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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제보다 나은 오늘 Mar 02. 2023

104주년 삼일절 대통령 기념사를 읽고 느낀 점

 논란의 제104주년 대통령 3.1절 기념사.

 일단 비판하기 전에 꼼꼼하게 전문을 읽고 시작하자. 문맥을 놓치고 단어에만 집중하다 본질을 놓치거나 역공받을 수도 있으니 숲을 보고 → 나무를 보고 → 이파리를 하나하나 뜯어보는 자세가 중요하다.


https://www.president.go.kr/president/speeches/u9KzF591


제104주년 3.1절 대통령 기념사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750만 재외동포와 독립유공자 여러분
오늘 백네 번째 3.1절을 맞이했습니다.
먼저,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신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들께 경의를 표합니다.
독립유공자와 유가족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104년 전 3.1 만세운동은
기미독립선언서와 임시정부 헌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국민이 주인인 나라,
자유로운 민주국가를 세우기 위한
독립운동이었습니다.
새로운 변화를 갈망했던 우리가
어떠한 세상을 염원하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인 날이었습니다.
그로부터 104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하고 고통받았던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봐야 합니다.
지금 세계적인 복합 위기,
북핵 위협을 비롯한 엄혹한 안보 상황,
그리고 우리 사회의 분절과 양극화의 위기를
어떻게 타개해 나갈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가 변화하는 세계사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미래를 준비하지 못한다면
과거의 불행이 반복될 것이 자명합니다.
아울러 우리는
그 누구도 자기 당대에 독립을 상상하기도 어려웠던 시절에,
그 칠흑같이 어두운 시절에,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던진 선열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조국이 어려울 때 조국을 위해 헌신한 선열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3.1운동 이후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일본은 과거 군국주의 침략자에서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안보와 경제, 그리고 글로벌 어젠다에서 협력하는
파트너가 되었습니다.
특히, 복합 위기와 심각한 북핵 위협 등
안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한미일 3자 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습니다.
우리는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과
연대하고 협력해서 우리와 세계시민의 자유 확대와
공동 번영에 책임있는 기여를 해야 합니다.
이것은 104년 전,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외친
우리 선열들의 그 정신과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국민 여러분,
우리가 이룩한 지금의 번영은
자유를 지키고 확대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과
보편적 가치에 대한 믿음의 결과였습니다.
그 노력을 한시도 멈춰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이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신 선열에게
제대로 보답하는 길입니다.
영광의 역사든, 부끄럽고 슬픈 역사든
역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미래를 지키고 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조국을 위해 헌신한 선열을 기억하고
우리 역사의 불행한 과거를 되새기는 한편,
미래 번영을 위해 할 일을 생각해야 하는 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우리 모두 기미독립선언의 정신을 계승해서
자유, 평화, 번영의 미래를
함께 만들어 갑시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혹시나 내가 오해하거나 놓치는 게 있을까 봐 세 번 네 번 꼼꼼하게 읽었다.

 그런데, 처음 읽자마자 무언가 컥 불편하다. 이미 여러 언론에 오르내리고 나 말고도 쓴소리 하는 사람들 많지만 그건 그거고 내 감정은 내 감정이지.


무엇이 내 기분을 불편하게 만들었나.



1. "독립유공자와 유가족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독립유공자들을 존경하며 그분들의 헌신에 감사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 그런데, "유가족께 감사"라는 표현은 어딘가 불편하고 자연스러워 보이지가 않는다. 우리가 장례식장 가서 "아이고, 감사합니다."라고 하지는 않는단 말이지...


 "유가족"의 사전적 정의 : 죽은 사람의 남은 가족.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유가족은 "위로"를 먼저 받고 그분들의 "아픔"에 공감먼저 해야 하지 않을까. 그들의 헌신과 희생에 "감사"하는 행위는 "위로"를 마친 다음일 텐데, "감사"가 먼저 튀어나와서 세월호 사건 때의 "고맙다" 방명록이 오버랩되는 것 같아 나는 이 문구가 무척 불편하다.



2. "우리는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하고 고통받았던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봐야 합니다."


 논란의 원인 결과 정리 문구.


 우리가 과거에 "국권을 상실한 이유"는 "세계사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라고 단정해버렸다. 그것도 대통령께서. 그것도 다른 날도 아닌 삼일절에. 나는 절대로 이 말을 인정할 수 없다.


 조선이 국권을 상실했던 시절, 나라가 힘이 없었고 세계사의 물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것은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을 "국권 상실의 원인"으로 단정해서는 안 되고, 이런 표현이 한 나라를 대표하는 대통령 입에서 나와서는 더더군다나 안 된다.


 성폭력 피해자에게 "옷을 야하게 입어서" 당한 거라고 할 건가?

 중앙선을 넘어 내 차를 들이박은 사고에서 "내가 전방주시를 태만히 해서" 사고를 못 피한 거라고 할 건가?

 도둑이 들었는데 "집 문단속을 안 하고 나가서" 내 잘못이라고 할 건가?


 아니잖아. 성폭력은 가해자가 "폭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벌어진 거고, 중앙선 차사고는 가해자가 "중앙선을 예고도 없이 침범해서" 벌어진 거고, 물건 도난은 들어가서는 안 되는 "주거 침입"을 해서 그런 거 잘 알잖아. 그럼 나라가 힘이 없고 세계사 물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다른 나라는 국권을 언제든 상실해도 당연하고 상관없다는 말인가.


