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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제보다 나은 오늘 Oct 03. 2024

내가 파키스탄 지사에 부임한 후 가장 잘한 일

카슈미르에 대한민국 깃발을 꽂다

 지사에 부임한 지 만 3년을 거의 채워간다.


 아마 특별한 일이 없다면 연말에 고국에 복귀할 수 있을 것이다.


 특별한 일이 있다면 (파키스탄 국내 안전상황이 더더욱 악화되어 폭력시위 및 테러가 심해지고 민심이 흉흉해지며 경제가 붕괴되고 정부가 디폴트를 선언하는 등 말 그대로 개판이 되면 지금도 개판이지만) 후임 파견자 공모에 실패할 것이고 아마도 내년 1년 자동 부임연장이 될 수도 있겠다.


 내 목숨값에 비하면 싸 보이긴 하지만, 안 받는 거보단 나은 국가위험수당도 가계에 적잖은 도움이 되며, 해외근무를 하는 동안 여전히 완벽하진 않아도, 영어로 프리스피킹 되는 실력을 길렀으니 그 또한 큰 소득이라 하겠다.




 지사에 부임한 후 정말 원 없이 이것저것 많이 했다.

 비록 지사장에 불과한 신분이지만, 현지 조직을 통솔할 수 있는 대부분의 권한을 위임받아 조직을 재정비하고 업무절차를 셋업하고 기본원칙과 규율을 정립하고 직원들 충성심을 고취시키는 등 조직장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업무를 다 건드려본 것 같다.


 세부 업무를 다 나열하면 셀프 용비어천가 셀프 사모곡밖에 안 될 테니 차치하고, 암튼 나 스스로 이곳에 부임해서 가장 잘 한 한 가지를 꼽으라면 단연 국기 및 사기 게양대를 신설한 일을 꼽고 싶다.


 남의 나라에 내 조국의 국기를 다는 일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이랴. TPO가 맞지 않으면 자칫 린치를 당할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다. 남의 영역에 내 깃발을 단다는 의미는 내가 그 땅을 정복했다는 함의를 가지며 내 권위에 도전하지 말라는 일종의 선언도 될 수 있다. 그 땅에 출입하는 사람들의 인정을 득할 자신과 확신이 없다면 기득권이 있는 땅에 기득권과 배치되는 깃발을 거는 행위 자체가 매우 위험한 일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나는 이곳 지사에 꼭 태극기회사 사기를 게양하고 싶었다.

 이곳이 "대한민국"이 투자해서 건설한 사업장이며 "우리 회사"가 운영 중인 회사라는 사실을 당당하게 드러내며, 이 깃발을 보는 모든 사람들이 대한민국과 회사의 가치를 인정하며, 회사 내부 조직원들이 그 깃발을 보며 날마다 소속감자부심을 기르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곳은 파키스탄. 파키스탄 중에서도 위험한 카슈미르.

 현지 분위기 안 살피고 너무 나가도 안 된다.


 일단, 사무건물 길목의 공터 한쪽에 국기게양대 설치를 지시했다.

 다만, 국기대는 하나가 아닌 다섯 개를 설치했다. 국기봉의 높이는 차이 없이 모두 똑같이 설치되도록 신경 쓰라고도 했다.


 국기봉이 다섯 개인 이유는,


1. 파키스탄 국기 : 당연히 여긴 파키스탄 내 지사니까 기득권 무시하면 안 된다.

2. 카슈미르 주기 : 카슈미르는 파키스탄의 행정구역 중 하나일 뿐이지만, 실제는 거의 별개의 국가처럼 취급된다. 카슈미르 내에선 카슈미르 주기가 우선 취급되어야 한다.

3. 대한민국 국기 : 사실 이게 핵심인 거다. 비록 파견 나와 있지만 나는 대한민국 사람. 내가 지사장인데.

4. 회사기 : 회사깃발이 빠지면 안 되지. 소속감을 높이고 자긍심, 충성심을 높이는 방법이다.

5. 프로젝트 회사기 : 우리 회사 말고 여기에 투자한 설비 소유회사가 별도로 존재한다. 존중과 상호번영의 의미로 같이 게양키로 결정.


 높다란 국기봉을 차례대로 설치하고, 드디어 깃발을 올렸다.



 힘차게 깃발이 나부낀다. 가슴이 뭔가 뜨거워진다. 멀고도 먼 나라 파키스탄에서 바라보는 대한민국 국기라니. 조직을 대표하고 상징하는 회사깃발 역시 무언가의 응집된 힘이 있어 보인다.


 요것만 하면 심심하지. 나만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잖아.

 전 직원 집합. 대회의실에 모두 다 불러 모았다.




"오늘은 브랜드 교육을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대한민국 00 회사 00 지사 소속의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여러분들은 대한민국을 이해하고 대한민국을 존중하며 우리 회사에 대한 소속감과 자부심을 느껴야 합니다."


