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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제보다 나은 오늘 Aug 11. 2023

저격수의 DNA를 가진 아이도 있어요

왕의 DNA를 가진 아이의 학부모님께

왕의 DNA를 가진 아이의 학부모님께

 초등교사 사망사건 이후로 전국에 계신 선생님들의 울분과 분노, 부당한 대우에 대한 원성이 높아지는 가운데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사실 이 세상에는 또라이들 쎄고 쎘고 이 정도의 학부모 갑질과 괴롭힘은 그리 드물지 않을 지언대, 이 사건이 이렇게 파급이 큰 이유는 아래 편지(라고 쓰고 명령문이라 읽는다)를 쓴 주인공이 다른 행정부서도 아닌 교육부 5급 사무관 출신이라는 것과, 본인의 자녀가 "왕의 DNA"를 가진 아이라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https://www.news1.kr/articles/5137630


 그런데 어쩌랴. 세상에는 다양한 DNA가 있듯, 나는 애석하게도 "저격수의 DNA"가 있는 사람인데. 갑자기 내면의 DNA가 반응을 해서 어쩔 수가 없다. 브런치 운영팀도 라이플 분야 크리에이터로 나를 지정하려다 실수해서 라이프 분야로 잘못 배정한 것 같단 말이지.


 "사무관님. 저를 나무라지 마세요. 댁의 아드님이 왕의 DNA를 가진 것처럼 저도 특정 DNA를 타고나서 어쩔 수가 없어요."






 [ 이하, 이 편지(명령문)을 받고 치가 떨렸을 법한 초등학교 교사로 빙의해서 돌려드립니다. ]



왕의 DNA를 가진 아이의 학부모님께


1. 하지마. 안돼. 그만!! 등 제지하는 말은 '절대'하지 않습니다.
- 강력제지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분노 솟구쳐오릅니다. 위험한 행동 및 제지가 필요한 경우, 관심을 다른 곳으로 전환을 시킵니다.(방향전환하는 개념)


→ 강력제지하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가정교육부터 착실히 시켜서 학교로 보내세요. 강력제지해야 할 상황이 닥치는 것조차 저는 싫습니다. 대부분의 아이에겐 그런 상황 자체가 안 생겨요. 그리고, 강력제지해야 할 상황이면 저도 제 자신도 모르게 분노가 솟구쳐 오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그런 상황 "절대" 만들지 마세요.

 그리고 감히 교사에게 이딴 식으로 "명령"하지 말기 바랍니다.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도 아니고, "하지 마세요"도 아니고 "하지 않습니다"네요? 하, 진짜. 제가 무슨 유치원 아이입니까? 제가 보호자분께 "대한민국 5급 사무관은 이런 말 절대 하지 않습니다."하고 적어 보내면 기분 좋겠어요?

 하나만 더 물어보죠. 댁의 아이가 수업 중 갑자기 고성을 지르거나, 갑자기 흉기를 들고 다른 아이를 위협하거나, 밥먹다 식판을 집어던지는 상황이라면 "하지마, 안 돼, 그만!!!" 이란 말을 "절대" 하지 않고 어떻게 제지하죠? 그리고, 강력제지하지 않고 있다가 엄한 다른 아이가 피해를 볼 상황이라면 그 상대방 아이 학부모는 가만히 있을까요? 정말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명령문"을 교사에게 적어 보낸 겁니까?


2. 싫다는 음식을 억지로 먹지 않게 합니다.
 - 질기거나 딱딱한 음식이 해롭습니다. 급식을 억지로 먹게 하면 독이 됩니다.

→ 아니, 이것 보세요. 교육부 5급 사무관 출신이라면서요? 교육청에서 일선 학교로 내려보내는 "급식 지침"이 있다는 거 모르세요? 학교 급식은 모든 사람의 기호를 모두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이들 급식 지도 시 "먹고 싶은 것만 골라 먹으세요~"라고 해서도 안 됩니다. 급식 지도 역시 교육의 한 부분이며 건강하고 다양한 식재료를 즐기는 방법을 교육받으며 사회인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초등학교 급식실에는 기준 이상으로 질기거나 딱딱한 음식이 나오지도 않아요.

