱃불똥이 튀어 구멍이 난 상황, 또는 불붙은 담배로 지지는 가학행위)", "생일빵(친한 사이에서 생일 축하의 의미로 용인되는 수준의 폭력을 행사하는 행위)"에 쓰이는 "~빵" 어미와는 또 다르니까 이건 같은 계열이 아닌 것 같고 어떠어떠한 상황을 함축하는 "~각" 어미와도 또 다른 느낌인데 암만 유사어를 찾아보려 해도 "엔빵" 비슷한 구조의 단어는 또 못 찾겠다. 매우 희박한 확률을 의미하는 "백만분의 일"을 또 "백만빵"이라고 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엔빵. 한자어로 암만 축약을 해봐도 "균등배분결제" 정도밖에 못 하겠는데 딱 두 글자로 줄일 수 있다니 이 얼마나 편리한가. "할많하않", "ㅇㄱㄹㅇ ㅂㅂㅂㄱ" 등 별 걸 다 줄여서 말하는 시대라지만 따로 공부해야만 알아듣는 젊은 세대용 신조어보다 "엔빵"은 고어처럼 느껴져서 정겹기까지 하다. 나도 한 때는 X-세대라 불리기도 했었는데 말이G.




 딸아이와 마트 장보러 갔다 오는 길에 상가 건물 외벽에 멋지게 LED 장식등이 켜진 걸 보고 딸이 묻는다.


아빠, 저것도 다 엔빵이야?


 오~ 우리딸. 아빠 닮아 학습능력이 빠르구나. 그나저나 단어 하나를 걸쳤을 뿐인데 마치 딸아이가 업력 3년은 더 된 직장인처럼 느껴지다니. 나 혼자만의 느낌일지 몰라도 "엔빵"은 어쩐지 일상어보다는 직장어에 더 가깝게 느끼진단 말이지. 어쨌든 그러니까, 딸아이가 엔빵이란 단어를 몰랐으면 "아빠, 저 외부장식등의 전기요금도 상가건물에 입주해서 사는 사람들이 모두 골고루 돈을 나눠 내야 하는 거야?"라고 물었을 건데, 딱 적절한 시점에 말하는 사람의 에너지와 듣는 사람의 에너지를 최소로 사용하며 완벽하며 찰지게 의사전달이 된 거다.




 신조어라 하기엔 너무 오래전에 고착화된 말이라 주제에 맞나 싶기도 하지만 어쨌든 본래 우리말은 아니니까 같이 엮어본다. 누구나 다 알법한 "가오"란 단어가 있다. 네이버 국어사전(고려대 한국어대사전)에 찾아보니, "‘폼(form)’를 속되게 이르는 말"로 정의가 되어 있던데 뭔가 해설이 많이 약하다. "허세" 또는 "똥폼" 같은 유사대체어가 있긴 한데, 이 역시 "가오"라는 말의 의미와 100% 통용되는 느낌이 없다. 느낌 전달이 안 된다면 같은 말이 아니다.


 음. 알긴 아는데 표현하기 어려운 "가오"의 느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찾고 찾아 나무위키에 등재된 표현을 빌려본다.


"동사와 결하여 '가오잡다'('우빵잡다')로 쓰이면 센척하다, 폼잡다, 허세부린다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명사로만 쓰이면 체면, 명예 정도 의미의 속어. 쉽게 말해 잘난 척.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나'라는 용례도 자주 쓰인다. 예사소리화되어 속어 / 유행어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간지와 비슷하다. 자신의 이득이나 보신보다 체면, 가오를 중시하는 남성을 두고 인터넷 속어로 가오가이가라 하기도 한다."


 조금 낫긴 한데, 그래도 약해약해. "가오잡다"에서의 가오하고 "가오난다"에서의 가오는 그 의미가 또 아주 미묘하게 다른 맛이 난단 말이지... 말의 기원이 일본어에서 와서 적극적으로 쓰기가 껄끄러운 비속어긴 하지만 어쩌랴. 우리말엔 이 말을 대체할 맛깔난 단어가 없는데. 한글을 무척 사랑하는 사람으로 필명까지 100% 순한글로만 사용하는 나이긴 하지만 대체할 단어가 없이 사회적으로 통용되고 고착화된 단어라면 그만 미워하고 이제 한글로 인정해줘도 되지 않을까 내심 살콤 타협해본다. 빵이나 담배도 원래 우리말 아녔는데 우리말화 된 단어들이고, 고착화 이전이라면 모를까 고착화가 끝나버렸으면 이걸 다시 재정의하기는 불가능할 것 같다.




 언어란 생명력을 가진 것 같아서 어떤 말은 쉽게 생겼다가 쉽게 소멸하기도 하고(탄생부터 소멸까지 불과 몇 년밖에 살지못한 "에바참치"의 명복을 빕니다.), "비속어"로 분류되어 갖은 핍박과 박해를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그 고유의 역할을 톡톡히 해 내며 장수하는 말도 있다.(대표적 예가 "가오" 되겠습니다.)


 생각해보니 신조어는 항상 있어왔고 언어도 시대에 따라 변한다. 한글(=훈민정음)로 적혀있지만 직관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용비어천가"나, 수백 년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광복 즈음에 쓰인 신문만 봐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표현들이 많지 않은가.


 통화를 기피하고 효율성을 중시하는 젊은 세대들이 그들 세대에서만 통용되는 축약어를 너무 많이 만들어내서 나 같은 라떼들은 가끔 별도로 "공부"까지 해가며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려 애쓰지만, 그 자체가 잘못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축약어 중에서도 공감을 얻고 타 세대까지 뿌리내리는 말들은 오래오래 살아남을테고, 그렇지 않은 말들은 또 곧 언제 그랬냐는 듯 소멸할테니까. PC통신때나 쓰던 "즐(유사어 KIN)" 이나 "방가" 같은 말들, 이미 다 멸종하고 안 남았듯이 신세대의 줄임말도 곧 취사선택을 받겠지.


 그나저나 "엔빵"은 어쩐지 아주 오래오래 생명력을 지속할 것 같다는 느낌적 느낌이다. 이미 아주 어린 내 딸조차 너무나 찰지게 잘 쓰는 단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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