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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제보다 나은 오늘 Jun 30. 2024

산불 진화 현장에서

아직도 탄내가 난다

 때는 평온한 토요일 오후 2시.

 회사 단톡방에 보고가 하나 올라온다.


 "회사 울타리 경계에서 연기가 보입니다. 보안요원께서는 예의주시 바랍니다."


 '아니 또야? 아 왜 주말만 되면 자꾸 불나는 건데 귀찮게...'


 요즘 고의산불이 워낙에 잦아서 날라오는 화재신고에 별 감흥도 안 들었다. 올 들어 저게 대체 몇 번째야. 저러다 자연진화되고 말겠지. 어차피 지역주민들이 고의로 내는 산불, 적당히 다 태워야 끝날 일. 회사 울타리 밖에서 벌어진 일이니 직원들 동원할 일도 아니고 소방서나 정부당국에 신고해봐도 소규모 고의산불쯤에는 아무도 관심도 안 가진다.


 보안부서에서 확인보고가 올라온다.


 "화재는 울타리와 어느 정도 떨어진 곳으로 회사 영향은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계속 주시하겠습니다."


 그래그래. 그럼 나 신경 안 쓴다? 어젯밤 비도 왔으니 큰 불로 번지진 않겠지.

 그냥 그런 일련의 이벤트로 치부하고 느긋한 오후를 보내다 이제 저녁을 막 챙겨 먹고 있던 찰나에, 긴급하게 단톡방이 또 울린다.


 "화재가 울타리 근처까지 접근했습니다. 전기부서 비상대기자는 즉시 울타리 전력선을 철거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니, 아깐 괜찮대매? 뭔 상황이야?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나도 보안차량을 호출해서 화재현장에 도착.



 아이구야. 이거 정말 큰일 날 뻔했네.

 화마가 울타리 직전까지 접근했었는데, 보안요원들이 적기에 불을 막았기에 더 큰 화재로 진전되지는 않았다. 출동한 비상대기 요원들도 울타리 전력선을 철거할 필요까진 없게 되었다.


 불이 번진 곳은 회사 부지 중 가장 고지대이며 사람들 발길이 뜸한 곳.

 평상시엔 별로 갈 일이 없는 곳이라 제초관리 사각지대였으며 우거진 수풀들 때문에 화재 방지가 더 어려웠다. 하지만, 전력선이 지나가는 곳이므로 화재가 번졌다면 엄청난 생산차질이 불가피했을 상황이었다.


 현장에 가 보니, 이런 긴급 산불에 전혀 대응할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일단, 내가 이곳 총책임자니까 사태를 정리하고 개선시켜야지. 먼저 초동 진화에 헌신한 보안요원들에게 칭찬과 감사인사를 드렸고, 회사 차원의 포상을 약속했다. 운 좋게 소 안 잃었으니 소 잃기 전에 외양간도 고쳐야지. 울타리 주변의 수풀들을 일정구간 제거해서 만의 하나 화마가 다시 닥치더라도 자연진화 할 수 있는 방화라인을 만들 것과, 소화기 & 방화수의 상시 비치를 지시했다. 수도배관 연결이 없는 곳이므로 대형 물탱크를 설치하고 물을 길어와서 담아둬야겠다.


 양치기 소년 거짓말에 동네주민들이 당하듯이, 너무 자주 발생하는 고의산불에 내가 좀 안일했다. 화재신고 초기에 감시와 보고체계를 더 단도리했었다면 저렇게 긴박하게 출동하는 일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말 그대로 "울타리 너머 불구경"만 하다가 "적기 진화"시점을 놓칠 뻔한 것. 보안요원 둘이서 적기에 잘 막기는 했지만 불이 번졌다면 전력라인 다 태워먹고 큰 사고로 번질뻔한 사태였다.


 여기 책임자 생활 몇 달 채 안 남았는데 무사히 전역..아니 하번하게 해 주소서.....


 아 진짜 불 지르는 동네 주민들. 너무 싫다. ㅠㅠ

 이번 산불도 고의방화가 매우 강하게 의심된다.

 산불의 이유는 오래된 잡목을 태워서 비료화시키고 그 자리에 가축들 먹이기 좋은 새 풀을 자라게 하려는 목적이 크다고. 선진국에선 산불 위험으로 금하는 "화전농법"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고의산불이 워낙에 많아서 산림이 빽빽한 곳 없이 듬성듬성하다. 그래서, 어지간히 불이 나도 큰 불로 번지는 경우는 잘 없다. 이런 일들이 워낙 비일비재해서 나도 이번에 신경을 덜 써버렸다.


 놀랜 마음을 진정하며 숙소에 돌아왔는데 아직 탄내가 심하게 난다. 내가 직접 불을 끄고 온 것도 아닌데, 잔여연기 좀 맡고 왔다고 그 새 냄새를 옴팡 뒤집어쓴 거다. 겉옷, 속옷에 숯불향이 강하게 배어서 옷을 다 갈아입었는데도, 불향이 피부에서 난다. 아, 그렇지. 숯불구이 해 먹으면 고기가 옷을 입고 있지 않아도 불맛+고기맛 나는 거 맞지. 진화된 화재현장 잠시 돌아만 보고 와도 이런데, 화재현장을 매일 가셔야 하는 소방관님들은 몸에서 일 년 내내 탄내가 가실 일이 없을 것 같다.


 암튼 회사를 운영하며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


 첫째. 인명사고.

 둘째. 화재사고.


 암튼 오늘도 무사히. 안전하기를. 인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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