 정 불만이면 도시락 싸서 보내세요.


https://brunch.co.kr/@dudnwl/313


3. 또래의 갈등이 생겼을 때 철저히 편들어 주세요.
- 이미 충분히 잘못을 알고 있어서 감정을 충분히 읽어주시면 차츰 행동이 수정됩니다.

→ 아니 진짜. 이걸 말이라고 쓰셨습니까? 편들어달라니. 아이들끼리 다툼이 생겼을 때 누구보다 공정해야 할 사람이 이를 지켜보는 담임교사 아닌가요? "이미 충분히 잘못을 알고 있"다면 잘못을 알아차렸을 때 즉시 사과하는 훈련을 시켜서 학교에 보내세요. 잘못은 알지만 절대 사과하지 않는 나쁜 습관을 집에서부터 엉망으로 키워서 학교를 보내놓고, 무슨 대단한 케어를 바라는 겁니까? 차츰 행동이 수정? 아, 그러니까, 집에서 부터 감정을 읽어주고 "차츰 행동을 수정시켜서" 학교에 보내란 말입니다. 여러사람 괴롭히지말고. 네?


4. 지시. 명령투보다는 권유. 부탁의 어조로 사용해주세요.
- 왕의 DNA를 가진 아이이기 때문에 왕자에게 말하듯이 듣기좋게 돌려서 말해도 다 알아듣습니다. 지시하거나 명령하는 식으로 말하면 아이는 분노만 축적됩니다. 특히, 반장, 줄반장 등 리더의 역할을 맡게되면 자존감이 올라가 학교 적응에 도움이 됩니다.

→ 지금 제가 딱 그래요. 지시 명령형 편지를 받아서 분노가 축적되다 못해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에요. 같은 내용을 공손하게 부탁해도 어이가 없을 판에 진짜 어이가 없네요. 반장? 그거 제가 시키나요? 학급위원회 구성해서 아이들끼리 선거해서 뽑는 거 모르세요? 그나저나 바닥까지 추락해버린 제 자존심은 어디가서 어떻게 찾나요? 참고로, 저도 듣기 좋게 돌려 말해도 다 알아듣습니다. 저, 모국어 한국어 쓰는 한국인이란 말입니다.


5. 표현이 강하고 과장되게 표현합니다.
- 학교가 지옥이다. 학교를 폭발하고 싶다 등은 학교가기 힘들고 무섭다란 표현입니다.
80%는 버리고 20%정도로 해석하시면 됩니다.

→ 일반 문법 지적부터 하고 넘어갑시다. "학교를 폭발하고 싶다"? 어느 나라 말입니까? "폭발하다"는 "힘이나 열기 따위가 갑작스럽게 퍼지거나 일어나다"의 뜻을 지닌 자동사입니다. 학교가 아무것도 안 했는데 스스로 폭발합니까? 더 말해본들 입만 아프니 옳은 용례는 알아서 찾아보세요. 교육부 사무관 출신이라면서 국어 사용도 제대로 못 하다니 보는 제가 다 부끄럽습니다.

 제 표현이 강하거나 과장되더라도 80%는 버리고 20%의 핵심만 잘 새겨 들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학부모님의 자녀가 저런 사실이 있는 줄 알았으면 최소한 부끄러워하고 미안해하고 미리 양해구하고 죄송해해야 맞는 거 아닌가요? 애가 저러니 니가 알아서 걸러 들어라? 학부모님도 제 요점만 알아서 걸러 들으세요. 그럼 되겠네요. 이미 경험도 많으실테니.


6. 칭찬과 사과에 너무 메말라 있습니다.
- 칭찬결핍과 억울함(=사과부족)이 뇌손상의 큰 이유입니다. 칭찬은 과장해서 사과는 자주, 진지하게 합니다.