 우리가 국권을 상실한 원인은 명명백백하게 "일제가 침략"해서 그런 거다. 아니, 전 세계 사람이 다 알고 있는 상식 중 상식인데, 왜 우리가 잘못해서 국권을 상실했다는 말이 그것도 "삼일절"에 대한민국 "대통령"의 입에서 나오냔 말이다... 나는 정말 화나기 전에 슬프고 착잡한 생각이 든다.



3. 일본은 ~~~ 파트너가 되었습니다.


 아. 일본은 파트너가 되었구나...


 그런데, 언제부터...?

 "될 수도 있습니다"도, "되어야 합니다"도, "되면 좋겠습니다"도 아니고 "되었습니다.(=Did)" 단정적 과거형이다. 내가 외국 나와서 모르는 새 대한민국과 일본 사이에 뭔가 많은 일이 있었나 보다.


 일본에 제대로 된 사과와 배상도 안 받아낸 지금인데, 대다수의 국민들이 일본을 언제부터 파트너로 인정하고 인식했지??? 아, 내가 외국에 살다 보니 정말 국가 외교가 어떻게 진행되는 건지, 국민감정이 어떻게 시시각각 변한 건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그런데... 만의 하나, 대다수의 국민들이 아직도 일본을 "파트너"로 인식하고 있지 않는 상황이라면, 대통령이 저렇게 "되었습니다."라고 한 마디만 하면 파트너가 진짜 된 걸까?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도 아니고... 대통령의 직무권한에 불편한 이웃나라를 국민 동의 없이 파트너로 격상할 권한도 포함된 걸까?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이니까 그 정도는 해도 되는 걸까?


 내 생각엔 아닌 것 같은데... 에라 잘 모르겠지만 여전히 불편하다 불편해...

 그런데 암만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은데... ㅠㅠ






 초급 간부 시절에 본사에서 근무하면서 "사장님 말씀자료"를 회의 전에 자주 작성했었다.


 회사 사장님이 바보라서 일개 초급간부가 주제넘게 감히 "사장님 말씀자료"를 작성하는 게 아니다. 사장님 말씀에는 권위가 부여된다. 조직 간 협업체계로 일을 하지만, 사장님의 권위를 빌려 사장님의 판단과 강평을 통해 일의 방향이 결정되고 업무의 시발점을 만들려면 실무 차원에서의 협의를 바탕으로 사전에 "사장님 말씀"의 내용과 수위가 조절되고 조직 내에서 암묵지를 만든 후 비서실과 사장님께 보고된다. 회의자료 및 말씀자료를 사전에 보고 받고 모든 검토가 끝난 후, 사장님은 거기에 첨삭해서 본인의 말씀을 확정하신다.


 행사 말씀자료도 비슷하다. 행사 성격에 맞는 말씀자료는 행사 실무자가 준비한다. 준공식을 예로 들자면, 준공이 되기까지의 근무자 노고치하, 지역 주민들 협조와 이해에의 감사, 준공 이후의 기대효과, 유관기관 감사인사 등 "빼먹으면 안 되는" 멘트가 있나 없나 여러 업무관계자들이 말씀자료 초고를 돌려 읽으며 수 차 보강한 후에 사장님께 보고된다. 사장 혼자서는 저런 디테일한 정보를 다 챙길 수 없기 때문에 당연히 실무자가 초고를 만든다.


 조직장의 공식멘트는 그냥 조직장 기분대로 내뱉는 말이 아니다.

 조직 내에서의 공감대와 지지를 바탕으로 조직을 대변해서 무게감 있게 해야 한다. 가끔 대리 때 과장 때는 일 잘한다 소리 듣다가도 처장, 본부장 되면 망가지는 사람들이 나오는데, 그중 상당수는 자기 직급에 맞지 않는 언어습관을 고치지 않아서 그런 경우를 많이 본다. "부장 언어"는 "대리 언어"하고 달라야 하며, "사장 언어"는 "부장 언어"하고 달라야 한다. 조직장에 주어지는 무게감을 감당하려면 입부터 조심해야 한다.



 다시 삼일절 기념사로 돌아가서...


 기념사 초고, 누가 썼을까. 최소 행사 연관부처 5직급 사무관 또는 4직급 서기관이 초고를 잡고 외교, 국방, 경제 등 관계부처 의견을 조회해서 대통령 비서실을 거쳐 대통령 당신 본인께서 확정하셨을 텐데, 대체 몇 줄 되지도 않는 표현 안에 왜 저렇게 많은 불편한 내용들을 감수하지 못했을까. 감수를 다 했는데도 저런 거면 저게 정말 우리 손으로 뽑은 대통령님의 본심이었던 걸까.


 난 정말 궁금하다...




하나만 더.

제발 저 슬로건은 폐기하고 제대로 된 슬로건을 다시 만들기를 간청드려본다.

저 슬로건, 정말 다시 보고 싶지 않은데, 삼일절 행사장에 어울리지도 않는 내용이구만 대문짝만 하게 다시 붙었다.


이유는 이미 디테일하게 정리했으니 제발 좀 헤아려 주시길...ㅠㅠ


https://brunch.co.kr/@ragony/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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