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은 있다
춘천이 경기도의 한 도시라 생각할 정도로 무지했던 나였다. 내가 102 보충대에 간다는 소식을 들은 복학생 형들은 심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연기하라고 했다. 난 연기하고 싶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도 시간은 간다. 미룰수록 부정적인 생각만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102 보충대라는 곳은 전원 강원도 사단에 배정받는 곳이다. 11사단에 배정받고 신병훈련소로 가서 본격적인 훈련을 받았다. 게시판에는 붙여져 있는 신문에는 자랑스럽게 행군 기네스 부대라고 나와있었다. 정말 지겹게 걷는 부대다. 그래서 일명 '젓가락'부대라고 불렀다.
훈련소에서 모든 과정을 마치고 자대 배정을 받는 날, 나는 수색대대를 명 받는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누구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색대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작전병에 지원한다. 발탁됐지만 사단본부에서 내려온 선임에게 자리를 뺏기고, 전투중대로 내려온다.
우리 소대(3소대)가 1년간 유격장 조교로 가게 된다. 유격장은 수색대대원이 꿈꾸는 유토피아다. 수색대대에서 이뤄지는 모든 훈련이 열외다. 부대와 따로 생활하기에 소대장, 부소대장과 소통만 잘 이뤄지면 낙원이 된다. 낙원이란 뜻은 각 부대의 훈련이 종료되는 순간부터 우리에게는 자유가 펼쳐졌다. 소대장을 잘 구슬리면 삼겹살과 소주를 맛볼 수 있었다.
힘든 조교 교육을 마친 후 사단본부에서 전화 한 통을 받는다. 이후 한 달간에 WAR GAME을 하러 용산 미군부대로 파견을 간다. 훈련을 하러 온 병사 중 전투병은 나 혼자였다. 용산이라기보다 미국에 다녀온 기분이 들었다.
파견을 다녀오는 동안 소대에는 커다란 사고가 일어났다. 잘 갈구는 병장과 내 동기 JYP가 영창에 다녀왔다.
군생활하면서 가장 감정이 크게 교차했던 시기였다. 11사단 내 모든 부대를 18단계 그네 넘기 코스로 안내했다. 신병훈련소 시절 동기들은 병장을 달고 훈련을 받으러 왔다. 그들에게 짜파게티 한 봉지를 건네며 반가움을 전했다.
제대빵을 심심하게 치렀다. 모포에 휘감겨 여기저기서 날아오는 발과 주먹에 맞아도 기분이 좋았다. 그래도 후임들이 때리는 강도가 약했다. 이유는 많이 갈구지 않아서였을까. 영창 덕으로 5일 뒤에 제대하는 동기 JYP는 내게 아껴둔 컵라면을 줬다. 서로가 바라보는 눈은 빨갛게 충혈 돼 있었다.
"밖에서 보자."
나는 JYP를 안아줬다.
"밖에서는 내가 형이다. 짜식아. 고마웠다."
JYP는 나이를 강조했다.
저녁 점오를 마치고 잠이 오지 않았다. 누워있는 후임들을 지켜보았다. 곤히 잠든 모습에 하루동안 쌓인 피로를 알 수 있다. 내게 있는 여러 물건들을 모두 나눠줬다. 군대에서 A급이니 B급이니 떠들어도 사회에서 필요 없다는 사실을 첫 휴가 때 깨달았다. 난 평소 신었던 전투화로 제대했다.
후임들을 바라보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무슨 감정일까. 아마도 미안한고, 고맙고, 아쉬운 마음일 것이다. 다들 다치지 말고 제대해서 서울에서 보자고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마지막으로 행군 중에 가장 많이 불렀던 [수색 파라다이스]를 남기겠다.