→ 아니 진짜 가지가지 하시네... 잔뜩 메말라 있는 아이를 학교에 보내면 어떡합니까? 집에서 충분히 물을 주든 사과주스를 주든 메마르지 않게 해서 보내세요! 앞서 3번 내용을 보아하니 본인은 잘못을 알아도 사과 안 하면서 뭔 본인에게는 사과를 바란답니까? 그리고 칭찬 자주 해달라는 요청은 가끔이나마 듣긴 하지만 자주 진지하게 사과해 달라는 부탁(=사실은 명령)을 담임교사에게 하는 학부모는 세상 처음 보는군요. 아니, 이게 정상적인 부탁인가요? 어이가 없습니다.


7. 회화에는 강점이고 수학은 취학합니다.
- 뇌세포가 활성화될 때까지 쓰기와 수학 등 학습에 대해 강요하는 것은 자제 부탁드립니다.

→ 뇌세포가 활성화될 때까지 그냥 학교를 보내지 말지 그러셨어요. 학교에서 학습을 강요하지 않으면 그럼 뭘 하란 말인가요? 여기가 무슨 탁아소입니까?

 그리고, 아까 문법 지적을 한 번 해서 넘어가려 했는데 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회화에는 강점이고" - 회화? 그림을 잘 그린단 말? 말을 잘한다는 말? 앞 뒤 문장 다 읽어봐도 무슨 뜻인지 짐작도 안 됩니다. 뒤에 "쓰기"란 문장이 있지만 대비되어 쓰시려면 "말하기"라고 표현함이 적절하고 그게 아니라면 "그림은 잘 그리며" 정도가 적절한 문장입니다.

 그다음 문장은 그냥 처참하군요. "수학"이 자녀분 이름인가요? 취학하다니. 에효. 뒷말은 아끼렵니다 쯧쯧.


8. 인사를 두 손 모으로 고개숙여 인사를 강요하지 않도록 합니다.
- 고개 숙이는 대신 멋있게 손 흔들기 등 다른 방법으로 인사합니다. 극우뇌 아이들의 본성으로 인사하기 싫어하는 것은 위축이 풀리는 현상입니다. 인사를 잘해야 한다는 부담에 가두시면 자존감이 심하게 훼손됩니다.

→ 담임교사한테 보내는 편지라면서 최소 맞춤법은 좀 한번 확인하고 보내지 그러셨어요. "모으고"겠죠.

어쨌든 그러니까... 공손한 인사법을 가르치면 자존감이 상하니 강요하지 마라? 그럼 교사가 상하는 자존감은 그냥 교사가 감내해야 하는 건가요? 공손히 하는 인사법을 가르치면 그건 교육이 아니라 강요다? 쓰기도 가르치지 마라 수학도 가르치지 마라 식사예절도 가르치지 마라 인사법도 가르치지 마라. 진짜 진지하게 묻는 건데요, 그럼 대체 학교는 왜 자꾸 보내려고 하시는 거죠?


9. 등교를 거부하는 것은 자유가 허용되자 제일 힘든 것부터 거부하는 현상입니다.
- 교실에서 돋보이고 싶지만 현실은 전혀 반대여서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또한 소통이 불편해서 아이들에게 놀림받을까 공포감으로 학교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 아이가 학교에서 또래들에게 돋보일 거리를 만들어 줄 때까지 기다려주어야 합니다.

→ So What? 그래서 어쩌라고요? 이걸 대체 저한테 왜 보내시는 건데요? 아이가 학교에 안 나와도 그냥 이해해라? 학부모님의 아이만 돋보이도록 교사인 내가 알아서 물밑지원해라? 대체 뭘 기다려주어야 하는 건데요? 돋보일 거리는 제가 만들어줘야 하는 건가요? 대체 요점이 뭔데요?






 오해하실까 봐 부연설명 드리자면 저는 현재 교직에 있지 않으며 심지어 대한민국에 주거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저 또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학부모의 한 사람으로서 적어도 배웠다는 대한민국 5급 사무관께서 이렇게 분노를 유발하는 빌런짓을 했다는 기사를 접하고선 제 몸 안에 숨어있는 저격수 DNA를 주체할 수 없어 현직 일선교사의 마음에 빙의해서 회신글을 적어보았습니다.


 교육 일선에서 오늘도 땀 흘리며 아이들을 사랑과 애정으로 키워내는 모든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에효... 고생들 많으셔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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