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탄내가 난다
때는 평온한 토요일 오후 2시.
회사 단톡방에 보고가 하나 올라온다.
"회사 울타리 경계에서 연기가 보입니다. 보안요원께서는 예의주시 바랍니다."
'아니 또야? 아 왜 주말만 되면 자꾸 불나는 건데 귀찮게...'
요즘 고의산불이 워낙에 잦아서 날라오는 화재신고에 별 감흥도 안 들었다. 올 들어 저게 대체 몇 번째야. 저러다 자연진화되고 말겠지. 어차피 지역주민들이 고의로 내는 산불, 적당히 다 태워야 끝날 일. 회사 울타리 밖에서 벌어진 일이니 직원들 동원할 일도 아니고 소방서나 정부당국에 신고해봐도 소규모 고의산불쯤에는 아무도 관심도 안 가진다.
보안부서에서 확인보고가 올라온다.
"화재는 울타리와 어느 정도 떨어진 곳으로 회사 영향은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계속 주시하겠습니다."
그래그래. 그럼 나 신경 안 쓴다? 어젯밤 비도 왔으니 큰 불로 번지진 않겠지.
그냥 그런 일련의 이벤트로 치부하고 느긋한 오후를 보내다 이제 저녁을 막 챙겨 먹고 있던 찰나에, 긴급하게 단톡방이 또 울린다.
"화재가 울타리 근처까지 접근했습니다. 전기부서 비상대기자는 즉시 울타리 전력선을 철거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니, 아깐 괜찮대매? 뭔 상황이야?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나도 보안차량을 호출해서 화재현장에 도착.
아이구야. 이거 정말 큰일 날 뻔했네.
화마가 울타리 직전까지 접근했었는데, 보안요원들이 적기에 불을 막았기에 더 큰 화재로 진전되지는 않았다. 출동한 비상대기 요원들도 울타리 전력선을 철거할 필요까진 없게 되었다.
불이 번진 곳은 회사 부지 중 가장 고지대이며 사람들 발길이 뜸한 곳.
평상시엔 별로 갈 일이 없는 곳이라 제초관리 사각지대였으며 우거진 수풀들 때문에 화재 방지가 더 어려웠다. 하지만, 전력선이 지나가는 곳이므로 화재가 번졌다면 엄청난 생산차질이 불가피했을 상황이었다.
현장에 가 보니, 이런 긴급 산불에 전혀 대응할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일단, 내가 이곳 총책임자니까 사태를 정리하고 개선시켜야지. 먼저 초동 진화에 헌신한 보안요원들에게 칭찬과 감사인사를 드렸고, 회사 차원의 포상을 약속했다. 운 좋게 소 안 잃었으니 소 잃기 전에 외양간도 고쳐야지. 울타리 주변의 수풀들을 일정구간 제거해서 만의 하나 화마가 다시 닥치더라도 자연진화 할 수 있는 방화라인을 만들 것과, 소화기 & 방화수의 상시 비치를 지시했다. 수도배관 연결이 없는 곳이므로 대형 물탱크를 설치하고 물을 길어와서 담아둬야겠다.
양치기 소년 거짓말에 동네주민들이 당하듯이, 너무 자주 발생하는 고의산불에 내가 좀 안일했다. 화재신고 초기에 감시와 보고체계를 더 단도리했었다면 저렇게 긴박하게 출동하는 일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말 그대로 "울타리 너머 불구경"만 하다가 "적기 진화"시점을 놓칠 뻔한 것. 보안요원 둘이서 적기에 잘 막기는 했지만 불이 번졌다면 전력라인 다 태워먹고 큰 사고로 번질뻔한 사태였다.
여기 책임자 생활 몇 달 채 안 남았는데 무사히 전역..아니 하번하게 해 주소서.....
아 진짜 불 지르는 동네 주민들. 너무 싫다. ㅠㅠ
이번 산불도 고의방화가 매우 강하게 의심된다.
산불의 이유는 오래된 잡목을 태워서 비료화시키고 그 자리에 가축들 먹이기 좋은 새 풀을 자라게 하려는 목적이 크다고. 선진국에선 산불 위험으로 금하는 "화전농법"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고의산불이 워낙에 많아서 산림이 빽빽한 곳 없이 듬성듬성하다. 그래서, 어지간히 불이 나도 큰 불로 번지는 경우는 잘 없다. 이런 일들이 워낙 비일비재해서 나도 이번에 신경을 덜 써버렸다.
놀랜 마음을 진정하며 숙소에 돌아왔는데 아직 탄내가 심하게 난다. 내가 직접 불을 끄고 온 것도 아닌데, 잔여연기 좀 맡고 왔다고 그 새 냄새를 옴팡 뒤집어쓴 거다. 겉옷, 속옷에 숯불향이 강하게 배어서 옷을 다 갈아입었는데도, 불향이 피부에서 난다. 아, 그렇지. 숯불구이 해 먹으면 고기가 옷을 입고 있지 않아도 불맛+고기맛 나는 거 맞지. 진화된 화재현장 잠시 돌아만 보고 와도 이런데, 화재현장을 매일 가셔야 하는 소방관님들은 몸에서 일 년 내내 탄내가 가실 일이 없을 것 같다.
암튼 회사를 운영하며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
첫째. 인명사고.
둘째. 화재사고.
암튼 오늘도 무사히. 안전하기를. 인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