 대한민국 국기를 화면에 띄우며



"여러분들, 이게 뭔지 아시죠? 이거 보면 뭐가 떠오르나요?"


"BTS... Squid Game... Samsung... Kim Jeong-Eun(아니 그건 북한이고!)"


"네.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딱 떠올리신 그게 바로 국가의 이미지입니다. 저는 제가 지사장으로 근무하는 동안 더 다양한 한국의 이미지에 대해 여러분에게 전달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대한민국 00 회사의 직원으로서 한국에 보다 더 깊은 친밀감을 느끼며 한국을 잘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번엔 애플 로고를 화면에 띄우며

"이거 뭔지 모르는 분 있나요? 이거 보면 어떤 느낌이 떠오르죠?"


"Luxury. High tech. Expensive. USA...."


"그쵸? 제가 설명 안 해도 딱 떠오르는 느낌이 있죠?"


 이제 우리 회사 로고를 화면에 띄우며

"여러분들, 이게 뭔지는 알죠? 이제 뭐가 생각이 나나요?"


"......."


"네. 별로 생각나는 게 없죠? 아무도 알려주지 않아서 그럴 겁니다. 하지만, 이 회사에 20년 넘게 몸담고 있는 저는, 이 로고를 보면 너무나 많은 것이 생각이 납니다. 그리고 이 로고를 볼 때마다 저는 무척이나 제가 이 조직원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고 그리고 이 로고를 더욱 자랑스럽게 만들고 싶습니다."


 다시 이어지는 로고에 담긴 철학과 의미, 회사의 비전과 미션에 대한 강의.


 거의 한 시간에 걸친 내 열강을 마친 후 마무리 멘트.


"여러분. 여러분의 종교는 무엇인가요? 네.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대부분이 무슬림이란 사실을. 하지만, 제 종교는 우리 회사입니다. 여러분이 코란과 예지자 무함마드를 신성시하듯이 저는 이 회사 깃발과 로고를 매우 신성시하는 사람입니다. 회사 로고는 우리의 자부심, 자긍심, 가치관, 미래비전, 철학과 미션을 모두 내포하고 있는 심오한 상징입니다. 회사 로고를 항상 정갈하고 깔끔하게 정해진 규칙으로만 활용해 주시고 지금 이 시간부터 회사 로고를 함부로 취급하는 사람이 있다면 제가 엄벌을 내릴 것입니다. 더불어, 여러분들은 우리 회사 직원으로서, 회사의 가치를 더하고 자긍심이 배가되도록 모든 업무에 힘써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께 설명드렸듯, 앞으로 회사에 신입사원이 들어오게 된다면, 업무 OJT단계에서 회사 로고에 담긴 철학 교육부터 해 주세요. 여러분 한 명 한 명이 소중한 회사의 가족이며, 여러분들 누구든 회사 로고를 접하게 되면 우리 모두의 자긍심과 소속감을 느낄 수 있도록 마음가짐을 세우며 일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캬~ 내가 강의했지만 진심 감동적이다.

 비록 완벽한 영어 프리젠테이션은 아녔지만, 진심을 담아 말하면 진심이 전해진다.

 브런치 글도 스스로 쓰고 스스로 읽는 셀프 작가 셀프 독자 타입이지만, 지사장 특강 역시 스스로 강의하고 스스로 감동받는 셀프 화자 셀프 청자 스타일.


 국기게양대를 설치한 다음날부터 아침 출근길이 달라졌다.

 흐리멍덩 비몽사몽 출근해도 아침 바람에 나부끼는 태극기와 회사깃발을 보며 출근하면 강렬한 자부심과 함께 심장에서 뜨거운 피가 솟구친다. 나는 정말 이런 느낌을 모든 직원들과 나누고 싶은데, 얼마나 내 진심이 전해졌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이곳에 출근하는 모든 사람들이 깃발이 없던 어제와는 뭔가 분위기가 달라졌음은 느꼈으리라.


 깃발과 구호가 주는 힘은 위대하다.

 어릴 적, 국가의 강요로 의미도 잘 모른 채 "국기에 대한 맹세"를 암기하고, 매일 저녁 6시만 되면 부동자세로 "국기하강식"을 경배하며 자라긴 했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그런 행위들이 애국심과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일체된 소속감을 기르는 것에는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물론, 전근대적 통치행위라고 비판하는 시선도 많은 것 알고 있다.)


 오늘도 나는 나부끼는 태극기와 회사 깃발을 바라보며 출근한다.

 나는 그걸 바라보며 사는 것이 참 좋다. 나는 내가 한국인이며, 내가 이 회사 사람이라는 것이 매우 자랑스럽다. 그리고 국기 및 사기 게양대를 설치한 일은, 내가 부임해서 이룩한 가장 잘한 일이라고 스스로에게 칭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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